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29화 (129/649)

〈 129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50)

* * *

은빛의 실선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찬란한 빛무리가 세계에 상흔을 남긴다. 울컥이며 뿜어져 나온 마수의 핏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제 사라진 머리를 부여잡으려는 듯, 원숭이 마수의 손은 제 목 언저리를 더듬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야 그의 머리는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풀썩 마수 하나가 쓰러진다. 이미 수없이 쓰러트린 상대였다.

나는 아무런 감흥 없이 검에 묻은 핏물을 털어냈다. 주위를 둘러보니 숲은 대강 정리가 끝난 듯했다.

델핀 선배의 옆에는 대여섯 마리의 원숭이 마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종으로 새겨진 검흔에서는 살갗이 타는 매캐한 냄새가 풍겼다.

단숨에 여러 검로를 그려, 한꺼번에 달려든 마수들을 정리한다.

금사검(???)이었다. 본래 금사검에는 실초와 허초가 뒤섞이지만, 경지가 높아질수록 실초의 비중이 높아진다.

예를 들어 세리아는 세 줄기의 검로를 동시에 그을 수 있고, 그중 둘이 실초였다. 조금 더 숙련된다면 허초 없이 실초로만 이루어진 검로를 그릴 수 있을 터였다.

그보다 더 숙련된다면, 다섯 줄기의 검로를 다룰 수 있을 테고.

델핀 선배가 도달한 경지가 그랬다. 그녀가 긋는 금사검은 총 다섯 줄기의 검로가 한꺼번에 그어지며, 그중 셋이 진짜배기였다.

그 증거로 지금 델핀 선배 앞에 널브러진 원숭이 마수의 시체에는 각 한 줄씩의 검흔이 남아있었다. 세 마리가 동시에 내뻗은 모양새, 단숨에 제압당했다는 뜻이었다.

반면 세리아의 앞에 쓰러진 원숭이 마수들은 둘씩 짝을 이뤄 쓰러져 있었다. 그녀가 다루는 금사검의 실초가 둘뿐이기 때문이었다.

숨을 몰아쉬는 델핀 선배와 세리아를 바라보며, 나는 손을 쥐었다 폈다.

원리는 알 수 없지만, 나 또한 금사검을 다룰 수 있었다. 내 숙련도는 세리아보다는 높았고, 델핀 선배보다는 낮은 편이었다.

세 줄기의 검로와 세 개의 실초.

그것이 내 수준이었다.

그래봐야 어느 순간 내 몸에 새겨진 기억에 의존하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미래의 ‘나’는 어떻게 유르디나 가문의 비전 기술을 익힐 수 있었던 걸까, 심지어 성국의 비전 유술이나 소드 서클의 비전까지도 두루 익히고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생각해 봐야 답이 나오는 문제도 아니었으므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생각을 접었다.

내 눈이 숲의 깊은 곳을 향했다. 이제 동굴이 코앞이었다.

“정리 끝났으면 다시 이동하겠습니다. 동굴 근처에서 살점 씨앗이 나올 수 있으니 기습에 주의하세요.”

그러면서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나는, 문득 셀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척이나 긴장한 기색이었다. 덜덜 떨리는 팔과 다리, 창백해진 얼굴이 전투 속행이 가능할지 의문일 지경이었다.

하기야 셀린은 오늘이 첫 실전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원숭이 마수들에, 신화 속의 괴물에, 이제는 암흑교단이 비밀 실험을 저지르고 있던 둥지를 파괴하려고 향하고 있었다.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말없이 셀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흠칫, 놀라서 몸을 뻣뻣이 굳히던 셀린은, 나를 보자마자 안도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 황갈색 눈동자가 힘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이안 오빠.”

“무서워?”

내 담백한 질문에 셀린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 말을 듣고 나는 피식, 하고 웃고 말았다. 누가 봐도 뻔히 보이는데, 나름대로 자존심이라도 세우고 싶은 모양이었다.

“무서우면 빠져도 돼.”

“하, 하지만…….”

“대신, 앞으로도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은 많아. 잘은 모르겠는데, 내 옆에 있으면 더더욱.”

망설이던 셀린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그녀는 슬픈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비 맞은 강아지 같은 꼴이었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셀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꾹꾹 셀린의 머리를 누르자 셀린은 으으, 하는 소리를 흘리며 나를 흘겨보았다. 그럼에도 내 손길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셀린, 검을 든 이상 선택지는 없어… 죽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뿐이지. 앞으로 익숙해져야 해.”

“……응.”

셀린은 시무룩해져서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결국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등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셀린이 알아서 답을 찾아가야 할 문제였다. 내가 말한다고 해서 당장 납득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잠깐, 나는 뭐가 잘났다고 셀린한테 조언을 한 거지?

내 손이 턱을 쥐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 또한 실전 경험은 일천하기 그지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델핀 선배나 엘시 선배가 나보다 더 경험이 많을 터였다.

그러나 내 고민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느닷없이 내 앞에 갈색 머리카락이 불쑥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자그마한 체구, 엘시 선배였다.

