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48)
* * *
마인에 대해서는 온갖 뜬소문이 존재했다.
사실 그 존재마저 의심하는 사람도 드물지는 않았다. 신마대전이 끝난 지는 벌써 수천 년이 넘었고, 암흑교단의 교세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귀족쯤 되면 알고 있었다. 그들이 마냥 전설 속의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을.
그 자세한 전력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혹자는 일개 기사단을 홀로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도 했고, 혹자는 군대가 나서야 쓰러트릴 수 있다고 하기도 했다.
다만 어느 쪽이든 공통된 의견은 하나였다.
최소한 혼자서 상대할 만한 적은 아니라는 것.
소중한 무언가를 바치고 그 대가로 악신 오메로스로부터 힘을 내려 받은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델피렘의 지상 침공을 이끄는 첨병이자, 마수들의 지배자들이었다.
당연히 그 위치에 준하는 힘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사실을 누구보다 절절이 실감하고 있는 중이었다.
핏물이, 허공에 실선을 긋는다.
아주 잠깐 눈을 돌렸을 뿐이었다.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휘둘러진 손톱이 내 뺨에 기나긴 자상을 남겼다.
조금만 늦었다면 핏물이 아니라 내 머리가 터져 나갔을 터였다.
그러나 얌전히 상대의 실력을 재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또 다시 고속으로 휘둘러지는 손톱이 머리를 노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답이 없었다.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나는 차츰차츰 밀려나갈 뿐이었다.
내 검은 하나인데, 상대의 손은 두 개였다. 그것이 본질적인 속도의 격차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심지어 마수의 팔은 길었고, 손톱도 길었다. 리치 차이가 절대적이었다.
숨결은 이미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져 있었다. 내 몸 곳곳에는 상흔이 새겨져 있었다.
이미 한계에 가까웠다.
결국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몸을 내던지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씨발!”
차라리 비명에 가까운 고함이었다. 내 몸이 땅바닥을 구르자 허공에 은빛 실선이 죽죽 그어졌다. 그곳에는 푸르스름한 빛의 잔향이 머물러 있었다.
오러였다. 그날 밤 보았던 빛무리는 착각이 아니었다.
길포드 씨쯤 되는 실력자니까, 손톱에도 오러를 맺을 수 있었을 테지.
그래서 더더욱 난감했다.
소드 익스퍼트에 이르른 실력자의 오러는 심상을 구현한다.
다시 말해, 현실을 왜곡시킨다는 뜻이었다. 델핀 선배의 오러가 아무런 열원 없이 고열을 방출하는 것이 그 예였다. 길포드 씨의 오러 또한 마찬가지였다.
환각.
최소한 내가 본 바로는 그랬다. 기기묘묘한 궤적을 그리는 손톱들의 위치가 내가 시야로 파악한 것과는 조금씩 달랐다.
하잘것없어 보이는 능력이었으나, 고수들의 싸움은 아주 작은 차이로 결정되는 법이었다. 특히 인체의 감각 중 대다수의 비중을 차지하는 시각을 혼란시키는 힘이라면, 무척 위협적이었다.
눈을 감지 않는 이상 시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눈을 감으면 감각 중 절반 이상이 차단되는 셈이었으니, 외통수였다.
푹, 하고 손톱이 땅바닥을 관통했다. 내가 이를 악물고 굴러 그 자리를 피한 직후의 일이었다.
마수는 노호성을 터트렸다.
"고작 그 정도입니까!"
어느새 그 목소리에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은 인간의 감정이 느껴졌다.
분노와 회한, 우스웠다. 마수 주제에.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손도끼를 던졌다. 대기를 찢어발기며 빛살이 쏘아졌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
상대가 미숙한 검사였다면 이 투척으로 결판이 났을 터였다.
그러나 마수는 상상도 못할 대응을 선보였다.
무대응, 손도끼가 제 살갗을 파고들어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가죽이 두꺼워 도끼날이 파고들어도 깊은 상처를 낼 수 없었다. 마수의 회복력을 고려하면 완치까지 몇 초만으로도 충분했다. 벌써 살갗이 부글거리며 재생하고 있었다.
