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56)
* * *
사용인이 어처구니가 없어 그 자리에 얼어붙은 사이, 나는 곧장 델핀 선배의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간은 야밤이었다. 드넓은 창에서는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빛을 받으며, 있다. 찬란한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
마치 금실로 짠 듯 화려한 색채를 자랑하는 머리카락이었다. 그리고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는 홍옥을 닮은 눈동자, 유르디나 가문의 상징과도 같은 색이었다.
그녀는 창틀에 앉아 말없이 밤의 풍광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흐릿한 조명이 도리어 그녀의 희고 매끈한 피부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예전에 보았던 복장 그대로였다.
새하얀 나신을 가리는 얇은 가운, 그 뇌쇄적인 몸의 굴곡이 남김없이 드러나는 차림이었다.
다시 보아도 한창 때의 남성에게는 자극이 너무 강한 의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델핀 선배에게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델핀 선배.”
여인의 시선이 서서히 나를 향했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잠시 침묵.
잠시 시간이 정지한 듯했다.
그 속에서 델핀 선배의 동공이 점차 확장되더니, 그녀의 입술이 떨어졌다 붙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윽고, 터져 나오는 여성스러운 비명.
“꺄, 꺄아아아아악! 어, 어떻게 들어온 거야?!”
델핀 선배는 그렇게 말하며 황급히 옷매무새를 여몄다. 주춤주춤 물러나는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숨길 수 없는 공포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엄살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문짝 부수고 들어왔는데요, 애초에 들어온다고 말했잖습니까.”
“호, 혼자 있고 싶댔잖아!”
“들어온다고 했지, 허락이 필요하다는 말은 안 했는데요?”
무척이나 뻔뻔한 말이었다.
델핀 선배는 울컥한 듯 입을 열었지만, 그보다 내 행동이 더 빨랐다.
내 눈이 탁자를 발견했다. 예전에 델핀 선배와 마주앉았던 곳이었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 의자를 빼고 델핀 선배의 맞은편이 될 자리에 앉았다.
탁자 위에는 술잔이 하나 올라와 있었다. 아마 델핀 선배가 준비해둔 물건인 듯했다.
나는 여유로운 자세로 그 잔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고급품이었다. 과연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 쓸 만한 잔이었다.
그리고 나는 멍청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델핀 선배에게,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
“……술이나 한 잔 할까요?”
그 제안을 들은 델핀 선배는, 방에 들어서기 직전에 보았던 사용인과 똑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보았던 눈빛.
나는 굳이 그 의도를 읽어내지는 않기로 했다.
**
델핀 유르디나는 이안 페르쿠스가 두려웠다.
그녀의 몸에 셀 수 없는 상처와 모욕을 새겨준 남자였다.
그의 앞에만 서면 오금이 저렸고, 손도끼라도 꺼내드는 날에는 도도하던 그녀의 눈동자에 공포가 서렸다.
그녀가 이안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은 이토록 명백했다.
그럼에도 델핀에게는 아주 약간의 자존심이 남아있었다.
이안을 이길 수는 없어도, 적어도 도움은 될 수 있다는 자신감.
엘시와 다툼을 벌일 때도 델핀은 그녀가 엘시보다 도움이 되리란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무리 한 번 패배했다 하더라도 그녀는 유르디나 가문의 적통, 북부를 지키는 금사자였으니까.
그 과정에서 하녀니, 애완동물이니 조금 웃기는 꼴을 보였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델핀에게 남은 자존심이란 그런 것밖에 없었다. 추해지더라도 어떻게든 붙들고 매달려야만 했다.
하지만 고아원에서 있었던 전투는, 델핀의 마지막 남은 한 줌의 자존감마저 앗아 가기에 충분했다.
처음에는 도움이 꽤 되나 싶었다.
원숭이 마수들을 토벌할 때, 델핀의 활약은 유독 눈에 띄었다. 이안과 함께 방진의 핵심을 구성했으니까.
그러나 동굴에 들어서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살점 씨앗과의 첫 번째 전투가 그랬다.
홀로 살점 씨앗과 대적하기로 한 이안이 한참이 지나지 않자, 걱정이 된 일행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금빛 눈동자를 가진 사내를.
그 후 그가 달려드는 살점 씨앗들을 상대로 보여준 무위는 압도적이었다.
살점 씨앗들이 그에게 다가오는 족족 피와 뇌수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조금의 거리낌도 없는 폭력이 선혈에 젖은 풍경을 압도했다.
여섯 마리, 상대하기 까다롭기 그지없는 괴물들이 그렇게 파리 목숨처럼 죽어나갈 때까지는 몇 분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마지막 한 마리에 달려들어 미친듯이 도끼를 휘두르는 이안을 보면서, 델핀은 다시금 그녀의 뇌리 깊숙이 새겨진 공포를 떠올렸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당장이라도 주저앉아 비명을 내지르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구토라도 할 듯한 그 느낌, 뇌와 살점이 곤죽이 되어 튀기는 광경을 보며 확신했다.
반항하면 안 된다.
이 사내에게는, 정도라는 것이 없었다. 또 다시 이안에게 반항하려 들었다간 피와 살점이 뒤섞여 질척한 수프가 되어버린 저 자리에 그녀가 있을지도 몰랐다.