그녀는 한동안 우물쭈물하며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니, 엘시 선배는 곧 결심했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나, 나도 잘했는데!”

잠시 멍하니 엘시 선배를 바라보던 나는, 곧 그 의도를 짐작하고 다시금 고소를 머금었다.

아무래도 셀린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것을 포상으로 착각한 듯했다. 그것이 못내 질투가 나서 내게 시위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물론 엘시 선배의 일방적인 오해에 불과했다. 내게 머리 쓰다듬어지는 것을 포상으로 여기는 사람은, 내 주변을 통틀어도 엘시 선배가 유일했으니까.

힐끔힐끔 기대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퍽 사랑스러워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엘시 선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에헤헤, 하고 풀리는 얼굴과 헤실거리는 입.

“이안 님, 헤헤… 좋아해요…….”

강아지가 애정을 표현하듯, 엘시 선배는 내 팔을 끌어안고 볼을 부벼댔다.

충격적인 광경이었으나 이제 셀린과 세리아조차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새 익숙해진 탓이었다.

그만큼이나 엘시 선배의 애정 표현은 적극적이었다. 이대로 아카데미로 돌아가면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이 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내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엘시 선배는 나를 믿고 따라와 주었다. 목숨이 걸린 일인데도 그랬다. 본래 평민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라, 내 명분에 동의하기 힘들었을 텐데도.

비단 엘시 선배뿐만이 아니었다.

셀린도, 세리아도, 델핀 선배도 그랬다.

어느샌가 내 주위에는 이토록 많은 동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내가 지켜야 할 사람도 그만큼 많아졌다는 뜻이었다.

나는 말없이 마음을 가라앉혔다. 누구보다 날카롭게.

내 눈동자가 깊이 침전했다. 나는, 어느 날 보았던 사내의 중얼거림을 떠올렸다.

‘다시는, 후회하지 않겠다.’

그 말이 먹먹하게 가슴에 울려 퍼졌다.

동굴은 어느덧 눈앞이었다.

**

동굴 안은 여전히 습하고 서늘했다.

하기야 떠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으니, 그동안 기후가 변했을 리는 없었다. 다만 이제 늦은 오후라 더욱 으스스한 한기가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곧 밤이었다.

악신 오메로스의 시간이 오면, 그녀의 권속들은 더욱 강해지고 포악해진다. 이는 살점 씨앗도 예외는 아닐 터였다.

얼른 끝장을 내야 했다. 일행들이 오랜 전투로 피로감을 호소하는데도 발길을 서두른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나아가고 있지만, 아직 살점 씨앗들의 습격은 없었다. 기나긴 통로를 빠져나오니 곧 구덩이였다.

나는 등 뒤로 시선을 보냈다. 일행들을 대표해서, 델핀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천천히 구덩이가 있는 공동으로 들어섰다.

그곳에서는 살점 씨앗들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걸어다니고 있었다. 처음 목격했을 때는 잠들어 있는 살점 씨앗도 많았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물경 수십에 이르는 괴물들이 꿈틀거리며 구덩이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개중 몇몇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 위치한 살점 둥지는, 꿈틀거리며 살점 씨앗들을 토해냈다.

열매처럼 열린 피막이 찢겨나가고, 막 태어난 살점 씨앗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키에에엑, 하고 울려 퍼지는 소리에 겁에 질린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재료로 쓰인 인간의 소리이리라.

본능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풍경이었다. 일행의 표정은 찌푸려진 지 오래였고, 나에 이르러서는 은은히 타오르는 분노마저 느끼고 있었다.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

다시금 내 판단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나는 엘시 선배에게 속닥였다.

“엘시 선배, 바로 영창 들어가세요. 진입은 델핀 선배와 내가 선두로…….”

묘한 기척이 내 감각에 잡힌 것은 그때였다.

내 눈이 서서히 천장을 향했다. 그곳에는, 살점 씨앗 하나가 웅크린 채 엘시 선배를 노려보고 있었다. 뛰쳐 오르기 직전의 신호였다.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살점 씨앗들은 저 손톱으로 벽을 타고 다닐 수 있었다. 미리 천장에 매복하고 있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엘시 선배를 밀쳤고, 미리 뽑아두었던 내 검극이 좌하단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솟구치듯 허공에 그어지는 세 개의 세로선.

키에에에에에엑!

은빛의 창살을 통과한 살점 씨앗이 네 토막이 나서 땅 위를 굴렀다. 이내 푸슉, 하고 정수리 부근부터 반으로 이어진 절취선이 핏물을 뿜어냈다.

살점 씨앗 하나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래, 고작해야 하나에 불과했다.

내 눈이 다급하게 천장을 훑었다. 그곳에는 박쥐처럼 매달린 채, 새빨개진 동공으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살점 씨앗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일행의 눈에 당혹감이 어리는 순간, 나는 외쳤다.

“전원 전투 준비!”

피로 젖은 신화가 재현될 시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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