인간과 마인 사이에는 이토록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했다. 마인과의 전투는 상식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당황한 나는 일단 본래의 의도대로 손도끼를 회수했다. 그 사이에 생긴 망설임이 패착이었다.
내가 잠시 주춤한 사이, 쇄도한 마수의 두 팔이 비뚤어진 십자가를 그렸다. 손톱과 칼이 맞부딪히자마자 카각, 하고 불똥이 튀었다.
그리고 힘겨루기, 팔이 덜덜 떨렸다.
원숭이 마수로 변모한 길포드 씨의 신체 능력은 차원이 달랐다. 이전까지는 내가 압도하는 모양새였지만, 지금은 정반대였다.
이전까지 실력 차이를 신체 능력으로 찍어 누르며 극복했던 나였다. 그런데 그 유일한 이점마저 잃었으니, 이젠 완전히 수세였다.
마수의 비릿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타오르는 청색 동공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가르쳐 드리지 않았습니까! 끝까지 검을 바라봐야 한다고!”
마수는 으르렁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마치 제자를 나무라는 엄격한 스승이라도 된 듯한 어조였다.
나는 어이가 없어 외쳤다.
“……검이랑 손톱이 같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검은 하나였고 손은 둘이었다. 그 격차는 명확했다.
그러나 마수는 내 변명을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극, 하고 마수가 손목을 꺾자 내 검이 손톱 사이에 갇혔다. 당황해서 팔을 빼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내 명치에, 발차기가 작렬했다.
송곳처럼 골격의 틈새를 파고드는 깔끔한 일격이었다.
일순 호흡이 멎는다. 그 순간만큼은 통증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이 정지한 듯한 이 느낌.
정신을 차리니 나는 이미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검조차도 놓친 채였다.
끄으, 하고 나는 신음을 흘렸다. 단 한 번 급소를 내주었을 뿐인데 시야가 뿌얬다.
손톱 사이에 내 검을 가두었던 마수는, 이내 무심하게 그 검을 내 쪽으로 던졌다.
지반과 마찰음을 일으키며 구르는 검, 나는 엉금엉금 기어 그 검을 쥐었다.
그리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내 상반신으로 푸르스름한 실선이 쏟아져 내렸다.
오러가 맺힌 손톱이었다.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 뒷걸음질을 쳤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다섯 줄기의 핏물이 허공을 수놓았다.
환각이었다. 시야에 포착된 궤도보다 조금 더 앞쪽에 손톱이 위치하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내 몸이 한 걸음 물러났다.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꽤 깊이 베인 상처였다.
급격한 출혈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럼에도 나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두르려 했다.
또 다시 교차하는 손톱 사이에 검이 갇히지만 않았다면.
이어질 일격은 명확했다. 또 다시 명치를 파고드는 발차기.
‘믿음의 방패’는 깨진 지 오래였다. 충격량을 감내하지 못한 체내의 장기가 엉망진창으로 터져 나갔다.
울컥, 핏물이 목울대를 타고 올라왔다. 시야가 더더욱 흐릿해졌다.
흐으, 흐으, 하고 숨을 가다듬는 일조차 버거웠다.
아프고 괴로웠다. 이대로 눈을 감고 안식을 찾고 싶었다.
암전해 가는 내 정신을 일깨운 것은, 또 다시 지반 위를 구르는 금속의 마찰음.
내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그 진원지를 향했다. 어느새 내 검이 또 다시 던져진 것이다, 나를 향해서.
마수는 그 타오르는 청색 동공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끝입니까?”
내 입에서 흐, 하고 되다 만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울컥이며 핏물이 입으로 차올랐다. 나는 지칠 대로 지쳐 벌벌 떨리는 턱 근육으로, 핏물을 퉤 뱉어냈다.
그리고 다시 엉금엉금 기어 손으로 검을 쥐었다.
균형조차 잡기 힘들었다. 다리 근육이 한계를 호소하듯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나는 일어섰다. 검을 지팡이 삼아, 이를 악물면서.