비틀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바로 잡으며, 델핀은 두려움에 가득 찬 시선으로 이안의 폭력을 시야에 똑똑히 새겼다.
절대로, 절대로 반항하지 않으리라.
그녀는 몇 번이고 반복한 각오를 더욱 굳건히 했다.
그 다음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델핀이 원숭이 마수들을 견제하는 사이, 이안은 단독으로 마인의 머리를 따냈다.
마지막 살점 둥지를 격퇴하러 갔을 때는 아예 짐덩이가 되기도 했다.
무심코 발목을 물려, 이안이 엘시의 화력 지원조차 받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흔들림 없이 나아가던 그 모습.
강인했다. 등골에 찌릿한 전류가 흐를 지경이었다.
아무리 강한 승부욕을 지니고 있는 델핀이라도 치명상을 입고 전투를 속행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내는 죽음을 앞둔 최후의 순간까지 승리의 방책을 짜냈다.
결국 그는 승리했다.
팔다리를 물어뜯기고, 등에서 중독되어 검붉은 피를 뚝뚝 흘리면서, 핏물과 내장을 울컥울컥 토해내며 그는 승리를 쟁취했다.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저러한 인간을 어떻게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델핀은 그날 이후 방에 틀어박혀 종일 우울한 기분을 곱씹었다.
약해빠졌다, 그녀 자신이.
난생 처음으로 겪는 감정이 가슴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열등감과 질투심, 그 추레한 감정 속에서 델핀의 우울증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그러던 오늘 느닷없이 이안이 찾아온 것이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는, 곧 이안의 제안을 물리는 수밖에 없었다.
도무지 이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추악한 감정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델핀은 너무나 무서워 방 안으로 숨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델핀은 수치심으로 부들부들 떨면서, 마치 시중을 드는 하녀라도 되는 심정으로 이안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이안은 코를 킁킁거리며 향긋한 주향을 음미했다.
“……음, 훌륭하네요.”
당연하지, 당신 1년 용돈을 모아도 살 수 없는 술인데.
델핀은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녀가 감히 이안에게 반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고개를 푹 숙이면서 이안의 맞은편에 앉았을 뿐.
그녀는 힘없이 포도주를 홀짝였다.
연하의 남성에게 꼼짝도 못하는 제 꼴이 한심했다. 그녀는 그러면서 흘깃흘깃 이안의 눈치를 살피며 옷매무새를 여몄다.
그 경계심 가득한 눈빛에, 이안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머금었다.
“그 전에는 그렇게 당당하더니, 지금은 왜 그래요?”
그 말을 들은 델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때는 이안이 무슨 짓을 해도 제압할 자신이 있었지만, 지금 델핀은 이안에게 승리를 따낼 자신이 없었다.
오히려 그가 손도끼라도 꺼내서 협박하면 말하는 대로 따라야 할 터였다.
지금도 보라, 이안의 한 마디에 아무 말도 못하고 그의 잔에 술을 따르는 모습을.
만약 이안이 옷을 벗으라고 한다면 벗을지도 몰랐다.
아니, 손도끼를 들고 명령한다면 확실했다.
델핀은 옷을 벗을 것이다. 심지어 그 이상의 일을 요구하더라도 반항할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강자를 앞에 둔 약자의 설움이었다.
처음에 이안과 마주앉았을 때와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다만 그 사실을 당사자 앞에서 인정하기는 차마 버거워서, 델핀은 어깨만 잘게 떨 뿐 입을 열지는 못했다.
그러든 말든, 이안은 포도주를 홀짝일 뿐이었다. 애초에 델핀의 대답 따위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태도였다.
그는 담백한 목소리로 물었다.
“요즘 방에만 틀어박혀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누구 때문인데, 델핀은 앙칼진 눈빛을 이안에게 보내려다 그 금빛 눈동자를 마주하고 말았다.
곧바로 기가 죽었다.
슬쩍 눈을 내리깔고, 델핀은 지금 짜낼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심을 발휘해 말했다.
“다, 당신이랑 상관없잖아… 요.”
그러다가 은근슬쩍 이안의 눈치를 살피며 존댓말을 덧붙이는 제 신세가 처량했다.
델핀이 더욱 우울한 낯빛이 되자, 이안은 그도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그렇긴 하죠. 뭐, 방구석에 처박히는 것도 델핀 선배의 자유니까.”
비웃으러 왔나?
그러한 생각이 들어, 델핀의 눈빛이 불퉁해졌다.
내심 품고 있던 열등감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는 강하고 승자니까, 약하고 패자인 델핀을 놀리러 왔을지도 몰랐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굴종하는 그녀를 보고 희열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지.
설령 그렇다고 해도 델핀은 더는 이안에게 반항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분함을 곱씹으며, 고개를 푹 숙였을 뿐.
델핀이 이안 몰래 입술을 짓씹고 있던 그때, 사내가 나지막이 여인을 불렀다.
“……델핀 선배.”
탁, 하고 식탁 위로 내려지는 술잔.
델핀은 일부러 이안의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럴 자신이 없었으니까.
조롱, 경멸, 그리고 그러한 눈빛을 마주하며 그녀가 느껴야 할 열패감.
모든 것이 두렵고 싫었다. 이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다음으로 이안이 내뱉은 말은, 그녀의 상상과 달라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러 왔어요.”
델핀의 눈이, 멍하니 들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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