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26화 (126/649)

〈 126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47)

* * *

검을 든 길포드 씨의 기세는 흉흉했다.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는 흉기나 다름없었다.

기습의 이점을 살려 성녀를 구출하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그 뒤로는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다. 길포드 씨를 노려보는 내 이마에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빈틈이 없었다. 손목을 도끼에 찍힌 채 당황하고 있는 모습처럼 보이는데, 그 자세와 호흡이 정돈되는 속도가 차원이 달랐다.

지금껏 상대해 왔던 아카데미 재학생들이 애송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것이 바로 경험의 힘이었다.

실력만으로 따지면 아카데미 재학생들의 수준이 월등히 높지만, 굳이 ‘재학생’이라는 말까지 붙여가며 구분해 가는 까닭이 있었다.

아직 덜 여문 곡식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경험이 부족하면 실전의 온갖 변수에 대응할 수 없다. 굳이 4학년 내내 실습을 돌려가며 실전 경험을 쌓게 하는 것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했다.

지금껏 상대해 본 적 중에서 그나마 실전 경험이 많았던 사람은, 델핀 선배나 엘시 선배 정도였다. 그러나 두 선배조차도 수십 년에 이르는 경험을 쌓은 노검사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길포드 씨는 우울한 낯빛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애원했다.

“이안 도련님, 한 번만 모른 척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 고아원을 떠나면 저 아이들은 갈 곳이 없습니다. 거리의 부랑자가 되거나, 악질적인 고아원장에게 착취당하다 죽겠죠.”

“그렇군요.”

사실 나는 고아들의 실상에 대해 잘 몰랐다. 지금껏 관심을 가질 기회가 없다는 설명이 올바를지도 몰랐다.

그동안 내가 고아들을 향해 품은 감상은 연민 정도가 고작이었다. 게으르다면 게으른 인식이었다. 약자들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은 짧은 생각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아마 길포드 씨의 말은 사실이리라.

이미 대륙의 고아원들은 포화 상태였다. 수백 명에 이르는 고아들을 거두어 줄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있다고 해도 멀쩡한 곳일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수백 명 중 태반이 죽거나 인생을 착취당하겠지, 길포드 씨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용서할 수는 없었다.

“……남은 대화는 칼질로 합시다.”

손도끼를 허리춤에 매달면서, 나는 검을 뽑아들었다.

검극이 길포드 씨를 향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피로 젖은 손목을 어루만지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단순한 논리였다.

수백 명의 고아들이 아무리 소중해도 수천수만의 목숨을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대륙 전체가 위기에 빠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길포드 씨야 고아원 아이들이 제일 소중하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길포드 씨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수많은 고아들을 양산할 것이다.

적어도 내가 본 미래에 따르면 그랬다. 그 불운한 결말을 막기 위해, 나는 칼을 들었다.

노년의 검사와 내 눈이 마주쳤다. 길포드 씨의 손목은 어느새 아물어 있었다. 마인들은 아무래도 비정상적인 회복 능력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비장미를 풍기며 검극을 겨누고 있는데, 내 등 뒤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 ‘우리 신성력 주머니’라니… 미, 미, 미쳤어요?!”

성녀였다. 나는 몰입이 확 깨는 느낌이라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요즘 신성력 주머니는 말도 합니까?”

내 핀잔에 성녀의 연분홍빛 눈동자가 대번에 서늘해졌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꼴이, 아무래도 나를 꼬집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그마한 빈틈이 생과 사를 가르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럴 수는 없을 터였다.

나는 성녀의 분한 눈빛을 받으며 후, 하고 옅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속삭였다.

“얼른 도망치기나 해요.”

“……혼자 감당은 할 수 있고?”

“물론 신성력은 쓰고 나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성녀는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훈련 때도 길포드 씨한테 일방적으로 밀리던 나였다. 그때와 달리 다양한 기술들을 활용할 수 있다고는 해도, 기본기 자체가 딸리면 장기전으로 갈수록 손해였다.

그렇다면 다른 요소로 보완하는 수밖에.

