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36화 (136/649)

〈 136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57)

* * *

“고맙다는 말을 전하러 왔어요.”

이안이 내뱉은 한 마디에, 델핀의 눈이 멍하니 들려졌다.

이마저도 조롱인가? 하지만 그렇게 마주한 이안의 눈빛은, 진중하기 그지없었다.

진심이었다.

명문가의 후계자 교육을 받으며 수많은 인간을 봐왔던 그녀였다. 그 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이 있었다.

하지만, 도대체 왜?

그녀도 역할을 하긴 했지만, 보조에 불과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짐더미에 불과했다.

모든 고통과 상처를 받으며 승리를 가져온 것은 이안이었다.

그에게서 그녀가 감사를 들을 일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서 델핀의 눈빛이 멍청해졌다.

“저를 믿고 따라와 줘서 고마워요. 델핀 선배가 없다면 이기지 못했을 거예요, 특히 마지막에 제 말만 듣고 검을 던져주기도 했고.”

델핀의 뇌리가 새하얘졌다.

그야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를 믿고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델핀은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야 했으니까. 그럼에도 이안은 진심으로 그녀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었다.

더듬거리며, 그녀의 입술이 떼어졌다.

“나, 나는 그저 네 지시를 따랐을 뿐이고…….”

“네, 그래서 이겼죠.”

그러면서 이안은 흐, 하고 옅은 웃음을 터트렸다.

별 말을 다한다는 듯이.

“우리의 승리에요, 델핀 선배. 약속했잖아요?”

‘우리의 승리’라니, 누가 봐도 이안이 홀로 이루어낸 성과가 아닌가.

하지만 이안은 단숨에 델핀을 승자로 만들어버렸다.

그녀가 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이안의 옆에 있었고, 그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었다.

두근, 하고 델핀의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마치 활력을 잃고 있던 혈액이 다시금 맥동하는 감각이었다. 일순 델핀의 호흡이 살짝 거칠어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지독히도 그녀를 괴롭히던 열등감과 열패감이 녹아내렸다.

그래, 어차피 이안은 그녀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발상을 역전시켜야 했다. 그녀는 승자여야 했으니까.

델핀은 어느 날 밤 이안과 맺었던 약속을 떠올렸다.

“이기게 해주겠다고… 이제 좀 믿음이 갑니까?”

입을 열었다, 닫는다.

델핀의 목에서는 언어가 뱉어지지 않았다. 번뜩이는 깨달음의 전류가 그녀의 척추를 타고 찌르르 뇌리를 울리고 있었다.

이안은 델핀을 이기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 말을 지켰다.

델핀은 아무것도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단지 이안의 곁에 서서, 이안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델핀은 승자가 될 수 있었다.

이토록 간단하지 않은가.

델핀의 침묵을 무슨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이안은 여전히 옅은 미소를 머금은 체 농이라도 되는 양 말소리를 던지는 중이었다.

“그때 약속했죠? 이기게 해주면 앞으로도 제 말 들어주겠다고.”

델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희열이었다.

그렇구나, 나는 저 사내의 말만 들으면 되는구나.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 없었다. 그가 짖으라면 짖고, 재롱을 피우라면 피우면 끝이었다.

그러면 델핀은 승자로 남을 수 있다.

물론 그녀도 무언가를 하긴 해야겠지, 그럼에도 그 아픔과 고뇌는 이안이 짊어진 짐에 비하자면 하잘 것 없는 것에 불과했다.

그가 증명하지 않았던가.

선두에 서서, 죽음을 문턱을 목전에 둘 때까지 그는 모든 상처를 감내했다.

델핀은 이제야 엘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앙큼한 것, 너는 이미 알고 있었구나.

이토록 단순하고 명쾌한 진리를 말이다.

델핀의 핏빛 눈동자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일생 동안 단련해 온 그녀의 정신이 뿌리부터 물들어 가고 있었다.

