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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33화 (133/649)

〈 133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54)

* * *

밤은 차다.

델핀 선배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나는 시린 밤공기를 해치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슬슬 기말고사 기간의 끝을 앞두고 있는 심야의 아카데미는 고요했다.

다들 도서관에 처박혀 공부를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분명 신전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시간대는 오전이었는데,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밤이었다.

내 퇴원 소식을 전해들은 지인들이 속속들이 찾아온 탓이었다.

처음에는 당연하다는 듯 셀린과 레토가 찾아왔다. 덤으로 세리아까지.

아직도 만날 때마다 다투고 있는 듯했지만, 셀린과 세리아는 최근 함께 다니는 일이 는 듯했다. 레토가 귀띔해준 바로는 세리아의 수련에 셀린이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지난 실습 기간이 셀린에게 자극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검사로서 성장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기회였다. 아끼는 후배 둘이 친해진다니 나로서는 기꺼울 따름이었다.

셀린과 세리아는 나를 보자마자 곧장 내게 달려들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었다.

도도하던 세리아의 표정이 단번에 울상으로 바뀌는 모습이 꽤 볼 만했다. 셀린은 내 등짝을 한 대 후려쳤다.

“아아악! 야, 셀린! 막 퇴원한 환자한테…….”

“걱정했잖아, 바보야!”

그러면서 울먹이기 시작한 셀린을 보고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세리아도 그동안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다소 피로한 기색이었다.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후배 둘을 다독여야 했다.

“괜찮아, 괜찮아. 그냥 살짝 죽을 듯 말 듯 했을 뿐이야.”

“제발, 이안 선배… 간 떨어지겠어요. 다시는 이러지 마세요.”

세리아는 숫제 애원하는 투가 되어 내게 매달렸다. 나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약속을 지킬 자신은 없었다.

당장 내일 편지가 온다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굳이 지금 같은 분위기에 초를 칠 수는 없었다. 나는 울먹이는 두 후배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등을 다독이면서 그녀들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레토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스크롤은 잘 썼냐?”

“아주 유용하게.”

“그럼 갚아, 새끼야. 그거 내 두 달치 용돈보다 비싼 거야.”

늘 그랬듯이 나와 레토의 대화는 간결하기 그지없었다. 어차피 서로 숨길 것도 없는 사이였다. 다만 그는 마법사답게 셀린과 세리아보다는 이성적이었다.

그는 내가 없던 사이의 일은 간략하게 전해 주었다.

“길포드 고아원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에 착수했다더라. 몇 년만에 발견된 마인 때문에 성국과 제국이 시끄러운 모양이야.”

훌쩍이는 셀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나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살점 둥지에 대한 건 어떻게 됐어?”

“조사 중이야, 하지만 워낙 터무니없는 이야기라 대외적으로는 비밀로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어. 너도 곧 누군가 찾아오지 않을까?”

그 정도야 예상했던 정도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화 속의 괴물이 등장했다고 해봐야 대중의 불안감만 조성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조금 더 명확한 조사를 거친 후에, 원인과 대처 방안까지 결론이 나야 발표가 될 터였다.

그 기간이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몰랐다. 높은 확률로 몇 개월 이상의 시간은 소요될 터였다.

당장 수천 년 전의 사료를 보관하고 있는 곳은 많지 않을 테니까.

지금쯤 신화학이나 고고학을 전공한 대학원생들은 비명을 내지르고 있을 터였다.

그것이 기쁨의 비명인지, 죽기 직전의 단말마인지는 나로서도 알 도리가 없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 찾아온다라.

지금 신경 써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내게 해코지는 하지 않을 테니, 나는 일단 고개를 내저으며 잡생각을 떨쳐냈다.

레토는 살짝 주위를 둘러보다가, 목소리를 낮춰 내게 말했다.

“나도 들은 이야기지만, 이번 일을 꾸민 흑막의 이름이 나오고 있는 모양이야.”

“……도대체 넌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듣는 거야?”

나는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레토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레토는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쯤이야 간단하다는 듯.

