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28화 (128/649)

〈 128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49)

* * *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내 검이 마수의 목에 박혀 있었다.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걸쭉한 액체가 비린내를 풍기며 대지를 적셨다.

내뻗어진 마수의 팔은 길었고, 또 위협적이었다. 그 섬뜩한 예기 앞에서 죽음의 공포를 떠올리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 또한 두렵고 무서웠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비로소 나는 스스로를 버릴 수 있었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속이 텅 비어버리면서, 도리어 내 솜털 하나하나마저 뚜렷이 느껴졌다. 시간이 가속했고 흐름에 동화된 내 몸은 어느덧 길포드 씨의 품을 파고들고 있었다.

그 결과가 지금 내 눈앞에 드러났다.

울컥이면서, 마수는 입에서도 피를 토했다. 목에 절반쯤 칼날이 틀어박혔는데도 즉사하지 않았다. 기괴함마저 느껴지는 생명력이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악신의 힘을 받은 마인이라도 한계는 존재했다. 아직까지는 가까스로 입을 열 수 있지만, 그조차도 몇 분에 불과했다.

명줄이 붙어있어 봐야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괜한 고통의 시간만 길어질 뿐.

그러한 상황임에도, 길포드 씨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와, 완벽… 크흐, 완벽했습니다.”

“……유언은?”

헐떡이는 숨소리로, 나는 그렇게 물었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중상이었다. 한때 인간이었던 것의 이야기를 구구절절 들어주기에는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이는 길포드 씨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도 시간은 귀중하리라.

“구, 구할… 큭큭, 구할 수 있겠습니까? 흐으, 이제 살점 씨앗들이 풀려날 텐데요.”

“나는 당신이 아니니까.”

이를 악물면서, 나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마수의 목에서 신음과 함께 핏물이 더욱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구할 수 있으면 구해, 후우… 그게 내 최선이라면.”

거친 숨결이 말문을 가로막았으나 애써 태연한 척을 했다. 이를 모를 길포드 씨가 아니었지만, 그는 그제야 평온한 미소를 지었다.

신음이 멎는다. 죽음을 앞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텅 빈 눈동자.

“……강하군요.”

“당신보다는.”

큭큭, 하고 길포드 씨는 갈라진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성대까지 칼날이 파고들어 핏물이 섞여 나왔다.

“……좋은 눈동자입니다. 살인을 앞두었는데도 망설임이 없군요, 훌륭한 살인자의 눈입니다.”

그러면서 노인은 미소 지었다.

마수의 징그러운 미소가 아니라, 늘 짓던 특유의 인자한 미소로.

“그럼, 지옥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가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고, 나는 온힘을 다해 칼날을 밀어붙였다.

그것이 최후였다.

팍, 하고 잘려나간 목에서 폭포수처럼 핏물이 터져 나왔다. 마수의 머리가 땅을 구르고, 나는 쏟아지는 핏빛 강우를 맞으며 숨을 골랐다.

비릿한 온기가 전신을 적신다. 비틀거리며 나는 자세를 바로 잡았다.

팔다리가 저릿했다. 복부는 물론이고 온몸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어서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을 무렵.

툭, 하고 내 발 언저리에 무언가가 걸렸다.

마수의 머리였다. 그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원숭이의 얼굴을 보며, 나는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콰직, 하고 짓밟은 마수의 골통이 썩은 과일처럼 엉망진창으로 터져 나갔다.

흩뿌려지는 뇌수와 골편, 나는 그제야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임마누엘.”

지옥에서는 평온하기를.

휘청이는 내 몸이 핏물을 밟고 지나갔다. 이 발자국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계속해서.

이제 전투는 최후의 무대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

고아원의 입구에는 이미 수많은 시체가 쌓여 있었다.

대부분은 원숭이 마수들의 사체였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은 고아원 내부로 대피한 모양이고, 일행들은 아직 바깥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느닷없이 원숭이 마수들이 물러났으니 놀랐을 테지.

내가 고아원의 마당에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마주한 사람은 성녀였다.

그녀는 초조한 낯빛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친 성녀의 몸이 얼어붙었다.

연분홍빛 눈동자가 내 전신을 훑었다. 굳이 자세히 살필 필요도 없을 터였다.