마치 물감에 닿은 얇은 종이처럼.

“그러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그 말을 전하고 싶었어요, 델핀 선배.”

쑥스러운 듯 내뱉어지는 그 말에, 델핀은 울컥 솟아오르는 눈물을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그녀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단지 그의 옆에 있었을 뿐인데, 그의 명령에 순종했을 뿐인데도 사내는 여인에게 아낌없는 상찬의 말을 베풀어 주고 있었다.

이 어찌나, 얼마나.

자비로우신지.

상급자에게 인정받는 강렬한 쾌감에 델핀의 몸이 덜덜 떨렸다. 짜릿한 벼락이 그녀의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듯했다.

무심코 허벅지 사이를 오므릴 만큼 선연한 기쁨이었다.

그제야 델핀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안 페르쿠스는 델핀 유르디나의 주인님이다.

승리를 가져다주신다. 고민도 고통도 모두 짊어져 주신다.

델핀은 당장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고 싶었다. 엎드려도 좋았다.

지금 이 황홀한 감각을 어떻게든 보여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러나 그러기에는 이안의 표정이 너무나 따스하게 느껴져서, 델핀은 조금만 참아보기로 했다.

대신 그녀는 먹먹한 목소리로 대답할 뿐이었다.

“네, 네… 알겠습니다.”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온 목소리였다.

마치 노예가 제 주인의 발끝에 입 맞추듯, 순종심으로 가득 찬 목소리였다.

그 음성에 어린 옅은 물기에, 이안은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델핀 선배가 마음고생이 심했나 보다 싶은 얼굴이었다.

그가 델핀의 진심을 깨달을 날은 머지않을지 모르겠으나, 최소한 지금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원하는 것이라도 있어요? 최대한 델핀 선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이안은 당연히 마인을 토벌한 포상 분배를 염두에 두고 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의 델핀에게는, 그 말이 전혀 다른 문제를 다루는 듯 느껴졌다.

상이구나, 델핀의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떠올랐다.

엘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처럼, 말을 잘 듣는 하인에게 포상을 내려주겠다는 뜻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델핀은, 살짝 볼을 붉혔다.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그, 그러면…….”

꿀꺽, 하고 델핀이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안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차마 이안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살짝 시선을 내리깔면서 말했다.

“……버, 벌.”

“네?”

고개를 갸웃하며 재차 던져진 질문에, 델핀은 살짝 달뜬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녀의 핏빛 눈동자가 요사스러운 빛을 뿜고 있었다.

“벌을, 주세요. 주인님…….”

그제야 이안의 낯빛이 빠르게 굳어갔다.

무언가 일이 잘못 풀렸음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사태는 이미 늦은 뒤였다.

사내의 손이 절로 제 이마를 향했다.

이안에게 난데없이 두 번째 노예가 생긴 날이었다.

**

또 다시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이안은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고아원에서 있었던 일이 알려진 이후로 그에게 접근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각국의 고위 관료는 물론이고, 제국의 5대 명문가의 자제들까지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드문 일은 아니었다.

지난 천 년 동안 아카데미는 대륙 제일의 인재를 길러내는 산실이었고, 따라서 눈에 띄는 인재가 있다면 영입경쟁을 벌이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답변을 보류했다.

당장 다음날 편지가 도착하면 어디로 떠나야 할지도 모르는 부평초 같은 인생이었다. 세계를 구해야 한다는 분에 넘치는 사명을 짊어진 나는, 한동안 거처를 정할 생각이 없었다.

언젠가 정하긴 해야겠지.

그러나 그때가 지금은 아니었다. 아마도 세계를 구하고 난 뒤의 일이 아닐까.

다행스러운 것은, 두 번째 편지에 나온 사건을 극복한 시점에서 어느 정도 암흑교단의 꼬리를 잡을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암흑사제 미트람.

그가 고아들과 행인을 납치해 살점 둥지를 만드는 일에 관여하고 있었다.

