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31화 (131/649)

〈 131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52)

* * *

질척거리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호흡은 한계였다. 이미 곳곳에는 자상이 남아 있었다.

미친듯이 달려드는 살점 씨앗들은 끝이 없어 보였다. 나는 헐떡이며 또 다시 검을 휘둘렀다.

당연하다는 듯 또 다시 핏물이 터져 나왔다. 내게 달려들던 살점 씨앗 하나의 머리가 사선으로 그어졌다.

벌써 수십 마리는 죽인 것 같은데, 어떻게 아직도 남아있는 거지?

내 지친 눈동자가 살점 둥지를 향했다. 어느덧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저곳에 가까워질수록 살점 씨앗들이 나타나는 빈도가 점점 더 짧아지고 있었다. 얇은 피막으로 생긴 고치가 열리고, 떨어지며 살점 씨앗들이 탄생하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그만큼이나 많은 인간들을 잡아먹었다는 뜻이었다.

고아들뿐만이 아닐 터였다. 암흑사제들의 실험장이라고 했으니, 길 가던 행인들을 납치하기도 했겠지. 그 결과가 수백 마리에 이르는 살점 씨앗 군대의 탄생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급히 만들어낸 살점 씨앗들은 그나마 신체 능력이 조금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키에에에에엑!

딱, 딱 부딪히는 잇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를 사선으로 베었는데, 중심부를 제대로 관통하지 못한 듯했다.

콰직, 하고 내 발에 짓밟힌 살점 씨앗의 머리가 제대로 터져 나갔다.

내 눈이 흘깃 델핀 선배를 향했다. 천하의 델핀 선배도 이쯤 되니 숨이 차는지,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세는 아직도 단단했다. 그녀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어김없이 살점 씨앗이 불타올라 쓰러졌다.

문제가 있다면, 고통을 잊은 살점 씨앗은 이제 불에 탄다고 해서 공격을 그만두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꺄아아악!”

“델핀 선배!”

나는 갑작스러운 비명에 당혹감을 담아 델핀 선배 쪽을 바라보았다. 불에 타 쓰러진 살점 씨앗 중 하나가, 엉금엉금 기어 기어코 델핀 선배의 발목에 손톱을 꽂아넣은 듯했다.

검붉은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살갗이 녹아내리고, 델핀 선배의 자세가 휘청였다.

하필이면 발목이었다. 나는 곧바로 손도끼를 던졌다.

팍, 하고 델핀 선배에게 달려들던 살점 씨앗 하나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그리고 적절한 시점에 울려퍼지는 낭랑한 목소리.

“……빛이여, 범람하라!”

새하얀 전하의 바닥이 살점 씨앗들을 감전시켰다.

멋대로 수축된 근육에 살점 씨앗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나와 델핀 선배에게 다가서려는 저 살의가 섬뜩했다.

나는 재빨리 델핀 선배에게 다가갔다. 이제 살점 둥지가 눈앞이었는데, 내 눈이 황망해졌다.

“……얼른 가.”

“하지만, 델핀 선배…….”

내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열자, 델핀 선배는 그 진홍빛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았다.

입술을 짓씹는 그 모습에서 숨길 수 없는 분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후배의 짐덩이가 된 신세가 한심하다는 듯이.

“아무리 발목 하나를 잃었어도 내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어. 나 몰라? 델핀 유르디나라고.”

“……알겠어요.”

약속했으니까, 이기게 해주겠다고.

나는 그렇게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델핀 선배는, 검으로 땅을 짚었다. 그대로 방어전에 임할 생각인 듯했다.

내 눈이 등 뒤를 향했다. 저 멀리에서 엘시 선배가 나와 델핀 선배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부상자 보호가 우선이었다. 그러한 뜻을 담아 나는 엘시 선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쩐지 엘시 선배가 떨떠름해 하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곧 엘시 선배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엘시 선배의 화력 지원은 델핀 선배에게 집중될 예정이었다.

차라리 그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델핀 선배에게 달려드는 살점 씨앗들이 많아질 테고, 나는 단독으로 움직일 기회를 확보할 수 있으니까.

등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점점 강렬해졌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한 번 땅을 박찼다.

손도끼가 파공성을 일으키며 쏘아진다.

달려들던 살점 씨앗 하나의 머리가 으깨지고, 또 한 번 궤적을 비틀어 그 옆에서 도약을 준비하던 살점 씨앗 하나의 옆머리를 날려버렸다.

그리고 좌하단으로 떨어지는 검극.

유르디나 비전 검술, 금사검(???).

