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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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믿을 수 없다.
성녀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게 믿어왔다. 고아원에서 자라, 성녀로 간택 받고, 성국 정계에서 활동하며 그녀는 사람의 온갖 추악한 면모를 목도했다.
그럴 때마다 그 비틀린 신념은 단 한 번도 성녀를 배신하지 않았다. 누구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성녀는 이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박애를 강조하던 고아원의 원장은 제 배를 불릴 궁리나 하고 있었으며, 신앙과 순종을 외치던 주교들은 권력을 탐하여 의심암귀를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 성녀 본인조차도 그랬다.
속마음을 숨기는 데 능하고, 상대를 기만할 줄 아는 인간만이 정계의 아귀다툼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성녀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가 꾸밈없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상대는 단 둘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 친남매와 다름없는 사이인 호위기사 유렌.
그리고 얼마 전부터 개와 고양이처럼 다투기 시작한 이안 페르쿠스.
사실 전자는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 없는 종류에 속했고, 성녀가 진정으로 제 모습을 드러내는 상대는 이안이 처음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처음에는 짜증이 나고 싫었다.
누구나 알 수 없는 것을 두렵고 불쾌해한다. 특히나 정치인이나 상인은 그 정도가 심했다. 계획에 계산에 중대한 차질이 빚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성녀도 미지의 존재를 꺼려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비친 이안은 상식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성국의 비전 유술을 쓰더니, 소드 서클의 비기를 능숙하게 다루었다.
심지어 제국 황실의 측근들에게만 주어지는 용혈 마법까지 하사받은 인간이었다.
그 정체도 알 수 없었고 한계도 알 수 없었다. 단숨에 그녀와 유렌을 제압한 실력으로 미루어보아 최소한 익스퍼트 상급에 이른 강자라고 짐작했을 뿐.
솔직히 기분 나빴다.
비록 계산된 호의였다지만 협박과 폭력으로 돌려받은 것이 분했고, 무력으로든 정보전으로든 완패를 시인해야 했을 때는 참담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보니 이안을 마주칠 때마다 으르렁거리는 것은 필연이었다. 최초에는 당황하는 듯하던 이안도 곧장 반격에 나서, 어느새 둘은 투닥거리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심은 알고 있었다.
성녀의 가슴속에는 여전히 그날 보았던 이안의 모습이 깊게 배어들어 있었다. 고작해야 평민 계집 하나를 살리기 위해, 금전을 거리낌 없이 포기하던 사내 하나가.
고아원에서 이안은 그날 보았던 그대로 행동했다.
부모 없는 아이들조차 더럽다고 기피하지 않았다. 그들을 위해 노력했으며 때로는 제 앞으로 떨어진 이윤까지 포기하기도 했다.
헷갈렸다. 그러면서도 이안과 투닥거리는 일을 멈출 수 없던 까닭은, 아무런 가식도 없이 대할 수 있는 상대가 그만큼 드물었기 때문이리라.
이안을 상대할 때면 성녀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어쩌다 보니 맹랑한 후배 둘의 견제를 받게 되고, 천성적인 승부욕 때문에 이안을 두고 다투는 관계로 보이기도 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늘 하던 대로의 가식에 불과했다. 성녀는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믿지 않으니까, 사랑할 수도 없다.
성녀에게 인간관계란 체스판 위에 말들을 배치하는 일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판 위에 폰은 최대한 줄이고, 비숍이나 나이트를 늘려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러다 룩이 걸리면 대박이고, 퀸이라면 반드시 잡아야 했다.
아무도 신용하지 못했던 여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란 그토록 삐딱했다. 종종 지독한 외로움이 찾아오기도 했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도 그녀를 체스판의 말쯤으로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예외는 없다. 이미 일평생을 지켜온 신념이었다.
흔들릴 일은 없으리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성녀의 연분홍빛 눈동자가 잠자코 병상에 누운 사내를 향했다.