성녀가 기도문을 읊었고, 곧 따스한 빛줄기가 내 몸에 스며들었다.

믿음의 방패, 근력과 순발력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치명상에 이르는 공격도 한두 번은 막아주는 강화 마법이었다.

신성 마법의 종합판 같은 고위 마법이었는데, 짧은 몇 마디의 기도만으로 시전하다니 과연 성녀는 성녀였다.

“……그럼, 조심해요.”

성녀는 그렇게 달콤한 속삭임을 남기고 떠나갔다. 그때까지도 길포드 씨는 침착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나지막이 물었다.

“준비는 끝나셨습니까?”

“그나마 붙어볼 만은 하겠네요.”

그렇군요, 하고 길포드 씨가 고개를 주억거리던 찰나.

내 손이 벼락같이 손도끼를 투척했다. 허리춤에서 뽑혀 나오고 쏘아질 때까지, 그 고속의 연계동작은 순식간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였다.

아주 짧은 시간에 손도끼는 길포드 씨의 지척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고작해야 이 정도 기습에 당할 그가 아니었다.

벼락과 빛살이 교차한다.

푸르스름한 오러가 손도끼를 강타했다. 곧바로 궤도를 이탈해 허공을 빙글빙글 도는 도끼, 그 사이에 나는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원장실에는 온갖 가구와 집기들이 존재했다. 그걸 하나하나 회피하느니 차라리 도약을 해서 한꺼번에 뛰어넘는 편이 나았다.

물론 길포드 씨도 그쯤은 예상했을 터였다. 기다렸다는 듯 검을 내지르려고 했던 그였지만, 그보다 먼저 처리해야 할 문제가 남아있었다.

허공을 핑그르르 돌고 있던 손도끼가 다시 수직으로 내리찍혔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궤적에 길포드 씨는 결국 한 번 더 검을 휘둘러야 했다.

챙, 하는 처량한 소리와 함께 손도끼가 벽면에 처박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내가 탁자 위로 올라선 뒤였다.

온힘을 다한 내려베기가 길포드 씨의 검면에 직격했다.

쿠웅, 묵직한 충격음이 원장실을 부르르 진동시켰다. 마력으로 강화된 신체에 신성력까지 더해진 상황이었다.

먼지바람마저 일으키는 일격에 길포드 씨는 다소 놀란 듯했다. 그의 팔이 부르르 떨렸다.

신체 능력 자체는 이제 내가 앞선다. 그러한 확신이 섰다. 성녀가 걸어준 강화 마법이란 그토록 강력했다.

“……도끼를 다루는 솜씨가 귀신같군요.”

“검 다루는 솜씨는요?”

날붙이와 날붙이를 마주한 채로, 나와 길포드 씨는 애써 농을 나눴다.

그러나 우리 둘의 팔은 바르르 떨리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온힘을 다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나마 내가 탁자 위에 있으므로, 체중을 실을 수 있어 조금 더 유리했다.

내 질문에 길포드 씨는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답했다.

“그건, 조금 지켜봐야겠군요.”

그 다음 순간, 길포드 씨의 발차기가 내가 딛고 선 탁자를 강타했다.

우지끈,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동시에 탁자가 산산조각 나며 목재 파편이 비산했다.

직전에 뛰어오르며 나는 충격을 최소화하려 시도했지만, 허공에 뜬 채로는 자유로운 운신이 불가능했다.

고작해야 체중을 실어 비스듬히 내리 찌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수를 예상하지 못할 길포드 씨가 아니었다.

그가 슬쩍 옆으로 물러나더니, 검으로 내 측면을 후려쳤다.

캉!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불꽃이 튀었다. 살점과 날붙이가 마주치는 소리는 아니었다. 비로소 성녀가 걸어둔 강화 마법의 진가가 발휘된 것이다.

믿음의 방패, 치명상에 이르는 일격을 한두 번쯤 막아주는 방어막.

그럼에도 길포드 씨가 가한 충격을 온전히 상쇄할 수는 없었다.

컥, 하고 갈라진 숨을 들이킨 순간 내 몸이 포탄처럼 벽면에 처박혔다.