얼핏 보기에도 내 몸은 걸어다니는 시체에 가까웠다. 겉모습만으로도 최소 중상이었다.

한동안 넋을 놓고 있던 성녀가 곧바로 내게 다가섰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성녀의 손길이 내 부상 부위를 더듬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팠다.

“아, 아야… 아, 아아악! 아, 아프잖아요!”

힐링 포션으로 응급처치를 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아직도 내 몸 곳곳에는 피멍과 골절상이 남아있었다. 조금만 건드려도 짜릿한 통증이 송곳처럼 뇌리를 찔러댔다.

그러나 성녀는 터져 나오는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이나 내 상태를 살피던 그녀는, 이내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거에요?”

성녀의 연분홍빛 눈동자가 암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만큼 내 부상이 심각하다는 뜻일 터였다.

나는 괜히 무거워지는 분위기가 싫어 너스레를 떨었다.

“마수는 죽였습니다. 그 대가로 명예로운 훈장을 좀 얻… 끄아아악!”

물론, 성녀가 내 팔을 쥐자마자 곧바로 들통날 허세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성녀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를 짚은 그녀의 낯빛이 심각해 보였다.

“……부상이 너무 심해요. 얼른 떠날 채비를 해야겠어요. 신전에 가서 치료해야 하니까.”

나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성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냐는 뜻이었다.

그러자 성녀는 답답한지 가슴을 탁탁, 두드리며 외쳤다. 그 질량감 넘치는 가슴이 탄력을 뽐내며 고함이 내뱉어졌다.

“당연히 떠나야죠! 지금 원숭이 마수들이 일시적으로 퇴각했어요. 포위망이 엉성해진 틈에 유렌이 도주로를 만들고 있고요… 살고 싶다면, 지금 떠나야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잠시 침묵했다.

과연 길포드 씨의 말대로였다. 원숭이 마수들은 우두머리를 잃자 퇴각해 버렸고, 그래도 아예 도망치지는 않아 조금 넓은 범위에 걸쳐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포위망이 넓어질수록 빈틈 또한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유렌이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퇴로를 확보할 수 있다고 했다면 그럴 터였다.

고아원을 떠난다.

그리고 신전에 도착해서, 치료를 받으며 군대가 남은 문제들을 처리해 주기를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가까스로 죽음을 비껴간 내 몸은 중태였다. 당장 치료를 받더라도 후유증이 남을지도 몰랐다. 하물며 나는 이미 많은 공을 세우지 않았는가.

수많은 마수들을 토벌하고, 마인을 쓰러트렸으며, 암흑교단의 음모를 밝혀냈다.

이만하면 성국이든 제국이든 쓸 만한 제물을 포상으로 내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면 후유증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나를 비롯한 일행들의 명성이 하늘을 찌를 것은 물론이었다.

고생한 보람이 있는 행복한 결말이었다.

그래, 우리들에게는 그랬다.

그렇다면 고아원에 남은 아이들은?

불현듯 길포드 씨가 남긴 말이 떠올랐다. 핏물을 토해내며 마인이 뱉어낸 경고.

‘이제 살점 씨앗들이 풀려날 텐데요.’

입술을 뗐다가, 닫았다.

성녀가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른 채비를 하지 않고 뭐하냐는, 재촉하는 듯한 눈동자.

그러나 나는 그녀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었다.

“먼저 가시죠.”

“……뭐라고요?”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성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럼에도 내 의지에는 변함이 없었다.

“마인이 살점 씨앗의 통제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이제 마인이 죽었으니, 살점 씨앗들이 풀려나겠죠. 그놈들이 어디로 오겠습니까?”

“이안, 제발…….”

내 말이 이어질수록 성녀의 얼굴은 시시각각 달라졌다.

처음에는 놀란 듯하다가, 그 다음에는 고민에 빠진 듯하더니, 이제는 숫제 애원하는 어조로 내게 매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살점 씨앗들이 풀려난다고요? 그 둥지에 있던 살점 씨앗들이 몇이나 되는지 잊어버렸어요? 그럼 더더욱 떠나야죠! 지금 당신 몰골을 보세요… 어디 전투가 가당키나 한지!”