아슬아슬한 몸짓으로 검극을 마수에게 향했다. 그것이 대답 대신이었다.
마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엄습하는 날카로운 예기.
눈을 부릅뜬 채 그 궤적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후발선제(????)의 기본은 흐름을 보는 데 있다. 한 걸음 다가서면서, 그 흐름을 타고 한 바퀴 빙글 돈다.
그래,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몸을 회전시키려던 그 틈새에, 또 다시 발차기가 내리꽂혔다.
이번에는 옆구리였다. 급소라고 할 곳은 아니었지만, 이미 내장이 터져 나가고 있던 내게는 치명타나 다름없었다.
내 몸이 또 다시 땅바닥을 굴렀다. 이제는 일어날 힘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괴물로 변모한 스승의 평가는 냉혹했다.
“……늦었습니다. 또 마지막에 망설이셨군요.”
목숨은 소중하니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이죽이려다가 그만두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여력조차 없었다.
눈이 차츰 감겼다. 아늑한 잠이 찾아오듯 전신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아우성 소리가 들려왔다. 고함과 금속의 충돌음,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꾸벅꾸벅 잠이 찾아왔다.
그렇게 눈을 감은 순간.
"……순명하세요."
벼락같이 귓가에 내리꽃히는 목소리,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도미노처럼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 새하얗게 범람하는 기억이 암전하는 의식을 덧씌웠다.
두 남녀가 새겨진 풍경이었다.
그중 사내는 땅바닥에 내리꽂힌 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보아 무척 고통스러운 듯했다.
신음과 함께, 그가 꽁한 목소리를 흘렸다.
"아니… 그런다고 유술이 몸에 익긴 해요?"
냉소적인 질문이었으나, 여인은 훗, 하고 우쭐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손을 탁탁 터는 중이었다. 그것만 보더라도 사내를 땅바닥에 메다꽂은 쪽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널브러진 사내를 보고 있던 여인의 입이 열렸다.
"대륙 팔방을 쏘다닌다는 천하의 까마귀도 모르는 게 있나요?"
"……진짜로 모르는 게 없으면 대륙 곳곳을 쏘다니겠습니까?"
사내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여인은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맑은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잠시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는, 이내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내를 타일렀다.
"무술의 묘리는 이론으로만 설명할 수 없어요. 사상적 뿌리를 이해해야 진정으로 그 역사와 의도마저 체득할 수 있죠. 그중에서도 '순명'은 성국 비전 유술의 핵심이에요."
"……허무하진 않습니까?"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여인은 조금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사내는 흐으, 하고 숨을 고르며 되물었다.
"결국, 신의 뜻대로만 해야 한단 말 아닙니까? 그러다 죽기라도 하면 허무할 것 같은데."
흐응, 하고 여인은 묘한 소리를 내며 살짝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뒷짐을 진 채 살금살금 사내에게 걸어왔다.
"그조차도 제 의지라면요?"
"아무리 그래도……."
훅, 하고 사내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여인의 장난스러운 미소가 사내의 동공 위로 차올랐다. 사내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혹은 그 무엇 때문이든.
그는 쑥스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쉿, 하고 검지를 코에 가져다대며 여인은 속삭였다.
"의심이 들 때면, 이 말을 기억해요. 이 또한 성국 비전의 핵심이니까."
"……무슨 말을요?"
여인은 맑은 눈동자로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둘의 그림자가 서서히 겹친다.
"……임마누엘(immanuel: 주께서 함께 하신다)."
당신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덧붙이는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를 적셨다.
또 다시, 세상이 무너진다.
**
길포드는 아무 말도 없이 이안을 내려다보았다.
강한 인간이었다. 무력이든, 심상이든 어느 쪽이든 그랬다.
하지만 그 강인한 사내조차도 패배했다. 악신 오메로스가 내려준 힘이란 이토록 강력했다.
이미 핏물이 흙바닥을 잔뜩 적시고 있었다. 마저 내장 조각을 토해내지 못한 이안의 입가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끝이다.
오랜 경험과 야수적인 직감에 기반해서, 길포드는 적절한 판단을 내렸다.