“당연히 사건 관련자로서 조사에 협조하면서 캐낸 정보지, 뭐. 길포드 고아원에 주기적으로 수백 골드에 달하는 현금을 전한 사람의 이름이 장부에 적혀 있었거든.”

“그게 누군데?”

“……‘미트람’.”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곰곰이 그 이름을 새기듯 몇 번을 되뇌이고 있자, 레토는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높은 확률로 암흑교단의 사제야.”

‘암흑사제 미트람’이라.

어쩐지 한동안 그 이름을 듣게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고민에 빠진 사이, 셀린은 내 품을 더욱 파고들어 얼굴을 내 가슴팍에 묻었다. 그러자 세리아도 그에 질세라 내 품을 파고들었다.

안타깝게도 두 소녀를 모두 품을 수 있을 만큼 내 품은 넉넉하지 못했다. 결국 울먹거리고 있던 셀린과 세리아는 서로를 째릿, 노려보기 시작했다.

“……야, 찐따. 조금 좁다?”

“그러게요, 하스터 양이 비키면 딱이겠는데.”

그리고 으르렁거리기 시작하는 두 여인.

나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선배 앞에서 지들끼리 다투다니, 손도끼로 버르장머리를 고쳐버릴 수도 없고.

그렇게 그 삼인방이 떠나간 뒤, 기숙사 방에서 쉬고 있던 나를 찾아온 것은 엠마였다.

문을 열자마자 울상을 지은 얼굴이 불쑥 시야 속을 파고들었다.

붉은색을 띠는 갈색 머리카락, 맑은 초록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그녀는 또 다시 무언가를 바리바리 싸들고 온 채로 내게 물었다.

“이안! 괜찮아?”

걱정으로 가득 찬 목소리였다. 그래서 나는 얼떨결에 그녀를 방 안에 들이고 말았다.

곳곳에 놓인 술병 때문에 조금 부끄럽긴 했다. 밤에 홀로 술을 홀짝이며 외로움을 달래던 흔적이었다.

그러나 엠마는 방 안을 슥 훑어보더니, 그다지 신경도 쓰이지 않는지 들고 온 보따리에서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자, 이건 신체 활력에 도움을 주는 물약이야. 그리고 이건 호넷의 꿀인데, 물에 타서 마시면 피로 회복에 도움을 줘. 또 이건 내가 만든 죽인데,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속이 불편하면 조금씩 데워서 먹으면 되고…….”

약부터, 음료, 심지어는 요리까지 나오는 보따리의 위용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지난번부터 생각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많지 않나?

게다가 나는 이미 엠마에게 은혜를 입은 바 있었다. 그녀가 준 물약 덕에 나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살아 숨쉬지도, 성녀한테 잘난 듯 떠들지도 못했겠지.

나는 그래서 조심스레 그녀를 만류했다.

“엠마, 괜찮아. 어차피 완치된 지 오래고, 의식을 되찾느라 시간이 걸렸을 뿐이야.”

“하, 하지만! 그동안 몸이 많이 약해지지 않았어? 어떡해… 살 빠진 것 좀 봐.”

살이 아니라 그동안 운동을 못해서 근육이 빠진 것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엠마는 가슴이 찢어진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그녀는 곧바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내, 내가 지금 뭐라도 만들어 줄까? 이래봬도 신부 수업은 꽤 받아서, 요리는 자신 있거든. 그리고 하는 김에 방 청소도 좀 하고…….”

그대로 두면 진짜로 무슨 짓이든 할 기세였다. 그래서 나는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러야 했다.

“……엠마.”

그러나 엠마는 내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연금술사답게 어떤 일에 한 번 꽂히면 남의 말을 듣는 성격은 아닌 듯했다.

결국 나는 최후의 수단을 동원하기로 했다.

“술병부터 치우고, 그리고 음… 저쪽은 먼지가 많이 쌓여 있네? 위가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으니 음식은 죽이나 스, 프로……?”

꾸욱, 하고 제 손을 감싸쥐는 손길에 엠마는 당황한 듯 말이 멎었다. 동그랗게 뜨인 연녹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엠마, 괜찮아. 네 손에 어떻게 물을 묻히게 하겠어.”

