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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25화 (125/649)

〈 125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46)

* * *

“암흑교단에서 사용하는 계약 마법입니다. 서로의 목숨을 걸고 맺는 계약이죠. 거짓말이나 편법 따위는 통하지 않습니다.”

음산한 핏빛을 발하는 마법진을 앞에 두고, 길포드는 그렇게 말했다.

성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길포드는 눈앞에 있었고, 그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어떻게든 계약을 맺게 하겠다는 듯한 의사 표명이었다.

위기였다. 이를 깨달은 성녀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일단 그녀는 거부 의사를 밝혀 보기로 했다.

“……제가 이딴 걸 맺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길포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단숨에 성녀에게 반문했다.

“아니면 어쩌시겠습니까?”

길포드의 말은 숫제 협박에 가까워져 있었다. 다만 그 눈동자만큼은 슬퍼 보였다.

그가 성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바깥에 포진한 수백 명의 마수와, 저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제게는 살점 씨앗의 제어권도 있습니다. 그 괴물들이 동굴 안에 얌전히 있는 것도 제 덕이죠.”

성녀의 머릿속에서 주판알이 튕겨지기 시작했다. 수백에 이르는 마수와, 전력 불명의 마인, 그리고 신화시대의 괴물들까지.

만만한 전력은 아니었다. 아니, 기사단의 수준으로도 버거웠다.

최소한 군대가 와야 감당이 가능한 전력이었다. 여덟 명, 그것도 전력에 큰 의미가 없는 이론 마법사를 제외하면 일곱 명에 불과한 일행이 상대할 수준은 아니었다.

설득당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분해서, 성녀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길포드를 조롱했다.

“그 괴물들이 숫자를 늘려가는 것도 말이죠.”

그러나 으득으득 이를 갈며 내뱉어진 성녀의 말에도, 길포드는 한숨을 푹 내쉴 뿐이었다.

“끝없는 탁상공론은 그만합시다. 맞습니다. 저는 죄인이고, 지옥에 가야겠죠. 그 점에 대해서는 한 점의 불만도 없습니다…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누구 하나가 지옥에 가야 한다면, 기꺼이 그곳에 갈 용의가 있으니까요.”

“누가 들으면 대단한 희생이라도 하는 줄 알겠어요? 아이들을 괴물의 소재로 팔아치우는 주제에. 선량한 척 꾸미지 마세요, 역겨우니까.”

성녀의 힐난에도 이제 길포드의 안색에는 변화가 없었다. 어차피 그러한 비난쯤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는 태도였다.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길포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가 최후통첩이라는 듯 제안했다.

“여덟 분 모두 비밀 엄수를 조건으로 하는 계약을 맺으시죠. 그러면 무사히 보내드리겠습니다. 그 외에 제가 요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성녀의 입이 잠시 다물어졌다.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하던 성녀는, 곧 미심쩍다는 눈빛으로 길포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죠?”

“믿지 않는다고 어찌할 도리도 없지 않습니까?”

그 말대로였다. 성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길포드의 말이 떠올렸다. ‘현실’이라, 그가 마주한 벽이란 그토록 높고 가파른 것이었을 테지. 성녀도 내심으로는 그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아이들을 두고 도망치려는 그녀나, 수백 명을 위해 한 명을 희생하는 길포드나 본질적으로 효율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대안이 없는 설교만큼 공허한 것이 없다는 그 지적이 뼈아팠다.

지금으로선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길포드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어 보였다.

한참을 망설이던 성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좋아요.”

영안을 믿고 홀로 길포드를 찾아온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문득 어느 사내의 생각이 났다. 금빛 눈동자를 가진, 언제나 성녀의 마음을 툭툭 긁는 사내.

‘그 눈, 너무 믿다간 언젠가 큰 코 다칠 겁니다. 사람 보는 눈은 몇 번을 의심해도 모자라지 않거든요.’