애절한 눈빛이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나를 이해할 수 없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할수록 답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의외로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살점 씨앗들이 몰려들면 아이들도 끝장입니다. 오히려 살점 씨앗의 수가 대량으로 증식할 수도 있고, 몇몇은 도주해서 새로운 곳에 둥지를 틀겠…….”

“그까짓 고아들이 끝장나서, 뭐요?”

울컥, 하고 내뱉어진 성녀의 반문에 나는 일순 입을 다물었다.

내 눈동자가 말없이 성녀를 응시했다. 그녀의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누구는 구하고 싶지 않은 줄 알아요? 하지만 가망이 없어요, 당신은 다쳤고 살점 씨앗들은 수십이나 남아있고! 도망치는 것이 최선이에요… 그것도 모를 만큼 바보에요?”

그렇게 말하며 치켜들어진 성녀의 눈동자에서, 옅은 물기가 얼핏 비쳤다.

“이안, 마음은 알겠지만 우리는 모두를 구할 수 없어요.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고아들이 죽어가고 있을지! 그들을 모두 구할 수 있나요?”

“아니요.”

내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그러자 성녀의 낯빛이 잠시 환해졌다.

내 이어지는 말만 없었다면, 그녀는 반색하며 나를 끌고 갔을 터였다.

“……하지만 구할 수 있는 아이들까지 잃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순한 억지가 아니에요. 지금 끝장내야 합니다. 살점 둥지가 퍼져 나가면, 미래에는 걷잡을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것이 내 진심이었다.

아이들을 위한 일이기도 했지만, 살점 둥지를 본 순간 나는 하나의 풍경을 떠올렸다.

두 번째 편지가 오던 날 꾸었던 꿈.

살점으로 이루어진 나무가 초원을 가득 뒤덮고 있었다. 절망과 애원으로 범벅이 된 여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울리는 듯했다.

지금 끝장내야 했다. 더는 퍼져나가지 않도록.

성녀는 내 흔들림 없는 목소리에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 또한 더는 건넬 말이 없었다.

한참이나 침묵이 감돌았다. 유렌이 찾아온 것은 그때였다.

“누님, 준비 다 끝났… 어라, 이안! 너 꼴이 그게 뭐……!”

“……죽을지도 모르는데?”

스산한 음성이었다. 연분홍빛 눈동자가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최후의 질문, 그녀가 주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이제 시간이 없었다. 완강히 버티는 나를 설득하고 데려가기에는 상황이 너무 급박했다.

상상 이상으로 무거운 분위기에 유렌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슬그머니 한 발자국 물러나 우리 둘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나 또한 굳이 유렌을 신경 쓰지는 않기로 했다. 내 고개가 끄덕여졌다.

“네, 각오했습니다.”

여인은 우물거리면서, 무어라 말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정돈해도 제대로 된 언어가 나오지 않는지, 곧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으으.”

짜증이 느껴지는 침음이었다. 성녀는 이내 발을 동동 구르면서, 더더욱 선명한 감정 표현을 보여주었다.

“으으, 으으으으, 으으으으으으으!”

그렇게 이를 악문 채 가까스로 분노를 삼켜낸 성녀는, 쿵, 하고 진각을 내밟았다.

지반이 움푹 꺼졌다. 성국의 비전 유술을 허투루 익히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그 충격파에 잠시 균형을 잃었을 정도였다.

어떻게든 무게중심을 되찾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성녀의 연분홍색 눈동자였다. 그 안에서 강렬한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짜증나, 당신!”

삿대질까지 하며 성녀가 외치는 말에, 나는 헛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허, 언제는 짜증나지 않았다고.”

“그래도 오늘은 특히 더 짜증나요! 자꾸 사람 헷갈리게 하질 않나!”

또 그 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제 모습은 늘 한결같았습니다. 헷갈리는 건 어디까지나 성녀님의 마음…….”

“……닥쳐요.”

그러면서 훅, 하고 내 상반신이 잡아당겨진다.

성녀가 내 멱살을 쥐고 당긴 것이다. 내 눈동자가 일순 멍청해지고, 성녀의 달콤한 숨결이 내 코끝을 스쳤다.

연분홍빛 색채의 동공에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얼빠진 표정, 우스운 꼴이었다.

“나는, 그 누구도 믿지 않아요… 당신도 마찬가지에요. 고아들을 구하겠다고요? 목숨을 걸어? 그런다고 이길 수 있을 것 같나요?”

