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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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가 원장실에 도착했을 때, 길포드는 검을 꺼내둔 채였다.
새하얀 천 위에 올려둔 칼날이 서늘한 예기로 번뜩였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그 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무척 깊었다. 오래 전의 추억을 상기하는 듯, 슬픔과 회한이 범벅이 된 눈이었다.
용병 시절에 쓰던 검일 테지, 성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입을 열었다.
“……길포드 원장님.”
“아, 성녀님.”
성녀의 나지막한 부름에, 검을 내려다보던 길포드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늘 그렇듯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성녀는 물끄러미 길포드를 바라보았다.
영안에 잡히는 색은 맑았다. 최소한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성녀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믿지 않았다. 아무리 착해 보여도 내심 이기적이고 속물적이며 계산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스스로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영안에 비치는 색만큼은 어느 정도 믿을 만했다. 성녀의 영안은 신성력만큼이나 발달해 있었고, 상대의 대략적인 심성 정도는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러한 그녀가 볼 때 길포드는 굉장히 선량한 편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스스럼없이 단 둘이 독대하러 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길포드의 인성은 믿을 만했으므로.
성녀는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제 가슴 위로 성호를 그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자애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혹여 사정은 들으셨는지요?”
“……물론입니다.”
한숨 섞인 목소리로, 길포드는 그렇게 말했다. 그의 표정은 착잡해 보였다.
그럴 만도 하다고, 성녀는 생각했다. 오랜 시간 공들여 운영해 온 고아원이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폐쇄하게 될 줄은 몰랐겠지.
하지만 이대로 두다간 너무 위험했다. 길포드도, 고아원의 아이들도, 그리고 세상도.
신화 속의 괴물은 대륙에 풀어놓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성녀는 안타까움을 담아 길포드를 위로했다.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형제님. 천신께서는 이유 없는 시련을 내리시지 않습니다.”
“……이유 없는 시련이라.”
노인은 그 말을 듣고 쓴웃음을 머금었다. ‘천신’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생각이 많아지는 모양이었다.
그는 천으로 검을 쓱쓱 닦아냈다.
“성녀님, 이 늙은이의 인생 이야기를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성녀는 의아한 눈빛으로 길포드를 바라보았다. 일분일초가 급한 상황이었다. 그럴 만한 틈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를 모를 길포드가 아니었다. 그녀는 내심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안타깝지만, 원장님. 이제 바로 선택을 하셔야 할 시간…….”
“저도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자라났습니다.”
연분홍빛 눈동자가 물끄러미 길포드를 향했다. 그러든 말든,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애초에 성녀에게 선택권 따위는 없다는 듯.
“그래도 꽤 운이 좋은 편이었죠. 훌륭한 원장님을 만나, 어쩌다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원장님이 수소문을 해 검술까지 가르쳐 주셨거든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제 꿈은 고아원장이었습니다. 원장님처럼 멋진 사람이 돼서, 아이들을 돌봐주고 싶었죠.”
“……성공하셨군요.”
지금은 바쁘다고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으면서, 성녀는 애써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미지는 소중했으니까.
눈치 없게도 길포드는 계속해서 인생 이야기를 이어갔다. 광채를 되찾은 제 검을 바라보는 그 눈빛이 아련했다.
“그런데 인생이란 간단하지가 않더군요. 소드 익스퍼트에 올라, 용병치고는 성공한 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죠. 그런데 제가 지내고 있던 고아원은 이미 망한 뒤였습니다.”
“……어째서요?”
“경영난이었습니다. 결국 사채까지 빌려쓴 원장님은 사채업자들에게 살해당했고,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졌죠. 이 고아원은 그 터에 지은 겁니다.”
암울한 과거에 성녀는 입을 다물었다. 고아원이 망하는 일이야 이 대륙에서 수도 없이 벌어지는 일이었다.
세상에 고아는 많았고, 고아원은 부족했다. 양심적으로 경영하는 곳일수록 더 많은 예산을 필요로 했고 수입원은 적었다.
그래서 망하는 고아원은 대부분 훌륭한 원장을 두고 있는 곳이었다.
마치 길포드 고아원처럼.
“처음에는 야심차게 시작한 고아원이었지만, 저도 곧 알게 되었습니다. 고아들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얼마 가지 않아 굶기 시작하는 아이들이 속출했습니다. 인간이란 영약한 동물인지라, 배를 곪으니 다른 아이들을 폭행해서 식사를 빼앗는 일까지 발생했죠.”
그 말을 듣자마자 성녀의 뇌리에 스치는 말이 있었다.
이안의 친구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 고아원을 경영한 것이 신기할 지경이라고,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도 너무 맞지 않는다고 했다.
길포드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손질이 끝난 검을 제 허리춤의 칼집에 수납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천신께서는 왜 이러실까? 이 세상에는 이토록 약하고 고통 받는 자들이 많은데, 왜 선량할수록 손해를 보고 더 아파야 하는 걸까.”
“길포드 원장님, 도대체 무슨 소리를…….”
비명이 고아원을 가득 채운 것은 그때였다.
성녀는 당황한 눈빛으로 원장실 바깥으로 눈길을 보냈다. 슬쩍 들려오는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위기 상황이었다. 더는 옛날이야기를 듣고 있을 틈이 없었다.
성녀가 다급히 원장에게 외쳤다. 이미 그녀의 몸은 문 쪽으로 돌려진 뒤였다.
“이럴 틈이 없습니다! 원장님, 어서 탈출을……!”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그 한 마디에, 성녀의 몸이 우뚝 멎었다.