아무리 그래도 손님에게 집안일을 시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엠마는 내 생각과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머리 위로 증기가 피어오르는 환각이 비쳤다. 그녀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우물쭈물하던 그녀는, 곧 치마를 탁탁 치면서 의자에 앉았다. 다소곳이.

“……으, 응. 그래.”

그리고 엠마는 어쩐지 안절부절 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흘깃 나를 보았다가, 얼굴을 붉히며 다시 눈을 돌리기를 몇 번.

나는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는 엠마의 모습이 꽤 귀엽게 느껴졌다.

마침 엠마에게는 전할 물건이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서랍장에서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신중한 태도로 엠마가 앉은 자리 앞으로 주머니를 밀었다.

엠마의 눈이 의문을 담고 나를 향했다.

나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물약값이야.”

내 말에 엠마의 눈빛이 멍청해졌다. 그녀가 황급히 주머니 속을 둘러보았다. 얼핏 보기에도 금화가 많았다.

사실 지난번에 늑대 마수를 잡고 받은 포상금이었다. 그에 이것저것 더해 대략 150 골드쯤 될까.

솔직히 말해 더 넣고 싶었지만 아직 원숭이 마수와 마인을 쓰러트린 포상금이 지급되지 않았다. 살점 둥지를 발견하고 파괴한 대가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돈이 더 들어온다면 얼마든지 엠마에게 추가적인 보수를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엠마는 주머니 속의 금화를 세자마자, 이내 울상을 지으며 주머니를 탁, 하고 탁자 위로 내던졌다.

“너무 많잖아, 이안! 그리고 나는 돈 받을 생각 없어… 나, 나는 그저 너한테 도움이 되고 싶어서……!”

“엠마, 너는 가치 있는 사람이야.”

그렇게 말하는 내 말은 침착했다. 그래서 엠마는 더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울상을 지은 채 나를 바라보아야 했다.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아. 그러니까 네 수고를 무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어.”

“하지만, 나는 네게 목숨을 빚진…….”

“이번에는 네가 내 목숨을 구했고.”

나는 엠마가 떨군 주머니를 다시 주워, 조심스레 엠마의 손에 다시 쥐어주었다.

그녀의 연녹색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지금은 이것뿐이지만, 언젠가 빚을 갚을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많아.”

칭얼거림처럼 흘러나온 엠마의 목소리에,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럼 고용한 걸로 하자, 영구고용.”

그 말에 또 다시 엠마의 시선이 황급히 나를 피했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부끄러운 걸까.

여러모로 알 수 없지만, 그만큼 사랑스럽고 헌신적인 소녀였다.

결국, 그후 나는 며칠간 엠마가 준 영양식품과 죽을 먹으며 생활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나를 찾아온 사람은 엘시 선배였다.

마침 아카데미의 중앙대로를 걷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총총거리며 뛰어다니는 고깔모자가 눈에 띄었다.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가 이곳저곳을 다급히 살피는 중이었다.

그 표정은 무척이나 초조해 보였다. 사랑스러운 외모의 소녀가 그러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꽤 그림이 되었다.

나는 금세 그녀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엘시 라이넬라, 한때 아카데미에서 공포의 대상이었던 ‘꼬마 악당’.

내 손이 슬쩍 들렸다. 그러자 엘시 선배의 동그랗게 뜨인 눈이 나를 향했다.

나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엘시 선배.”

솔직히 말해 오랜만이라고 해봐야 실감이 나진 않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고 하니까, 그러려니 할 뿐.

그러나 엘시 선배의 시간은 제대로 흘러갔는지,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총총 뛰어 다가와 내 품에 안겼다.

감동적인 재회였다.

엘시 선배의 입이 열리지만 않았더라면 그랬을 터였다.

“……주인님!”

아니, 왜 그새 호칭이 달라져 있는 건데.

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고, 주위를 둘러보자 예상대로였다.

행인들의 부릅뜬 눈이 나와 엘시 선배를 향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걱정하던 문제가 터진 듯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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