내가 암흑교단과 그들이 추종하는 델피렘을 적대하는 한, 앞으로 언젠가는 마주치게 되리라.

그들의 음모를 모조리 파괴하는 날, 비로소 내 어깨에 얹어진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을 터였다.

사실 그 점에 대해서는 별다른 걱정이 없었다.

세계 멸망이라니, 살점 둥지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을 목격하긴 했지만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 경고였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아서 오히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요즘 내 걱정거리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델핀 선배와 엘시 선배가 내 하인을 자처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이든 따르길래, 나는 너무 궁금해서 이러한 황당한 지시까지 내려본 적이 있었다.

“둘 다 무릎 꿇고 제 발에 입을 맞추세요.”

그러자 델핀 선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무릎을 꿇었다. 엘시 선배는 조금 망설이는 듯하다가, 델핀 선배의 서슴없는 행동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곧바로 그녀의 무릎이 땅바닥에 닿았다.

물론 그 둘이 내 발에 입을 맞추기 전에, 나는 기겁해서 뒤로 물러났다.

“아니, 그걸 시킨다고 진짜 해요?! 둘 다 자존심도 없습니까?!”

그러나 델핀 선배와 엘시 선배는 의아한 눈빛을 내게 보낼 뿐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한 그 시선에,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한숨을 내쉬는 수밖에 없었다.

졸지에 명문가의 자제 두 명의 복종을 얻어낸 셈이었다.

물론 기쁘지는 않았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부담스러웠다.

배경도, 외모도, 실력도 남부럽지 않은 두 여인이 왜 내게 이토록 집착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여인의 마음은 아직도 내게 미지의 영역에 속했다.

그 외에 이상한 점이 또 하나 있다면, 요즘 유독 성녀와 마주치는 일이 많다는 점이었다.

“……흥, 어쩌다 보니 또 만났네요.”

성녀는 새침한 체를 하며 그렇게 말했다. 팔 하나로 제 가슴을 받치고 있는 탓에, 그러지 않아도 존재감 넘치는 흉부 굴곡이 더욱 강조됐다.

그녀는 그야말로 우연이라는 듯, 나머지 한 손을 팔랑이며 말했다.

“짜증나긴 하지만, 우연도 이만큼 반복되니 조금 지치네요. 마치 천신께서 이어주신 듯…….”

“강의가 있어서, 저는 이만.”

내가 그러한 말과 함께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면, 성녀는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외치곤 했다.

“……다, 다음 강의 없잖아요!”

내 의문을 담은 눈빛이 성녀를 향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냐는 무언의 추궁이었다.

그러면 성녀는 크흠, 흠, 하고 귀여운 헛기침을 하며 어떻게든 벌개진 제 얼굴을 가라앉히려 노력하곤 했다. 팔락팔락 손부채질을 하면서 말이다.

“유, 유렌이 말해줬어요. 우, 워낙 기억력이 좋다 보니, 쓸데없는 내용까지 기억하네요.”

그 외에는 별 다를 바 없는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졌다.

적어도 그날 아침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오랜만에 홀로 술을 마시다 흥이 올라 잔뜩 취해버린 나는, 어떻게 잠자리에 들었는지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다.

그리고 다음날이 찾아왔다.

아니, ‘그날’이었다. 이미 시간은 너무 많이 지나간 뒤였으니까.

깨질 것만 같은 두통, 기묘할 정도로 생생한 꿈.

나는 이제 익숙하다는 듯 갈증으로 타는 목을 수통의 물로 달랬다.

그리고 말없이 침대 머리맡 옆에 위치한 탁자로 눈길을 옮겼다.

예상대로였다.

넘어가 있는 달력, 고풍스러운 편지봉투 하나.

나는 메마른 손으로 얼굴을 훑는 수밖에 없었다.

“……씨발.”

좋은 시절은 언제나 짧은 법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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