너무나 태연한 목소리였다. 의문을 담은 연분홍빛 눈동자가, 다시금 길포드를 향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성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깊고 깊었다. 그 속을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
슬퍼 보이기도 하고, 괴로워 보이기도 했다. 성녀는 본능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길포드 원장님!”
“진심입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성녀님. 이미 탈출은 불가능합니다.”
그 확신이 담긴 목소리에 성녀의 뇌리가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수많은 사고의 끈들이 가능성들을 추론했다.
길포드는 어째서 저토록 여유로운가, 그리고 이미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다 알고 있다는 태도로 성녀를 대할 수 있는가.
뻐끔거리면서, 성녀의 입이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사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비비고 쳐다봐도 영안에 잡히는 길포드의 영혼색은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더는 가능성을 부정할 수가 없어서, 성녀의 미간이 좁혀졌다.
“……설마.”
“제 불찰입니다.”
송구하다는 듯, 길포드의 시선이 내리깔렸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마인, 길포드가 바로 마인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성녀는 그녀답지 않게 욱해서 외치고 말았다.
“이, 이 악마! 다, 당신이… 당신이, 아이들을 납치해서 그 꼴로 만들었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처량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성녀는 그가 조금도 불쌍하지 않았다. 그녀의 뇌리에 남아있는, 그 혹덩어리에 갇혀 있던 어린아이의 피눈물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성녀의 눈이 주위를 훑었다.
탈출할 수단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상대는 소드 익스퍼트, 심지어 마인이었다.
보조에 특화된 그녀로서는 일대일로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아무리 성국의 비전 유술이 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성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길포드는 한숨과 함께 변명을 이어갈 뿐이었다.
“이 고아원이 사라지면 수백 명에 달하는 아이들은 더는 갈 곳이 없어집니다. 수백 번, 수천 번은 기도했죠! 그래도 그 잘난 천신께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때 그들이 찾아왔습니다. 오래 전의 인연이었죠.”
“……암흑교단!”
성녀는 으득으득 이를 갈면서, 그렇게 씹어뱉듯이 말했다. 노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한 달에 한 명, 그게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면 매달 수백 골드에 달하는 자금을 지원해 주겠다더군요.”
“그래서 팔아넘겼습니까? 그 아이들이 어떤 고통을 받을지 잘 알면서!”
“그렇다면 그때 천신께서는 어디에 계셨습니까!”
목소리를 높이던 성녀는, 돌아오는 반박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길포드는 전에 없이 흥분한 모습이었다. 그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아이들을 굶겨 죽이라고요? 이 험한 세상에서 고아들이 제대로 자라날 확률은 백에 일도 안 됩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요, 국가도 신전도 심지어는 천신께서도! 얼마나 많이 기도했는데, 천신께서는 정녕 귀머거리란 말입니까?”
그 절절한 분노를 마주하는 성녀의 연분홍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말을 신학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논리쯤은 얼마든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현실의 무게 앞에, 신학적 논쟁이란 얼마나 공허한가.
잠시 머뭇거리던 성녀는,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늘 외던 말을 읊는 수밖에 없었다.
“천신께서는 말을 아끼실 뿐입니다. 본래 인간의 자유의지란…….”
“그렇다면 귀머거리일 뿐만 아니라, 벙어리이기까지 하군요.”
노골적인 신성모독에 성녀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러나 길포드는 그녀가 분노하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다만 간절한 목소리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성녀님, 제발. 저는 아무도 더 해치고 싶지 않습니다.”
“이미 수도 없이 해치지 않았나요?”
“그렇게 해서 수백 명을 살렸지요. 성녀님이라고 다릅니까?”
울컥한 성녀가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나 다시금 고개를 치켜든 길포드의 차가운 눈빛에, 그녀는 어째서인지 말문이 막혀 멈칫했다.
길포드는 말했다.
“성녀님도 이 고아원의 아이들을 버리고 가실 생각 아닙니까. 그것이 작은 희생이라서! 제게는 그 작은 희생이 한 달에 한 번씩 납치하는 아이 하나였을 뿐입니다… 고르고 골랐죠, 어차피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이들!”
“그런다고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대안 없는 설교만큼 공허한 것이 있습니까?”
거무죽죽한 목소리였다. 만약 그 말에 생명이 있다면, 이미 목이 졸려 질식사를 했을지도 몰랐다. 그러한 말을 짜내는 길포드의 얼굴조차 퀭하니 움푹 패여 있었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버리지 않았습니까? 성녀님도 아시잖아요… 고아 출신이니까!”
“그렇다고 우리까지 아이들을 버리라고요?”
“아이 하나를 버리면 아이 수백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길포드는 말없이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 제 손목을 주욱, 그었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며 탁자 위에 모여들었다. 핏방울들이 제멋대로 궤적을 그리며 도형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법진이었다. 이를 본 성녀의 눈동자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것이 바로 현실입니다. 경전 속에는 나와 있지 않는, 저와 제 아이들이 처해 있는 현실 말입니다. 그러니, 부디 한 번만 모른 척 해주십시오.”
“도대체, 이건 뭐죠?”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감지한 성녀의 질문에, 길포드는 지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암흑교단에서 사용하는 계약 마법입니다. 서로의 목숨을 걸고 맺는 계약이죠. 거짓말이나 편법 따위는 통하지 않습니다.”
음산한 핏빛을 발하는 마법진을 앞에 두고, 길포드는 그렇게 말했다.
성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길포드는 눈앞에 있었고, 그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어떻게든 계약을 맺게 하겠다는 듯한 의사 표명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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