일순 원장실에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천장에서 부스스 파편이 떨어져 내렸다.

호흡이, 정돈되지가 않는다.

폐부가 갑갑했다. 일격을 허용한 근육이 절로 수축하며 파업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대로 있을 틈은 없었다.

노련한 검사가 이 틈을 놓칠 리가 없었다. 나는 곧바로 검을 수직으로 올려베며, 쏘아지듯 몸을 일으켰다.

날카로운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불완전한 자세였지만 신체 능력은 내가 우위였기에 맞수를 이룰 수 있었다. 그렇게 두세 번의 검격이 이어졌다.

길포드 씨는 차츰차츰 뒤로 물러섰다. 구석에 몰려 있던 나는 어느덧 햇빛이 쏟아져 내리는, 창문의 바로 옆.

원장실의 모서리 중간쯤에 위치하게 되었다.

나는 이쯤에서 승부수를 걸기로 했다.

시야가 공간을 도해한다. 줄기줄기 얽힌 공간의 실선들이 인식되자마자, 나는 그 선을 비틀었다.

길포드 씨의 검로가 기묘한 굴곡을 이루며 나를 스쳐지나갔다. 그의 눈동자가 당황한 듯 크게 뜨였다. 찰나와 찰나를 가르는 그 짧은 틈새.

그 사이를, 전력으로 후려치는 종베기.

쾅, 하고 폭음이 터져 나왔다. 길포드 씨는 가까스로 측면을 사수했으나, 비틀거리며 창문까지 밀려나는 것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이대로 밀어붙일까, 내 눈이 벽면으로 밀쳐진 길포드 씨를 향한 그때.

나는 얌전히 후속타를 포기하고, 몸을 날려 구석에 떨어진 손도끼를 주웠다. 길포드 씨가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만약 그때 후속타를 가하려 했다간, 어떤 수작을 당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손도끼를 내던졌다.

일직선을 그리며 쏘아진 손도끼는, 어김없이 길포드 씨의 검에 얻어맞고 허공을 날았다. 그러나 노인이 비틀거리며 쳐낸 손도끼는 곧바로 내 손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어지는 투척.

던지고, 쳐내고, 던지고.

두어 번을 반복하는 동안 길포드 씨는 비틀거리는 자세를 정돈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 그와 내 거리가 가까워졌을 무렵 내 손도끼는 또 하나의 궤적을 그렸다.

내 손으로 돌아오는 대신, 손도끼가 길포드 씨를 다시 한 번 습격했다.

“크윽!”

길포드 씨는 손도끼의 궤적만큼은 도무지 예상할 수 없었는지, 신음을 흘리며 가까스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대가로 자세가 무너지고 말았다.

내 검이 연달아 그의 측면을 후려친 것은 그때였다.

쾅, 쾅, 쾅! 폭음과 같은 충격파가 울려 퍼지며 길포드 씨를 밀쳐냈다. 마치 나무를 패는 나무꾼이라도 되는 듯, 나는 두 손에 힘을 준 채 길포드 씨의 검면을 마구잡이로 후려팼다.

예전에 마력이 부족했을 때, 동일한 구도로 세리아한테 당해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잘 알고 있었다.

온전히 힘으로만 때려 박는 이 연격이, 얼마나 견뎌내기가 힘든지.

비틀거리고, 무너지며, 이내 벽면에 처박혀서 균열을 일으키더니, 종래에는 창문이 깨져나가며 길포드 씨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바깥 공터였다. 나는 땅바닥에 떨어진 손도끼를 주워 창문 밖으로 던지고, 곧바로 틀을 타넘어 길포드 씨를 쫓았다.

그러나 그 원장실 밖의 공터에서 길포드 씨를 마주한 순간.

나는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공터의 중앙까지 비틀거리며 걸어간 길포드 씨의 목덜미에는, 손도끼가 박혀 있었다.

즉사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 강인한 육체는 조금도 쓰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침묵하면서, 나는 손을 들었다.

길포드 씨의 목덜미에 처박혀 있던 손도끼가 내 손으로 되돌아왔다. 이제는 정중동의 묘리에도 많이 익숙해진 뒤였다.