옅은 숨소리가 가냘팠다.
마수와 마인을 쓰러트리고, 신화 속의 괴물까지 일소해 버린 강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연약한 모습이었다.
그야 그럴 만도 했다. 그 영웅적인 혈투의 대가로, 사내는 죽음의 문턱까지 몰렸으니까.
다시 만난 사내의 몰골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수없이 많은 환자를 상대해 본 성녀조차 입을 가린 채 숨을 들이켰을 정도였다. 그만큼이나 사내의 몸 상태는 심각했다.
독이 퍼져 나가며 혈관은 거무죽죽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짓무른 상처에는 피와 고름이 흘러내렸다. 내장은 찢겨질 대로 찢겨져 입에서 핏물과 함께 토해졌다.
만일 사내의 품 안에 있었던 물약이 아니었다면, 그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으리라.
심장의 박동을 줄이고, 자연치유력을 높이며, 독성에 저항력을 키워주는 약까지.
하급귀족에 불과한 그가 어디서 이토록 철두철미한 준비를 해왔는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연금학부에 절친한 친구라도 있지 않다면 불가능했다.
그 자세한 까닭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물약들 덕에 이안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니 다행이었다.
성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충격의 잔향으로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그녀는 미리 사내에게 건네 두었던 반쪽짜리 혈정을 꺼냈다.
이안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사내는 성 한 채 값의 제물을 모두 써먹은 뒤에야 완치되었다. 그러고도 며칠 동안이나 정신을 잃은 채 깨어나지를 않았다.
아직은 중환자로 취급되어, 면회조차 제한된 지 일주일째.
성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안의 병실에 들리고 있었다. 담당사제라는 웃기지도 않는 핑계까지 동원해 가면서 말이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할 텐데, 성녀는 이마를 짚고 옅은 숨을 내쉬었다.
스스로도 제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성녀는 단지 안타까운 눈빛으로 이안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저토록 고른 호흡을 하는데, 어째서 그는 깨어나지 않을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어째서 목숨을 걸고 아이들을 지켰냐고, 고작해야 고아들이 아닌가.
온 대륙에 죽어가는 고아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오늘 하루에도 못해도 수백 명은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은 하루살이 목숨, 그것이 바로 고아들을 향한 세상의 취급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꺾이지 않고 싸울 수 있었냐고 묻고 싶었다.
전투 속행이 불가능한 수준의 부상이었다. 그럼에도 사내는 어떻게든 움직여, 살점 둥지를 파괴했다. 어지간한 의지력으로는 불가능한 업적이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복잡한 마음을 담아 이안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때.
사내의 입에서 자그마한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성녀의 눈이 부릅떠졌다.
드디어 의식을 되찾은 걸까?
느닷없이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손끝이 뻣뻣해지고, 긴장한 동공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왜 이러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분명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정작 사내와 단 둘이서 대면한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가 꼴깍꼴깍 마른침을 삼키고 있던, 그 찰나의 일이었다.
사내의 눈꺼풀이 서서히 열렸다.
심유한 빛을 품은 금빛 눈동자가 세상에 드러났다. 그는 눈이 부신 지 잠깐 인상을 찌푸렸다가, 이내 시선을 성녀에게로 돌렸다.
성녀의 심장 박동이 최고조에 달했다.
더듬거리면서, 입술을 뗐다 붙였다를 몇 번.
무어라 말이라도 꺼내기 직전, 사내의 입이 비로소 메마른 음성을 토해냈다.
“……신성력 주머니?”
성녀의 손이 환자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구슬픈 비명이 이어진 것은 물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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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고아원의 아이들은 거처를 옮겼군요.”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한 성녀의 기나긴 설명을 들은 뒤, 내가 내뱉은 감상은 그랬다.
내 담백한 반응에 성녀의 기색이 뚱해졌다.
무슨 반응을 기대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보다는 더 극적인 모습을 보일 줄 알았던 듯했다.