세 줄기의 검로가 그려지고, 세 줄기의 핏물이 쏟아져 내린다.

그러다 팔에 손톱이 스치기도 했다.

피가 흘러내렸다. 점차 팔에서 힘이 빠졌다. 어느새 검을 든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다리를 물리기도 했다.

이빨에도 독이 있는지 상처가 곧바로 짓무르기 시작했다. 걸을 때마다 통증이 느껴졌다. 하반신이 상반신을 보조할 때마다 검푸른 핏물이 울컥울컥 뿜어져 나왔다.

그럼에도 나는 걷고 걸어, 비로소 살점 둥지 앞에 섰다.

비웃는 듯한 소리가 귀를 울린다. 음산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너는 이기지 못해.’

나는 흐,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한 마디를 뱉었다.

“……지랄하네.”

그러자 그 즉시, 살점 둥지의 피막이 펼쳐졌다.

마치 박쥐가 날개를 펼치는 듯했다. 애초에 그러한 움직임이 가능한 줄 몰랐던 내 몸이 흠칫 떨렸다.

그리고 그 피막 사이에서 수십 개의 촉수가 뻗어 나왔다.

악취미적인 외형이었다. 왜냐하면 그 촉수에 온갖 신체 부위가 가시처럼 튀어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팔이든, 다리든, 해골이든.

공통점은 뼈라는 것밖에 없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살점 둥지라며, 왜 뼈가 있는데?”

그러나 살점 둥지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채찍처럼 지반을 후려치는 촉수는, 어찌나 강력한지 돌로 이루어진 동굴의 바닥이 조금씩 깨져나갈 정도였다.

당연히 한 대라도 맞으면 치명상이었다.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몸을 내던졌다. 가상의 궤적이 수십 개씩 그려지고 있었다. 그 틈새를 파고들기 위해 나는 때 아닌 묘기를 펼쳐야 했다.

‘너는 이길 수 없어.’

스산한 속삭임이 울려 퍼질 때마다, 주위에 정체불명의 안개가 서리기 시작했다.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정신이 몽롱해지고 있었다. 절대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몸을 던지고, 구르고, 때로는 뒷걸음질 칠 때마다 점차 집중력이 흐릿해졌다.

그래도 점차 살점 둥지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바닥을 후려치는 살점 둥지의 촉수가 조금씩 조심스러워지고 있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벼락 같이 쏘아지는 손도끼가, 대기를 찢어발기며 파공성을 일으킨다.

회전하는 도끼날은 무시무시한 운동량을 가지고 있었다. 어지간한 나무조차 우지끈 박살낼 정도였다.

하지만 살점 둥지는 아니었다.

퉁, 하고 마치 탄력 있는 공을 건드린 것처럼 손도끼가 튕겨나갔다.

내 눈이 부릅떠졌다. 지금껏 살점 씨앗의 골통을 박살내 왔던 손도끼였다. 그 살상력은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통하지 않는다고?

내가 잠시 넋을 놓은 그때였다.

어느 순간 퍽, 하고 등을 후려치는 느낌.

울컥, 하고 핏물을 토하며 나는 앞으로 엎어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살점 둥지를 앞에 두고 있었다.

안개가 어디서 새어나오는지도 알 수 있었다. 살점 둥지의 꼭대기, 그곳에서 음산한 소리와 함께 검붉은 안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는, 이길 수 없어.’

“……그래?”

그 말대로였다. 이제 일어날 힘도 없고, 등짝을 얻어맞으니 내장도 뒤흔들린 느낌이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품속을 더듬었다. 양피지의 질감이 느껴졌다.

촉수가 서서히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내 손이 망설임 없이 양피지를 찢은 것은 그때였다.

화르륵, 하고 불이 번진다.

내 주위로 열기가 범람하며 살갗을 태우기 시작했다.

뜨거웠다. 산소 농도가 단숨에 떨어지고, 그러지 않아도 상처가 아물지 못한 등에서 지글거리는 통증이 이어졌다.

살점 둥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촉수를 떼어냈다. 나는 그제야 솟구치듯 몸을 일으켰다.

내 검에 찬란한 은빛의 오러가 맺혔다. 그리고 이를 악문 채, 전력을 다해 들어간 찌르기.

회심의 일격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느껴지는 것은 미끄러지는 감촉.

어라, 하는 순간 나는 또 다시 허공을 날고 있었다.

쿨럭이며 핏물이 허공에 쏟아져 내렸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나는 공중에 붕 뜬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엘시 선배와 셀린, 세리아의 눈동자가 부릅떠져 있었다. 델핀 선배의 얼굴에도 절망이 어려 있었다.