노검사는 아무 말도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태양이 눈부실 텐데도 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그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대수해에서 며칠인지도 모를 시간을 굶고, 쓰러져 눈을 감았을 때가 있었죠.”

“예전에 들려주신 적 있습니다.”

후후, 길포드 씨는 힘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눈이 땅바닥을 훑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먼 과거를 회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안 도련님, 그거 아십니까? 그들은 인간이 가장 나약하고 초라해질 때 찾아옵니다.”

무슨 소리냐고, 내가 묻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고함 소리와 함께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귓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전투가 시작되었다는 뜻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등 뒤를 바라보았다.

적들은 물경 수백에 달하는 마수들, 아무리 손이 많아도 모자랐다. 어서 복귀해야 했다.

내 이가 절로 악물어졌다. 나는 지금까지와 달리, 선연한 적의를 담아 길포드 씨를 노려보았다.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마인의 방식대로 했을 뿐입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지금 전선이 형성된 이상 내게 지원군이 올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그러지 않아도 레토에게 길포드 씨의 정체를 비밀로 하라고 했던 나였다.

성녀가 가서 유렌에게 정보를 공유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마수가 몰려든다면 내게 손을 빌려줄 여유가 있을 확률은 높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없는 상황에서 그들이 오래 버틸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델핀 선배와 엘시 선배가 있지만, 나 또한 실전에 한정하면 대체할 수 없는 전력에 속했다.

어서 돌아가야 했다. 그러한 생각을 하며 길포드 씨와 내 눈이 마주친 그때.

일순 세상이 어둑해지는 착시가 일었다.

밀도 높은 마기(??)였다. 구름처럼 일어난 그 마력의 결정체가 현실을 왜곡하며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으드득,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

길포드 씨의 눈동자가 푸르스름하게 타올랐다.

“대수해에 쓰러진, 크으… 그날 밤. 저는 흡혈귀를 마주쳤습니다.”

우득, 까드득, 아드득.

뼈와 관절이 뒤틀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길포드 씨는 신음을 토해내며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그럴 때마다 그의 몸집이 서서히 거대해져 갔다.

낡은 옷이 찢겨 나간다. 근육이 부풀고, 암갈색의 털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때… 흐으, 그때 계약을 맺었죠. 그 대가로, 크으… 얻은 힘이 이것입니다.”

“……무엇을 바쳤죠?”

나는 아직 그가 괴물로 화하기 전에, 희미한 두려움을 담아 그렇게 물었다.

마인이 되는 계약은 간단치가 않았다. 인외의 힘을 얻을 수 있지만, 그 대가로 무언가를 바쳐야만 했다.

흐흐, 하고 길포드 씨의 입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인간성.”

나는 초조한 눈빛으로 등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지금 길포드 씨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어 보였다.

결국 나는 다시 손도끼를 허리춤에 차고, 검극을 길포드 씨에게로 향했다.

“동료의 시체들을 가져다주더군요. 이것으로 배고픔을 해결하라고… 그대로 했습니다. 그러니 어찌나 상쾌하던지요.”

훅, 하고 급작스레 길포드 씨의 팔이 늘어났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팔.

이미 그의 검은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이제는 필요 없었으니까.

이제 길포드 씨는 없었다. 한 마리의 거대한 마수만이, 푸르게 타는 동공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 복부를 관통했던 우두머리 마수였다.

“동료분들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도련님. 저만 쓰러트린다면 모두 도망칠 테니까요.”

“……그 말, 동료들한테 전하고 오면 안 될까요?”

“그럴 수는 없죠.”

그리고 마수는 팔을 들었다. 그곳에서 길쭉한 손톱이 뻗어 나왔다.

마수는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원숭이 마수들을 상대하며 몇 번이고 보았던 웃음이었다.

“정정당당하게, 일대일입니다.”

태양 아래, 마인이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냈다.

목덜미의 상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재생 능력에 나는 불길한 직감을 느끼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아무래도 좆된 것 같은데.

내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레토에게 괜히 허세를 부렸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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