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22화 (122/649)

〈 122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43)

* * *

기억이 뒤죽박죽 뒤섞인다.

물감이 섞여들듯 혼탁한 색으로 물드는 뇌리, 호흡이 거칠어졌다. 고동치는 심장 소리가 귓가를 쟁쟁히 울렸다.

느닷없이, 낯선 풍경이 부상했다.

핏물로 젖은 초원은 그 자체만으로도 불길한 분위기를 풍겼다. 대지 위를 가득 덮은 시체마저 안온한 솜이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 위를 수많은 인파들이 딛고 서 있었다.

사내는 인파를 밀치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초조한 기색이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웅성거리는 소음이 잦아들었다.

기어이 인파를 헤치고 끝에 나아간 그는, 곧 침묵의 대열에 합류했다.

기적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수만의 군대조차 막아내지 못했던 마수들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오염을 털어낸 괴물들은 인간의 형상을 되찾은 채 평온한 얼굴로 죽음을 맞이했다.

군홧발로 짓밟힌 들풀들이 무성히 자라나 들판은 녹색이었다. 사내는 그제야 계절이 봄인 줄을 알았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었다. 나무에 기댄 채 쓰러진 여인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람이었다. 두 손을 감싸 쥐고, 아늑한 미소를 지은 채 쓰러진 그녀의 모습은 마치 성화의 한 폭을 떼어놓은 듯했다.

그래, 지독히도 아름다웠다. 언제나 그랬듯이.

사내는 한동안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들이마신 숨이 내뱉어질 기미조차 없었다. 그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망설이며 한 걸음.

천천히, 그리고 가까스로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비로소 여인의 앞에 선 그는 상반신을 기울였다. 여인의 코끝에 귀를 가져다대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침대 위에서 색색거리던 달콤한 숨결, 사랑을 속삭이던 목소리, 그 무엇도.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비틀거리면서, 사내는 물러섰다. 그리고 절망적인 눈빛으로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죽었다.

이까짓 게, 그 잘난 순명(??)의 끝이란 말인가?

왜 여인이 웃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 생명을 제물처럼 내던져서 얻어낸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멈출 수 없는 역사에 유예기간을 조금 더 남겨두었을 뿐.

따지고 싶었다.

어째서 그토록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냐고, 당신이 떠난 동부전선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그리고 왜 하필 나만을 남겨두고 떠나가야 했냐고.

수많은 언어들이 용광로처럼 들끓으며 뇌리를 새하얗게 불태웠다. 더듬거리면서, 달싹이는 입술이 당장이라도 힐난의 말을 내뱉을 듯했다.

하지만 끝내 그러지는 못했다.

그 대신, 사내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부관.”

사내의 뒤에 시립한 채 멍하니 시체를 살피고 있던 여인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네.”

“제도로 파발을 보내. 동부전선의 철군 작전은 성공했다고. 그리고…….”

타오르는 금빛 눈동자가 허공에 떠올랐다.

부관이라 불린 여인은 그 눈빛을 마주하자마자 흠칫, 몸을 굳히며 더욱 고개를 숙였다.

“……인류가 마스터 하나를 더 잃었다고.”

부관은 지체 없이 뒤돌아 내달렸다. 사내는 물끄러미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목숨을 건진 병사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곧 그들의 두 손이 모아졌다. 그렇게 천신을 찬미하는 가장 엄숙한 예배가 시작되었다.

수천수만에 이르는 군세가 한꺼번에 기도문을 읊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러나 오직 하나, 사내만큼은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는 무릎 꿇은 군세의 사이를 저벅저벅 걸어 헤쳤다. 시시각각 멸망이 다가오고 있었고, 그에게 기도를 하고 있을 틈새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생각했다. 악물어진 이를 으득으득 갈면서, 증오와 원독으로 일그러진 사고회로 속에서 끝없이 되뇌일 뿐.

전부, 죽여 버려야 해.

마수든, 마인이든, 암흑사제든, 심지어는 신화 속의 괴물이라도 상관없었다.

전부 다 죽여 버려야 한다.

전부 다.

**

암전했던 의식이 떠올랐다. 숨소리는 어느새 안정되어 있었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시간의 둔중한 흐름 한가운데, 내가 서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뇌리는 차가웠고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예민했다.

살점 씨앗 하나가 내게 덮쳐들고 있었다. 쩍 벌어진 징그러운 입 사이로 독성 액체가 뚝뚝 흘러내렸다.