패배를 직감한 표정들이었다.

그리고 이죽이듯 살점 둥지의 정수리 부근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너는, 절대 이길 수 없어.’

쿵, 하고 내 몸이 떨어지자 땅바닥에 울렸다. 핏물이 울컥울컥 식도를 타고 넘어왔다. 아니, 어쩌면 기도일지도.

솔직히 알 수 없었다.

과연 신화 속의 괴물다웠다.

설마 물리 내성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위험요소로 살점 씨앗만 고려했던 것이 패착이었다.

성녀가 떠올랐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경고를 했었는데.

내 눈이 멍하니 살점 둥지를 바라보았다.

‘너는 이길 수 없다.’

서서히 눈이 감긴다. 아늑한 잠이 찾아오는 듯했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 정신을 잃으려고 했던 그 순간.

“……불꽃.”

불현듯 귓전을 때리는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내 눈은 자연스레 살점 둥지의 촉수들을 향했다.

끄트머리가 흉물스럽게 녹아있었다. 다름 아닌 레토가 준 불꽃 마법 스크롤에 의해서였다.

불꽃은 통한다. 그 사실이 뇌리에 번뜩이며 찾아왔다.

문제는, 지금 내게 불꽃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 내게는 없었다.

한 가지 계획을 떠올린 내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검이 처량한 소리를 울리며 내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땅바닥을 애처롭게 몇 번 구르는 금속의 소리.

이죽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살점 둥지였다.

패배자를 조롱하는 모양이었다. 이형의 괴물은 마지막이라는 듯 촉수를 꿈틀거렸다.

살점 둥지의 촉수가 다시 치켜들어진 그 찰나.

“……델핀 유르디나!”

일순 세상이 멈췄다.

델핀 선배와 내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동자는 의문을 품고 있었지만, 아직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내가 그녀와 맺었던 약속을.

“검 던져!”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을 때.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검이 날아들었다. 아직도 금빛 오러가 맺혀 있는 검, 델핀 선배가 단검을 던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밀도 높은 오러는 던진 뒤에도 한동안은 남아있었다. 나는 그 검을 곧바로 받아서, 하늘 위로 던져버렸다.

검이 허공에서 빙글빙글 돈다.

처음에는 움찔하던 살점 둥지는, 이내 아무것도 없는 곳을 가르는 검의 궤적에 이죽이는 소리를 냈다.

‘너는 이길 수 없…….’

내가 웃음을 터트린 것은 그때였다.

흐, 하고 터져 나온 웃음은 곧 큭큭거리며 폐부를 쥐어짰다.

의아한 듯 살점 둥지의 말이 멎었다. 멈칫한 촉수들에게서 의문이 느껴졌다.

어차피 곧 해소될 궁금증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나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이겼어, 병신아.”

그 직후, 금빛의 오러가 맺힌 검극이 아래를 향했다.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섬광이 세계를 태우며 종으로 그어진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키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수십에 달하는 살점 씨앗들이, 급작스레 제 머리를 쥐어짜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살점 둥지의 두꺼운 피막 사이로 끓어오르는 금빛 광채가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비명을 내지르듯 살점 씨앗의 정수리가 열리고, 그 안에서 찬란한 빛이 쏟아져 내리던 그때.

폭죽처럼, 시야가 터져 나갔다.

눈앞이 새하얬다. 튕겨나간 몸이 땅을 엉망진창으로 굴렀다.

삐이이­ 하는 이명 소리.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내 검을 쥐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더는 힘이 없었다. 의식이 점차 암전하고 있었다.

잠시 눈을 떴을 때는, 울상을 짓고 있는 얼굴들이 보이고 있어서.

“……푸, 품속에, 물약.”

그 한 마디를 끝으로, 나는 다시 기절해 버렸다.

내 사투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

아늑한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늘 괴로운 일이다.

눈꺼풀을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에, 나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은 어디지?

기억이 몽롱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단지 눈을 떴을 때, 나는 나를 잠자코 내려다보고 있는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은으로 실을 짠 듯 신비로운 빛을 품은 머리카락이 우선 내 눈에 띄었다. 그 다음으로는 새하얗고 부드러운 피부, 맑은 색감을 가진 연분홍빛 눈동자까지.

내가 눈을 뜨자, 그녀는 깜짝 놀랐는지 눈을 부릅떴다.

아직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그래서 나는, 더듬거리며 떠오르는 말을 내뱉는 수밖에 없었다.

“……신성력 주머니?”

그후 내 입에서 비명 소리가 새어나왔다.

일상으로의 복귀를 알리는 신호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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