〈 121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42)
* * *
동굴을 빠져나가는 길목 앞, 긴장한 낯빛으로 일곱 명의 남녀가 섰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섯 명의 남녀가 서고, 두 명의 여인은 각각 델핀 선배와 셀린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렇게 안긴 두 사람 다 무언가 불만스러운 표정이라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면 특기할 만했다. 반면 그 두 사람을 안은 여인들은 꽤 만족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러든 말든, 나는 눈을 감고 최대한 기척을 재고 있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살점 씨앗들이 멀어졌을 무렵.
내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달려요!”
그러자마자 일제히 땅을 박차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섯 명의 신형이 쭉쭉 늘어나며 단숨에 공간을 압축시켰다.
그것이 신호탄이었다.
괴기스러운 비명 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
미친듯이 구덩이를 기어오르는 기척이 느껴졌다. 수십 마리의 살점 씨앗이 제 손톱을 비탈길에 박아가고 있는 듯했다.
그 굼뜨던 움직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력이었다.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살점 씨앗들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우리를 쫓으려 들었다.
다만 지능은 높지 못한 모양이었다. 비탈길에서 미끄러지는 개체가 많은지, 아직도 한 마리가 올라오는 기미가 없었다.
그렇게 거리를 성공적으로 벌렸다고 생각했을 때.
제 동료들의 몸뚱아리를 짓밟고, 한 마리의 살점씨앗이 구덩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눈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얼굴의 방향으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고 짐작했을 뿐이었다. 그 찰나의 정적이 지난 뒤.
살점 씨앗이 온몸을 비틀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기괴한 함성이 동굴 벽면에 부딪혀 쩌렁쩌렁 울렸다.
어마어마한 속력이었다. 마력으로 강화된 각력으로도 시시각각 거리가 좁혀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대로라면 뒤를 잡힐 것이 뻔했다. 그리고 지금 델핀 선배는 엘시 선배를 안고 있었고, 최후방에서 대응이 가능한 인원은 나뿐.
“제가 대응할 테니 계속해서 달려요!”
그럼에도 일행은 잠시 주춤했으나, 내가 재차 재촉하자 결국 그들도 엉거주춤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와 동시에, 살점 씨앗 하나가 엄습했다.
그 달리기 솜씨만큼이나 무시무시한 속도의 일격이었다. 어느새 길게 자라난 손톱에서는 검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액체에 닿은 돌바닥이 녹아내렸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새끼들, 산성독 가지고 있어요!”
혹시 몰라 나는 고함을 치며 살점 씨앗에 대한 정보를 전했다. 그리고 곧바로 검을 들어 살점 씨앗의 손톱을 쳐냈다.
깡,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불꽃이 튀었다. 물론 살점 씨앗의 손톱에서 줄줄 흘러나오던 독도 함께였다.
방울져 튀긴 그 검은 액체는, 산성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얼마나 강한 산성을 띠고 있는지는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시야가 열린다. 공간이 도해되고, 잡아뜯듯 공간을 당기자 주위가 일그러졌다.
물방울들이 왜곡된 포물선을 그리며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 칼은 그 틈을 놓치기 않았다.
서걱, 하고 깔끔한 절단음과 함께 살점 씨앗의 팔 하나가 떨어졌다. 살점 씨앗은 하늘을 향해 비통한 절규를 내질렀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목에, 은빛 실선이 틀어박힌다.
멋들어진 절단선이었다. 최적의 궤도로 그어진 그 검로로부터 곧 새빨간 핏물이 터져 나왔다.
괴물의 대가리가 데구르르 땅바닥을 굴렀다.
신화 속의 괴물이라더니, 생각보다 별 것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야 나는 이제 아카데미 3학년 중에서도 나름 상위권에 속하는 실력자였다.
기사들로 비교군을 좁히더라도 나는 뛰어난 편에 속했다. 아무리 신화시대의 군대가 꺼리던 괴물이라도 나와 일대일로 맞서 싸울 수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그 순간.
콰득, 하고 내 발목을 으스러져라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당황한 내 눈이 땅바닥을 더듬었다.
잘려나간 살점 씨앗의 팔이었다. 그것은 신체에서 분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동력을 받고 있었다.
다만 시야를 잃은 탓인지 손톱을 휘두르지는 못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독에 닿았으면 꼼짝없이 끝장이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내게 위기가 닥치지 않았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허우적거리며, 살점 씨앗의 몸뚱아리는 남은 팔 하나로 나를 공격하려 시도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검으로 발목을 쥔 살점 씨앗의 손목을 내리쳤다.
그러자 통증에 대한 반응으로 살점 씨앗의 손이 펴졌다. 나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면서, 두어 번의 검격을 날려 살점 씨앗의 남은 팔다리를 하나씩 날려버렸다.