그 조언대로였다. 성녀는 느닷없이 그 사내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폭력적이고, 잔혹하면서, 성녀를 괴롭힌 나쁜 놈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솔직하고 우직한 사내였다.

그는 평민이든 고아든 평등하게 대했다. 그 점이 못내 마음에 들었다. 고아 출신이고, 그동안 고아들을 불쌍히 여긴다면서 뒤로는 무시나 하던 인간들을 봐 왔던 성녀였다.

그러나 그만큼은 예외였다. 선의도 악의도 숨김이 없었다. 성녀나, 길포드 같은 인간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이를 깨달은 그녀의 입가에 허망한 웃음이 머금어졌다.

지금껏 쓰레기라고 이안을 매도해 왔는데, 정작 거울쌍 같은 인간을 마주하고 보니 자신은 그런 말을 할 자격조차 없어 보였다.

서서히 걸어, 성녀는 피로 그려진 마법진 앞에 섰다. 길포드는 살짝 물러서 제 옆자리를 넘겨주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명이 이어졌다.

“중앙에 피 한 방울만 떨어트리면 됩니다.”

하아, 하고 성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불만이 역력한 낯빛으로 손을 들었다. 이제 피 한 방울을 내서 마법진 중앙에 떨구면 그만이라는 듯.

그 찰나의 일이었다.

탁, 하고 성녀의 손이 길포드의 어깻죽지를 밀어 올렸다. 당황한 길포드가 뒷걸음질을 하는 사이, 성녀의 몸이 그 품을 파고들었다.

성국의 기술 교본에 수록돼도 좋을 만큼 훌륭한 기습이었다.

두 팔로 길포드의 팔을 붙든 성녀가, 그대로 온힘을 다해 그의 몸을 땅바닥으로 내리꽂으려 들었다.

성국 비전 유술, 달 뒤집기.

제대로 직격하면 한동안은 일어설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기술이었다. 성녀는 그동안 갈고 닦은 연기 실력이 빛을 발했음에 감사했다.

그 덕에 기습에 성공할 수 있었다. 계약을 맺을 때까지 주고받았던 대화 자체가 하나의 연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성녀의 감사는 오래 가지 못했다.

길포드의 몸이, 도저히 떠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낑낑거리며 길포드를 업어 메치려던 성녀의 눈동자가 멍청해졌다.

달 뒤집기의 무서움은, 아무리 근력이 강한 상대라도 버틸 수 없다는 점에 있었다.

아무리 근력이 강해봐야 힘으로 땅바닥에 붙어있을 수는 없었다. 이에 관여할 수 있는 요소는 오직 질량뿐이었다.

그런데 꿈쩍도 하지 않는다. 무언가 이상했다.

성녀의 얼떨떨한 눈빛이 등 뒤를 향하던 그 순간.

콱, 하고 성녀의 손목을 우악스럽게 노인의 손이 우겨 잡았다. 그리고 훅 몸을 돌려 강제로 그 손을 서서히 마법진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성녀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꺄, 꺄아아아악! 아, 아팟! 그, 그만해!”

“……죄송합니다, 용서하지 마시죠.”

그러나 길포드는 한 마디의 사죄만을 남기고, 제 칼을 꺼내들었다. 그 우악스러운 완력에 성녀는 도무지 저항을 할 수가 없었다.

성녀의 눈동자가 공포로 물들었다.

말이 계약 마법이지, 저 안에 어떤 내용이 새겨져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평생을 암흑교단의 노예로 살아가야 할지도 몰랐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컸다. 암흑교단이 제대로 된 마법을 만들어 두었을 리는 없었을 테니까.

공포로 물든 성녀의 뇌리에 수많은 사람들의 떠올랐다 사라졌다. 지금 당장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 원래라면 유렌을 먼저 떠올렸을 터였다.

믿음직스러운 그녀의 호위무사.

그런데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느닷없이 어느 사내의 모습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콱하고 박혀들었다.