아무리 강인한 인간이라도 저만한 출혈에 내장까지 박살나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당장은 죽지 않아도 몇 분 후면 알아서 숨이 끊길 터였다. 그렇다면 굳이 그가 숨을 거둘 필요는 없으리라.
길포드는 살인이 싫었다. 하물며 한때 정을 두었던 젊은이의 목숨을 빼앗기는 더더욱.
물론, 위선에 불과한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길포드는 그 인륜의 껍데기라도 지키고 싶었다.
그렇게 등을 돌려, 길포드가 남은 일행까지 처리하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흐으으… 으으……."
이안의 신음소리가, 마인의 발걸음을 붙들었다.
소리를 낸다고?
의문을 담은 길포드의 눈이 등 뒤를 향했다. 죽음을 앞둔 인간도 신음을 흘리긴 하지만, 이토록 선명한 호흡을 보일 순 없었다.
무심코 뒤를 돌아본 길포드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정체불명의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핏물은 아니었다. 땅바닥에 흩어진 유리 파편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길포드의 미간이 좁혀졌다.
"……힐링 포션?"
그럴 리가, 물약병은 전투 중에도 파괴되지 않도록 공들여 만들어진다. 고작 이 정도로 깨져나갈 리가 없었다.
하지만 꿈틀거리며 몸을 경련시키는 사내의 모습은, 그 액체가 힐링 포션임을 명백히 증언하고 있었다.
길포드가 당황해서 멈칫한 사이, 사내의 손이 탁, 하고 땅바닥을 짚었다.
비틀거리면서, 사내가 몸을 일으킨다. 길포드는 그제야 이안의 눈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금빛 눈동자.
절망한 인간은 절대 가질 수 없는 눈빛이었다. 그 일렁이는 적의와 각오에 길포드는 등골이 섬찟할 지경이었다.
일어나는 동안에도, 그는 몇 번이고 엎어졌다.
근육이 납덩이처럼 무거울 테고, 힐링 포션으로 응급처치를 했다고 해도 명줄을 붙드는 수준에 불과했다.
더 이상의 전투는 불가능했다. 그것이 수십 년 동안 길포드가 익혀 온 상식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 사내는 저리도 몸을 일으키려 애를 쓰는가.
미지에 대한 공포가 길포드를 사로잡았다. 이성은 저 사내를 당장이라도 찔러 죽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본능이 그를 붙잡고 있었다.
수차례의 도전 끝에, 결국 이안은 몸을 일으켰다.
헐떡이는 숨결, 핏물에 젖어 시야조차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 눈동자.
누가 봐도 한계였다. 그럼에도 그는,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시죠.”
그 말을 듣자마자 길포드는 울컥, 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그 정체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뇌리를 미친듯이 때려대는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죽여야 한다. 지금이 아니라면, 절대 죽일 수 없다.
그의 발이 땅을 박찼다. 찰나를 찰나로 쪼개도 부족한 시간, 길포드의 팔은 이미 쭉 내뻗어져 있었다.
손톱을 포함하면 그 길이는 가히 2m에 육박했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리치 차이, 심지어 이안의 대응은 늦기까지 했다.
이대로 찔려 죽는 것이 순리였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시간이 정지했다. 그 속을 유영하는 것은, 오직 사내의 몸.
물길을 타는 물고기처럼 이안의 몸이 빙글 회전했다.
아슬아슬했다. 조금이라도 일찍 돌았으면 반격을 당했을 테고, 조금이라도 늦게 돌았다면 찔렸을 텐데.
마치 마찰력 없는 구체를 건드린 듯했다. 길포드의 팔에는 어떠한 저항감도 전해지지 않았다.
길포드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 다음으로 이어질 연계동작이 무엇일지를.
이안의 검이, 시차를 가르고 횡으로 그어진다.
삶과 죽음을 쪼개는 후발선제의 묘리.
비전 절기, 회절(回).
일순 눈을 부릅떴던 길포드는, 이내 흡족한 미소를 머금는 수밖에 없었다.
완벽했다.
그보다도 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