그러나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드는 생각이라고는 그것뿐이었고, 또 의식을 되찾은 지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광대처럼 맞장구를 쳐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성녀는 이내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설명을 덧붙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고르고 골라 제대로 된 곳으로 보냈으니까.”
“성녀님이라면 그럴 줄 알았습니다.”
흥, 하고 성녀는 내 말에 시큰둥한 태도로 응수했다.
“방금 전까지는 꼼짝없이 내가 도망간 줄로만 알았다면서요?”
“설마 신전에 동원령을 내렸을 줄은 몰랐죠. 그거 사문화된 규정 아닙니까.”
내 말에도 성녀는 아직 마음이 풀리지 않았는지 삐진 티를 팍팍 냈다.
그랬다. 성녀는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뜬금없이 사문화된 규정을 들이밀며 사제와 위병들을 차출했다.
그리고 그 길로 숲으로 달려온 것이다. 마침 살점 둥지를 잃고 폭주하고 있던 살점 씨앗들을 제압하는 데는 그들의 공도 컸다고 들었다.
그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조금 기다렸다 진입할걸, 그러한 내 불평에도 성녀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당신이 그곳에서 살점 씨앗들을 잡아두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어요. 애초에 그게 당신이 바라던 바였잖아요?”
하여간 말만큼은 청산유수였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고는, 아무 말도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커다란 격차였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는 그 지옥 같은 동굴 안에 있었는데, 일어나 보니 어느덧 그리운 아카데미의 정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헷갈렸다. 마치 내가 꿈을 꾼 것만 같아서.
살점 둥지를 폭파시키기 직전 들었던 그 속삭임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때,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내게 조언을 건넸다.
다시 생각해 보면 환청을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시 나는 살점 둥지가 내뿜는 기체를 너무 들이마신 상태였으니까.
그렇게 내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자, 성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또 궁금한 건 없어요?”
무슨 소리냐는 듯 내 눈이 성녀를 향했다.
일행은 무사하고, 고아원의 아이들도 좋은 곳으로 갔다니 이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남아있는 궁금증은 딱히 없었다.
그러자 성녀는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존재감 넘치는 젖가슴이 그 탄력을 과시했다.
“마수 시체를 처분한 금액이라거나, 성국이나 제국에서 내려줄 포상이라거나, 아카데미에서 실습에 몇 점의 가산점을 주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어차피 곧 알게 될 정보 아닙니까.”
“……그, 그래도!”
울컥해서 내게 무어라 말하려 하던 성녀는, 곧 한숨을 내쉬며 기세를 누그러트렸다.
그럼 그렇지, 하는 눈빛이 나를 향했다.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럼 이제 퇴원해도 됩니까?”
“……뭐, 그렇긴 한데요.”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뿐이지, 내 몸은 이미 완치된 지 오래라고 들었다.
이제 의식을 되찾았으니 더는 병실에 갇혀 있을 이유가 없었다. 너무 오래 쉰 탓인지 근육과 관절이 찌뿌둥했다.
아무래도 최적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한동안 수련에 열을 올려야 할 듯 싶었다.
성녀의 확인을 받은 나는 옷가지를 챙기고, 제복 외투를 걸친 뒤 검과 손도끼를 허리춤에 매달았다.
생각해 보니 델핀 선배의 검은 어떻게 됐지?
그거 엄청 비싸 보이던데, 순간적으로 식은땀이 흘릴 뻔했지만 곧 나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차피 델핀 선배는 부자니까 괜찮을 터였다. 정 안 되면 마수와 마인을 쓰러트린 포상금으로 변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내가 한 걸음을 내딛었을 무렵, 문득 생각났다는 듯 성녀의 질문이 나를 붙잡았다.
“길포드는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내 눈이 흘깃 성녀를 향했다. 그녀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중얼중얼 말을 이어갔다.