결국 살점 씨앗은 다리 한 짝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균형조차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던 살점 씨앗은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그럼에도 바득바득 땅바닥을 기며 나를 죽이려는 그 모습에, 나는 선연한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두근거리는 감각을 느꼈다.
기묘한 고양감이었다. 자꾸만 나를 채우고, 비우는 그 강렬한 색채의 직감.
내 눈이 무심코 살점 씨앗의 머리를 향했다.
그것은 아직도 통통 뛰면서, 제 몸으로 복귀하려 애쓰고 있었다. 잘려나간 팔다리와 전혀 다른 양상의 움직임이었다.
저것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구나.
이를 깨달은 나는, 터벅터벅 걸어 단숨에 살점 씨앗의 머리 깊숙한 곳을 관통했다.
그러자 키에에엑 하고 찢어지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한참을 울부짖으며 부르르 떨던 살점 씨앗의 육체는, 그제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끝이었다. 살점 씨앗은 죽었다.
이제 떠나면 그만이었다.
슬슬 발걸음을 돌리려던 나는, 어째서인지 그 자리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예감이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머리를 웅웅 울렸다. 어떠한 본능 같은 감각이 나를 놓아주지를 않았다.
결국 나는 돌아섰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 무릎을 꿇었다.
땅바닥에는 살점 씨앗의 머리가 남아있었다. 칼날을 쑤셔 박은 관통상의 흔적이 여실했다.
핏물과 뇌수가 그 사이로 줄줄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살점 씨앗의 머리는 아직도 움직이고 있었다.
본격적인 움직임은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 어떠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호소하고 있는 듯했다.
“……! ……!”
혹덩어리에 틀어 막힌 목소리가 먹먹하게 울렸다.
손을 덜덜 떨면서, 나는 칼날에 오러를 일으켰다. 그리고 복부를 절개하는 외과 의사의 심정으로 머리의 살점들을 덜어냈다.
가슴이 고동친다. 암울한 기억들이 뒤섞이고 있었다. 웅성거리며 귓가를 울리는 소리들.
전부 단말마였다. 나는 그 음성의 정체를 알 수 없어서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기를 얼마쯤.
비로소 내 칼질이 멎었다. 혹덩어리 안쪽에 있던 것이,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얼굴이었다. 형형색색의 징그러운 핏줄로 뒤덮인 아이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주, 죽여…크, 키에에에엑! 주, 죽여주세요……!”
가끔씩 핏줄이 맥동할 때마다, 괴물의 소리를 내면서.
내 몸이 얼어붙었다.
아이의 얼굴을 본 내 뇌리가 새하얗게 질식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절정에 달했다.
툭, 하고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머릿속에서였다.
**
몇 분이 지나도 이안이 따라붙지 않았다.
걱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던 일행은, 결국 빠져나온 길을 되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그곳에는 절단돼서 널브러진 괴물의 신체가 보이고 있었다. 과연 이안답게, 그 짧은 시간 내에 신화 속의 괴물을 쓰러트린 것이다.
일행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들은 곧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무릎을 꿇고, 무언가를 내려다보는 이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질문을 던지기조차 꺼려질 정도였다. 그만큼이나 어둡고 묵직한 공기가 이안의 어깨를 찍어누르고 있었다.
불길했다. 일행은 서서히 걸음을 옮겨, 이안이 내려다보던 것을 바라보았다.
얼어붙은 육체들, 성녀나 셀린에 이르러서는 눈을 부릅뜨고 두 손으로 입을 막았을 정도였다.
그만큼이나 끔찍한 모습이었다. 얼굴만 남은 어린아이가, 살더미 사이에서 충혈된 눈으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광경은.
“주, 죽여 줘…….”
파각, 하고.
머리가 으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어린아이의 피눈물이 멎었다.
손도끼였다. 아이의 여린 두개골을 산산조각 낸 이안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뒤따라오는 살점 씨앗들을 맞상대해야 할 터였다. 이안과 가장 허물없는 사이인 셀린이 어쩔 수 없이 입을 열려던 그때.
“……이미 늦었어.”
묘하게 피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엄숙한 어조에, 셀린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며 한 발자국 물러서고 말았다.
그럼에도 이안은 일행을 등진 채, 눈길조차 보내지 않았다.
단지 나지막이 지시를 내렸을 뿐.
“전원 전투 준비, 열 마리쯤 다가온다.”
이를 신호로 기괴한 울음소리가 저 너머에서 들려왔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그 괴성에, 일행들은 흠칫 몸을 떨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전투를 준비했다.
이안은 손도끼를 다시 허리춤에 매달았다. 그리고 그 잇새로 악물어진 목소리가 흘러넘쳤다.
“……오늘 전부 죽일 거야, 이 개새끼들.”
찬란한 은빛 오러가 피어올랐고, 어둠 너머에서 살점 씨앗이 하나 몸을 날려 이안을 덮쳐들었다.
전투의 서막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