거리는 이미 지척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이미 늦은 듯도 보였다.

아직 내 몸에는 어떠한 움직임의 전조조차 없었다. 느슨하게 풀어진 근육 사이로 긴장의 기색은 엿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멈춰 선 자세야말로, 모든 움직임의 씨앗임을.

정중동(?中?).

살점 씨앗의 손톱이 닿기 직전, 시간이 정지한다.

그 멈춘 시간 사이를 내 검만이 홀로 유영했다. 단숨에 검극이 좌하단으로 떨어졌다.

오래 전에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델핀 선배와 세리아는, 이 자세에서 검로를 그어 올렸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그 찰나.

키에에에에에엑!

비통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네 토막이 난 살점 씨앗이 땅바닥을 굴렀다. 핏물이 울컥울컥 쏟아져 내렸다. 어느덧 허공에는 세 줄기의 은빛 발톱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눈부신 속도였다. 동시에 그어진 3개의 검로가 모두 실초였다. 꿈틀거리며 발악하던 살점 씨앗은, 뒤늦게 머리가 반으로 갈라지며 절명했다.

유르디나 가문 비전 절기, 금사검(???).

그 정체를 알아본 세리아의 눈이 부릅떠졌으나, 그마저도 찰나에 불과했다.

나머지 살점 씨앗들이 펄쩍펄쩍 뛰며 동굴의 벽면을 타고 내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어떠한 원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사실은 몇 마리가 나를 스쳐지나갔고, 몇 마리는 내게 쇄도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등 뒤에서 고함과 함께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본격적인 난전의 시작이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후우, 하고 숨을 가다듬었다.

맹렬한 적의가 가슴을 불태우고 있었다. 본래라면 머리도 뜨거워져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가슴이 부글부글 끓을수록, 머리만큼은 차갑게 식어갔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마치 수없이 많은 사선을 넘은 노병이 빙의한 듯한 이 느낌.

그리고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은빛 궤적이 어둠을 갈랐다.

빛살처럼 쏘아진 일격이었다. 내 좌측에서 달려들고 있던 살점 씨앗 하나의 머리가 그대로 관통 당했다. 버둥거리던 살점 씨앗은, 끝끝내 제 손으로 내 검신을 쥐었다.

방해라도 할 생각인 듯했다. 이를 증명하듯, 곧바로 동굴 천장을 박차고 내 정면으로 뛰어드는 살점 씨앗이 한 마리, 우측에도 한 마리.

검을 두고 씨름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나는 검에 꿰뚫린 채 데롱데롱 매달린 살점 씨앗을 검이 꽂힌 채로 차 버리고, 손도끼를 뽑아들며 팔을 우측으로 내뻗었다.

살짝 비틀어진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살점 씨앗의 손톱, 그리고 곧 그 머리가 내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살점 씨앗의 골통이 터져 나갔다. 뇌수와 핏물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비릿한 냄새를 흩뿌렸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살점 씨앗의 옆머리에 틀어박힌 손도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부르르 떨며 저항하는 살점 씨앗의 두개골, 그러나 아무리 버텨봐야 그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은빛의 궤적이, 횡으로 연결된다.

반토막 난 살점 씨앗의 머리가 하늘을 날았다. 그와 함께 던져진 내 손도끼는 우측에서 달려들던 살점 씨앗의 이마에 틀어박혔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차라리 횡으로 벤 검로가 쭉 연장된 것처럼 느껴졌다. 단숨에 세 마리의 살점 씨앗이 목숨을 잃었다.

분노에 몸을 맡긴 거친 전투였다. 흥분으로 달아오른 시야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헐떡이는 숨결이 어느새 달큰한 향을 풍기고 있었다.

그 대가로, 내 손에는 더는 무장이 남아있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이제는 후방에서 덮쳐드는 살점 씨앗을 상대하기 위해, 나는 상반신을 뒤로 굽혔다.

그러자 내 위로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살점 씨앗.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대로 그를 놔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튕겨 오르듯 상반신을 일으키며 살점씨앗의 어깻죽지에 팔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 탄력을 이용해서, 전력을 다해 살점 씨앗을 땅바닥에 처박았다.

키에에에엑!

쿵, 하는 충격파와 함께 살점 씨앗이 고통에 찬 울부짖음을 토해냈다. 나는 살점 씨앗이 정신을 차라기도 전에, 괴물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서슴없는 일격, 날 것의 폭력을 행사하는 내 눈동자에는 옅은 희열마저 스치고 있었다.

