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34화 (134/649)

〈 134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55)

* * *

“……주인님!”

엘시가 사내의 품을 파고들며 외친 그 한 마디에, 중앙대로의 온도가 급격히 싸늘해졌다.

그러지 않아도 행인들의 이목은 이안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새 소문이 퍼져나간 탓인지 수군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던 차였다.

수십에 이르는 마수들을 격살한 것도 놀라운 일인데, 몇 년 만에 등장한 마인까지 쓰러트린 아카데미 학생이었다.

화제가 되지 않는다면 이상했다. 이안에게 시선이 몰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한 마당에 엘시가 폭탄 발언을 터트린 셈이었다.

속닥거리던 소리가 일시에 멎었다. 단지 부릅떠진 수십 쌍의 눈만이, 그들이 느끼고 있을 경악을 전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엘시 라이넬라가 누구인가.

까탈스럽고 성격 나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여자였다. 패거리를 몰고 다니며 괴롭힌 학생들만 수십이고,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리면 폭언을 내뱉기 일쑤였다.

인형 같이 사랑스러운 외모와 달리 그 행적만큼은 시정잡배와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꼬마 악당’이라는 별명조차 붙지 않았던가.

그녀에게 원한을 품은 이들은 아카데미 내에서 수도 없이 많았다. 아직도 그 이름만 들려오면 이를 바득바득 가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엘시가 이안에게 패배하던 날, 아카데미 내에서는 꼴좋다는 반응이 주류였다.

지금껏 쌓아온 업보가 있는 그녀였다. 빌미만 주어진다면 물어뜯을 사람은 많았다.

심지어는 명분조차 밀렸다. 선배들이 무리를 지어 후배를 겁박하려다가, 도리어 후배에게 당해 망신살을 뻗치다니.

엘시가 엉엉 울며 목숨을 구걸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 소문은 살에 살을 덧붙여, 어느덧 엘시는 후배에게 겁을 집어먹고 오줌까지 싼 겁쟁이가 되어 있었다.

악의적인 소문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엘시가 과민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누구나 숨기고 있던 내면을 들키면 공격적인 반응을 보인다. 하물며 예전부터 그 잔혹성만큼은 인정받던 엘시였다. 그녀의 응징은 날이 갈수록 폭력적으로 변했다.

그러한 엘시의 폭주에 제동을 걸어준 사람이 바로 이안이었다.

수렵제를 위해 이안이 엘시를 차출한 이후, 그녀는 목줄 메인 개처럼 다소 얌전해졌다.

괜히 실랑이를 벌이다 이안에게 들키면 손도끼로 협박당하는 꼴을 만천하에 공개할 판이었다. 자존심 때문이라도 엘시는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수렵제의 우승을 차지한 이후, 엘시는 도리어 더욱 기고만장해졌으나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드물었다. 여전히 이안의 눈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카데미 재학생들은 키득거리며 그 꼴을 비웃고만 있었다.

그 엘시 라이넬라가 단 한 번의 패배로 후배한테 빌빌 기다니, 악명이 높았던 만큼 추락 또한 극적이었다.

하지만 오늘 엘시가 보여주는 모습은 그들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고작해야 2주 아닌가, 그 사이에 엘시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극적으로 얌전해졌다.

가끔 가다 누군가를 떠올리듯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애달픈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혹자는 그 마음을 눈치 채고 시시덕거리며 떠들기도 했다. 엘시 라이넬라에게 드디어 봄이 찾아왔노라고.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잔혹성과 오만함을 겸비한 그 ‘꼬마 악당’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니, 이는 한동안 마법학부 학생들의 입에서 작은 토론거리로 오르내릴 정도였다.

그토록 극적인 변화를 보여 왔던 엘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의 그 누구도 지금의 광경을 예상하지 못했다.

엘시는 이안의 품에 안겨 제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만약 그녀에게 꼬리가 달려 있었다면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을 터였다.

행복에 겨운 얼굴과, 애교 섞인 목소리까지.

중앙대로를 걷던 행인들에게 인지부조화가 찾아왔다.