“그는, 마인이잖아요? 고아들을 팔아넘긴 악당이고. 그런데 왜, 굳이 의뢰를 넣으면서까지 사태를 해결해 달라 한 걸까요. 그리고 우릴 죽일 기회는 수도 없이 많았잖아요. 심지어 당신을 훈련시키고…….”
“죽고 싶었겠죠.”
내 단조로운 대답에 성녀의 눈빛이 나를 향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의혹이 머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순순히 죽어주거나 자수하면 그만이잖아요?”
“어쩌면 죽기 싫었을지도 모르고.”
말장난 같은 이야기에 성녀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녀가 조금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헛소리…….”
“인간의 마음이란 그토록 복잡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러면서 쓴웃음을 머금었다. 성녀의 눈동자가 멍청해졌다.
“그리고, 성녀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저요?”
“‘그까짓 고아들’이라면서요.”
성녀는 허를 찔렀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연분홍빛 눈동자에 미미한 감정의 너울이 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까짓 고아들’이라는 말은, 남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스스로를 찌르는 칼이지.
“고아 출신이라서, 스스로를 비하하려고 쓰는 말이잖습니까. 정작 길포드 고아원의 아이들을 좋은 곳으로 보내려고 애를 썼으면서.”
성녀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내 시선을 피했다. 그러든 말든 나는 이제 떠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녀에게 위로를 건넸다.
“고아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저한테 성녀님은 성녀님이니까요. 싸가지 없는 신성력 주머니 말이죠.”
내 말에 성녀는 발끈했는지 나를 쏘아보려다가, 정작 나와 눈이 마주치자 멍한 눈빛이 되었다. 그 까닭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그녀만이 알 수 있겠지, 나는 더는 신경 쓰지 않고 다시금 걸음을 내딛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렇게 병실을 나서기 직전.
“……왜 그랬죠?”
절절한 목소리였다.
감정의 격류가 언어를 입고 쏟아져 내렸다. 내가 슬쩍 등 뒤로 시선을 돌리자, 성녀는 몸을 일으킨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고아들이 죽든 말든, 세상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은 널렸어요. 무엇보다 당신, 죽기 직전이었다고요! 조금이라도 운이 좋지 않았다면, 지금쯤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을 걸요?”
그것은 세상을 향한 싸늘한 냉소이자, 분노였다.
그래서 나는 잠자코 성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녀의 진심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렇게 착한 척을 하고 싶었나요?! 방법은 많았어요! 그대로 탈출해서, 마인을 쓰러트린 공적만 알렸어도 당신을 칭송하는 목소리는 지금만큼 드높았겠죠. 목숨을 건 전투는 한 번이면 족하니까! 살점 둥지고 뭐고, 남한테 맡기는 편이 합리적…….”
“성녀님.”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지극히 평탄하고 가라앉아 있는 한 마디, 성녀의 입을 다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성녀의 혼란스러운 눈빛이 나를 향했다.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은 많았다. 그러지 않으면 살점 둥지가 퍼져 나갔을지도 모르니까, 고아들을 지키고 싶었으니까, 사실 모든 인간이 합리적인 선택만을 내릴 수는 없다는 일반론적인 이야기까지.
그러나 그 모든 말보다, 조금 더 정확한 대답이 생각나서.
나는 어느 날 들었던 속삭임을 재생했다.
“……임마누엘(immanuel).”
그것이 끝이었다.
성녀의 눈빛은 다시 멍청해졌고, 나는 걸음을 옮겼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햇살은 따스하고 날씨는 청명하다.
맑은 하늘이 마치 오늘 하루를 축복하는 듯했다.
신전을 나서자마자 말갛게 쏟아져 내리는 햇빛을 맞이하며, 나는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서 보고 있을까, 어쩌면 벌써 지옥에 떨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어느 노인과의 추억을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두기로 했다.
그래, 주께서 함께 하시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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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델핀 선배를 찾아간 건 그날 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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