콰직, 콱, 으드득.

주먹이 내리꽂힐 때마다 소름 돋는 소음이 울려 퍼진다.

처음에 틀어박힌 주먹은 코 부위를 함몰시켰고, 두 번째로 틀어박힌 주먹은 핏물을 터트렸으며, 마지막으로 틀어박힌 주먹은 비로소 두개골을 으깨고 뇌수를 줄줄 흐르게 했다.

그리고 절명, 괴물의 목숨을 거두는 데는 단 세 번의 주먹질로 충분했다.

그 대가는 가혹했다. 주먹질에 시간을 너무 쓴 탓인지, 어느새 내 등 뒤에 살점 씨앗 하나가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돌아서 자세를 정비하긴 늦었다. 나는 오른손을 슬쩍 치켜들었다.

그러자 탁, 하고 손에 잡히는 묵직한 무게감.

손도끼였다. 살점 씨앗 하나의 이마에 틀어박혀 있던 도끼를, 정중동의 묘리를 이용해서 불러온 것이다.

당연히 복잡한 계산이 수반되는 일이었다.

정중동의 묘리를 이용하더라도 그 궤적은 최초의 투척 때 정해진다. 따라서 후일 전투가 어떻게 흘러갈지 알고 있어야만, 이토록 정교한 손도끼의 회수가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해당이 없는 이야기였다.

단지 본능에 의존해서 던지고 휘두르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내 다음 행동도 마찬가지였다.

자리에 쓰러지듯 뒤를 돌아, 손도끼를 살점 씨앗의 목에 박아 넣었다. 핏물이 터져 나오며 내 얼굴을 흠뻑 적셨다.

목에 손도끼가 틀어박힌 살점 씨앗은 괴성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나는 팔에 힘을 주어 그대로 살점 씨앗을 땅바닥에 처박고, 그 위에 올라탔다.

그 다음은 간단했다. 죽을 때까지 손도끼를 휘두르면 그만이었다.

콰직, 콱, 콰드득.

손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으스러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살점 씨앗의 괴성도 함께였다.

핏물이, 뼛조각이, 뇌수가 튀어 오르며 온갖 색채로 시야를 물들였다.

숨이 가쁘다. 심장의 고동이 너무 거세 가슴이 뻐근할 지경이었다.

죽여야 한다.

일종의 강박관념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손도끼를 몇 번이고 내리쳤다.

살점 씨앗의 몸에 경련이 일고, 이내 미동조차 없어진 뒤, 더는 아무런 소리가 울려 퍼지지 않는데도 그랬다.

그저 도끼날이 살점을 파헤치는 소름 끼치는 소리만이 공허한 동굴 속을 울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이들만 없었다면.

이 괴물들만 없었다면, 살 수 있었을 텐데.

딱히 누구를 지칭할 필요는 없었다. 모두가 살 수 있었을 터였다.

그 모두가, 이 괴물들만 없었다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의가 뇌의 혈관 속을 마구잡이로 파고들었다. 나무뿌리가 지반에 뿌리내리듯, 증오와 원독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이 개새끼들이 진짜!!”

그렇게 외치며 손도끼를 높이 치켜든 내 손을, 누군가 잡아챘다.

내 사나운 눈길이 옆을 향했다. 그곳에는, 덜덜 떨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셀린이 서 있었다.

“그, 그만해… 오빠. 이미 다 끝났어.”

다 끝났다고?

화들짝 놀란 내 시선이 주위를 훑었다. 그 말대로였다.

열 마리를 조금 넘는 살점 씨앗의 시체들이 주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나같이 머리가 터져 나간 채였다. 그리고 그중 절반 이상은 내가 만든 시체였다.

그제야 정신이 되돌아왔다. 내 눈이 슬그머니 손도끼로 내려치던 살점 씨앗을 향했다.

이미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다진 고기조차도 아니었다. 으깨진 살점과 뇌수, 뼛조각들이 범벅되어 질은 스프처럼 흘러내렸다.

할 말이 없었다. 도대체 내가 왜 그랬지?

나는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면서,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뒤를 돌아보니 일행은 모두 공포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에서 엘시 선배와 델핀 선배의 상태가 제일 심각했다. 땅바닥에 엎드리지는 않았지만, 엘시 선배는 히끅이며 울음을 애써 참는 중이었다.

델핀 선배는 낯빛이 창백해져 있었다. 그대로 두면 구토라도 할 지경이었다.

동굴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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