어쩌면 유렌도 그녀와 비슷한 종류의 인간이라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동병상련을 나눌 수는 있어도, 그 이상의 동경이나 친애의 감정은 없었다.

차라리 남매애에 가깝다면 몰라.

그러나 그 사내만큼은 달랐으니까. 그는 꾸미지도 않고 시건방진데다 사사건건 말참견이 심하지만 단 하나.

거짓말만큼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믿을 수 있었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처음으로 성녀는 누군가를 믿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성녀는 무심코 소리치고 말았다.

“도, 도와줘……! 도와주세요, 이…….”

안, 이라고 이제 말을 끝맺어야 할 텐데.

성녀의 눈이 부릅떠졌다. 귓전을 긁어대는 파공성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길포드와 성녀의 시선이 동시에 원장실의 입구 쪽을 향했다.

그곳에서, 날아들고 있었다. 손도끼 하나가 길포드의 머리를 노리고.

길포드는 놀라운 순발력을 발휘해서 고개를 옆으로 틀어버렸다. 아슬아슬하게 손도끼가 스치고 지나갈 각도, 끝까지 성녀의 손을 놓지 않는 근성이 엿보였다.

어떻게든 성녀를 계약 마법으로 묶어두면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최소한 성녀의 협력은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계약 조건은 ‘여덟 명 모두가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 것’이었고, 계약을 맺는 순간 성녀 혼자 비밀을 엄수한다고 계약이 지켜지지는 않았다.

즉 남은 일행의 입 관리를 해야 할 의무가 성녀에게 부과되는 셈이었다. 길포드는 바로 이 점을 노리고 성녀를 먼저 계약시킬 생각이었다.

조금 더 시간을 들일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이제 불가능했다.

결국 길포드의 정체가 발각된 모양이었다.

판단을 끝마친 길포드는, 억지로 성녀의 손아귀를 비틀었다. 그리고 손톱에 옅은 오러를 덧씌우는 기예를 선보였다.

숙달된 경지의 검사만이 보여줄 수 있는 기술이었다. 그리고 그 오러가 성녀의 손가락을 찌르려고 들었던 그때.

콱, 하고.

손도끼가 성녀의 손목을 틀어쥔 길포드의 손목에 직격했다.

핏물이 터져 나오고, 맹렬한 통증이 신경 세포를 타고 길포드의 뇌리를 새하얗게 불태웠다. 그때까지도 길포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의 머리를 향하는 듯하던 손도끼가, 폭포수처럼 직각으로 꺾이더니 그의 손목에 틀어박혔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궤적이었다. 아무리 실력 있는 검사인 길포드라도 이 변수를 고려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크아아아악!”

예상에 없던 갑작스러운 통증에, 길포드는 무심코 성녀를 놓아준 채 제 손목을 붙들어야 했다. 뒤늦은 비명이 원장실에 가득 울려 퍼졌다.

성녀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몸을 빼냈다. 길포드는 뒤늦게 성녀를 잡으려 들었지만, 그의 손목에 틀어박혔던 손도끼가 제멋대로 움직이며 훅 하고 누군가의 손으로 되돌아갔다.

손도끼가 빠져 나가며 다시 핏물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길포드는 이를 악문 채 신음을 참았다.

그의 눈동자가 원장실의 입구를 향했다. 그곳에서, 누군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금빛 눈동자.

모를 리가 없다. 지난 며칠간 고아원을 위해 헌신해 주었던 사람이니까.

그의 모습을 확인한 길포드의 눈이 다시 죄책감으로 물들었다.

차마 사내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길포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끄러움에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안 도련님.”

“길포드 씨.”

이안은 단지 그렇게 운을 뗐다. 성녀가 제 등 뒤로 숨는 것까지 확인한 그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분노인지, 불신인지, 연민인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갖 감정들이 뒤섞인 미소였다.

그는 그처럼 슬픈 미소를 띠우며, 씹어뱉듯한 마디를 내뱉었다.

“우리 신성력 주머니한테 손 떼요.”

이야기는 이제 종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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