떨리는 동공과, 떡 벌어진 입들.

저마다 반응은 달랐지만 그들의 표정은 한 가지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경악이었다.

심지어 엘시를 품에 안은 사내는, 이제 익숙한 일이라는 듯 한숨까지 내쉬는 중이었다.

“엘시 선배, 다들 보고 있잖아요…….”

그 말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듯, 엘시는 흠칫 놀라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리고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늘 그렇듯 인상을 팍 찌푸리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뭘 봐, 이씹새끼들아! 구경났냐? 이 엘시 라이넬라가몸소 눈깔에서 먹물 좀 짜줘, 응?”

엘시의 협박에 행인들은 그제야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직도 얼떨떨한 기색이었지만, 엘시가 보여주는 평소대로의 모습에 오히려 방금 전 보았던 광경이 착각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들은 엘시의 걸걸한 입담을 듣고 그제야 안심했다는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엘시 라이넬라가 후배한테 ‘주인님’이라고 부르며 애교를 떨다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속 편히 경험칙에 의거한 판단을 내리기로 했다.

그러나 행인들이 눈길을 돌리자마자, 엘시는 친애의 감정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이안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마치 칭찬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얼굴이었다.

“이, 이제 됐지?”

이안은 대답 대신 이마에 손을 탁, 하고 얹었다. 그가 곧 엘시의 손목을 붙잡고 골목으로 이동했다.

끌려가는 엘시는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이안은 엘시에게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엘시 선배, ‘이안 님’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주인님’은 또 뭐에요?”

“으, 응? 그, 그거?”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는지 엘시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었다. 파닥거리며 손부채질을 했지만 홍조를 식히기엔 무리였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변명을 내뱉었다.

“지, 지난번에 델핀 그년이랑 이상한 경쟁이 붙어서 무의식 중에 남아있었나? 아하하… 시, 신경 쓰지 마!”

“아니,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불러버리면…….”

이안이 난감한 기색을 보이자, 엘시는 주눅이 들어 고개를 푹 숙였다. 우물쭈물 하며 힐끔힐끔 이안의 눈치를 살피는 꼴이 조금 처량해 보였다.

결국 이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뱉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이 슬쩍 허리춤을 향했다.

손도끼를 쓰면 억지로 교정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새 엘시 선배와는 어느새 정이 들어 버렸다. 적어도 협박이 꺼려질 만큼은 그랬다.

위협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라면 몰라, 지금은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던 사내는, 허리춤으로 향하는 시선을 느끼자마자 몸을 덜덜 떨고 있던 소녀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이 이어졌다.

엘시의 몸에서 점차 떨림이 잦아들었다. 잠시 후, 그녀는 몽롱한 표정으로 헤실거리고 있었다.

마치 상을 받는 강아지와 같은 모습이었다.

이안은 상반신을 살짝 숙여, 엘시에게 속삭였다.

“엘시 선배, 앞으로도 제 말 잘 들을 거죠?”

“네, 네헷… 에헤…….”

“그럼, 앞으로는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곤란해지잖아요, 저도 그렇지만 특히 선배가.”

이안이 무슨 말을 하든 엘시는 충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머리가 쓰다듬어지는 감촉을 실컷 만끽하고 있는 듯했다.

사내의 시선이 떨떠름해졌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그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딱히 잘못한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해야 숫자를 앞세워 겁박하길래, 손도끼로 조금 후려친 정도가 아닌가?

세상일은 정말 알 수 없었다.

이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기껏 예쁜 얼굴을 타고났는데, 신세 망칠 필요는 없잖아요. 괜히 외간남자를 그렇게 졸졸 따라다니다간 가문에서도 싫어할 텐데.”

인사치레와 같은 말이었다. 최소한 이안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던진 의례적인 칭찬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엘시는,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머리를 쓰다듬어지는 와중에 헤롱거리는 표정을 짓지 않는 건 오랜만이었다.

“……으, 응? 나, 나 이쁘다고?”

당황해서 더듬거리는 목소리에, 이안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엘시를 바라보았다.

“예쁘잖아요, 객관적으로…왜요?”