“성녀님이 믿든 말든, 제 뜻은 확고합니다.”

으득, 하고 성녀는 이를 갈았다. 그녀는 한참 동안 나를 노려보고 있다가, 시선을 돌리고, 이내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여인의 달콤한 속삭임이 귓가를 적신다.

“……그리고 이건, 비밀이에요.”

그리고 팍, 하고 성녀는 내 몸을 밀쳤다. 내가 엉거주춤 뒤로 물러나자, 성녀는 품속에서 자그마한 핏빛 구슬을 꺼냈다.

그 정체는 익히 알고 있던 바였다.

‘혈정’, 그 자그마한 구체 하나가 성 한 채 값을 넘는다는 물건이었다. 내가 말릴 틈도 없이, 그녀는 두 손을 포개고 혈정의 힘을 이끌어냈다.

신성력이 폭풍이 몰아친다.

새하얀 광채가 마구잡이로 주위를 휩쓸어 가며 내 전신을 휘감았다. 불에 달군 쇠꼬챙이가 신경을 관통하는 듯한 통증, 그마저도 잠깐에 불과했다.

몇 초만에 신성력의 폭풍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서 있던 나는, 어느새 완치된 뒤였다.

후유증이 남을지도 모르는 중상이었다. 그럼에도 손끝의 감각 하나하나가 부활하더니, 이내 내 몸에는 활력이 넘쳤다.

내 눈이 멍하니 성녀의 손을 향했다. 후우, 하고 깊은 숨과 함께 열린 성녀의 두 손 위에는 절반쯤 작아진 혈정이 남아있었다.

나는 눈을 부릅떴다. 예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던 기억이 났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작아졌……!”

그러자 톡, 하고 내 코끝에 맞닿는 가녀린 손가락.

성녀의 검지였다. 그녀는 쉿, 하는 소리를 내더니 등 뒤로 시선을 향했다.

“……유렌.”

한동안 나와 성녀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유렌은, 못 말리겠다는 듯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의 고개가 절레절레 내저어졌다.

유렌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목숨을 건지기 위해 탈출하다 보니, 혈정 하나를 흘려버렸군요. 내 참, 성녀님도 조심하시지. 아무리 그래도 성녀님의 목숨보다 귀중한 물건은 아니니, 추기경들도 별 말 못하겠지만요.”

성녀는 물 흐르듯 내뱉어지는 유렌의 핑계에 훗, 하고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내 가슴팍에 남은 혈정을 밀치듯 넘겼다.

“남은 건 당신이 보관해요. 빌려주는 거니까, 꼭 돌려주는 거 잊지 말고요.”

“그거 어차피 성녀님 물건도 아니…….”

성녀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리기 시작하자, 나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더 말을 이어나가다간 옆구리나 꼬집힐 듯했다.

그 대신 나는 조심스레 혈정을 넘겨받았다.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았다. 성녀는 말했다.

“미안하지만, 도박에 동참할 생각은 없어요. 제 목숨은 소중하니까요. 제게는 야망이 있고, 해야 할 일도 많아요. 이기적인 여자라 실망했나요?”

“……아니요, 이해합니다.”

그에 답하는 내 목소리는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성녀는 다시 한 번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다가, 이내 조심스레 내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흠칫 내 몸이 굳었지만, 이내 긴장은 풀어졌다.

따스한 숨소리가 심장을 적시고 있었다. 성녀는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살아서 돌아와요, 이안.”

나는 떠나는 성녀를 굳이 배웅하지는 않았다.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 레토를 두고, 성녀와 유렌은 떠나갔다. 이제 남은 것은 넷뿐.

델핀 선배와 엘시 선배, 그리고 세리아와 셀린.

나는 조금 의외라는 듯 델핀 선배를 바라보았다.

“떠나지 않으셨네요.”

“……당신이 약속했잖아?”

델핀 선배는 슬쩍 내 시선을 피하면서, 쑥스러운 듯 그렇게 말했다.

“승리하게 해주겠다고, 어디 한 번 보여줘 봐.”

나는 그 말을 듣고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내 눈이 숲을 응시하고 있었다.

악신의 권속이 저곳에 남아있었다.

이제 마무리를 할 시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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