그러자 엘시는 다시 볼에 홍조를 띄우더니, 고개를 숙인 채 머뭇거렸다.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그녀의 가슴에 이는 파문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한참이나 그러고 있던 엘시는, 곧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 그렇구나… 나 이쁘구나… 그, 그럼 난이만 가볼게!”

그리고 어색한 걸음걸이로 떠나는 엘시를 보며, 이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여전히 행동원리를 알 수 없는 선배라고 생각하면서.

**

결국 아는 사람들을 만나고 만나다 보니, 밤이 돼서야 내 걸음은 델핀 선배의 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델핀 선배를 찾아가는 까닭은 하나뿐이었다.

오직 델핀 선배만이 나를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날 살점 둥지에게 던진 검을 비롯해 여러모로 논의해야 할 사항이 남아있었던지라, 나는 그녀를 만나고자 이곳에 왔다.

아이달로스 관.

위대한 정복 황제의 이름을 하사받은 기숙사였다.

이 으리으리한 건물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부와 권력, 실력 모두가 필요했다.

하나라도 가지기 어려운 것들이었으나, 때때로 세상에는 그 모든 것을 갖춘 인간이 나타나기도 하는 법이었다.

바로 델핀 선배가 그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명문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로서 부와 권력을 틀어쥐고 있으며, 대륙의 날고기는 인재들을 긁어모은 아카데미에서도 돋보이는 실력자가 바로 그녀였다.

아이달로스 관에 입주할 자격은 충분했다.

나로서는 벌써 두 번째 방문이었다. 과거에 델핀 선배를 만나러 이곳을 찾아온 적이 있었으니까.

그때와 마찬가지로 아이달로스 관의 입구에는 사용인이 서 있었다.

델피 선배를 찾아왔다는 용건을 전하자, 사용인은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 유르디나 님께서는 모든 만남을 거부하고 계셔서요.”

아무래도 또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턱을 쥐고 고민에 잠겨 있던 나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일단 문 앞까지만 안내해 주세요.”

사용인은 난감한 표정이었지만, 내가 몇 번 더 밀어붙이니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앞장을 설 수밖에 없었다.

최근 아카데미 내에서 내 명성은 하늘을 찌르는 중이었다.

수렵제에서 우승을 거머쥐었을 뿐만 아니라, 처절한 사투 끝에 마인을 쓰러트리고 신화 속의 괴물을 사냥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아카데미에서는 실력이 전부였다.

다시 말해, 제 아무리 아이달로스 관의 사용인이라도 내 말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대략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대우는 상상도 못했는데, 여러모로 실감이 나지 않기도 했다.

그러한 생각과 함께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덧 나는 델핀 선배의 방 앞에 도착해 있었다.

사용인은 아직도 다소 불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럴 필요 없다는 뜻으로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연이어 똑똑 문을 두드리는 내 손과, 나지막한 음성을 토해내는 입술.

“델핀 선배, 저에요. 들어갑니다?”

그러나 한참 동안이나 방 안에서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들려오는 목소리라고는, 옅은 거절의 말뿐이었다.

“……혼자 있고 싶어.”

자그마한 음성이었지만, 문 너머에서도 그 뜻을 알아들을 만큼은 또렷했다.

사용인의 차게 식은 눈길이 나를 향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이었다. 괜히 안내했다는 힐난의 감정도 엿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또 다시 걱정 말라는 듯,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콰드득, 하고 벼락같이 뽑혀 나온 손도끼가 문짝을 깨부수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손잡이를 고정할 힘을 잃은 문이 삐걱이며 열리기 시작했다. 차마 말릴 틈도 없는 고속의 연계동작이었다.

사용인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입이 뻐금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가 무어라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나는 안심하라는 듯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델핀 선배랑 친한 사이니까… 그리고 수리비는 델핀 선배가 내줄 테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마도.”

그러면서 나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인사를 대신했다.

그렇게 곧장 델핀 선배의 방으로 들어서려는 나를 보는 사용인은, 그래.

별 미친놈을 다 본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슬프게도, 이제는 익숙해진 취급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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