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37화 (137/649)

〈 137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1)

* * *

침전한 기억들이 파편처럼 떠오른다. 새하얀 빛으로 지어 올리는 어떤 사내의 기억.

들녘에는 꽃이 피지 않았다. 쓸쓸한 봄이었다.

대륙의 서안은 사시사철 흐르는 한류 때문에 강수량이 적어 사막 지대가 많았다.

그나마 봄이 오면 강한 서풍을 타고 몰려든 비구름이 잠깐 비를 뿌리고 지나가는데, 서부에서 꽃을 볼 수 있는 시기는 이때가 유일했다.

하지만 사내의 기억 속에서 서부는 봄이 왔는데도 황량할 뿐이었다.

히히힝, 말이 우는 소리가 구슬프게 정적에 잠긴 진지를 울렸다. 어김없이 들어선 천막들이 이곳조차 전장이 되었음을 증언하고 있었다.

사내가 말없이 땅에 내려섰다. 길을 지나는 병사들마다 무기력한 얼굴이었다.

때때로 들려오는 소리는 한탄과도 같은 조롱 정도밖에 없었다.

“까마귀들이잖아?”

“야, 야… 조용히 해. 우리 같은 평민들이 함부로 욕할 상대가 아니야.”

이제는 익숙한 취급이었다.

사내의 뒤로 시립한 이들 중 하나가 울컥한 표정을 지으며 나서려 했지만, 사내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사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키득거리며 사내를 비웃던 병사들은, 그 행동에 움찔해서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뒤에서 으득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으나 사내의 입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다만 그는 걷고 걸어 유독 화려한 천막 앞에 멈췄다.

백색의 천막은 사막 지대에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잡티 하나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 수놓아진 고풍스러운 금실.

제국 황실의 상징이었다.

사내는 용머리를 본뜬 문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히 천막 앞으로 들어섰다.

그 주위를 지키고 선 기사들에게서는 아무런 제지조차 없었다. 마치 그가 아무런 허락도 없이 천막에 들어서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천막 안에서는 수많은 서류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마치 수십 마리의 하얀 새들이 날갯짓을 하는 것만 같았다. 그 종이의 새들이 비행하는 한가운데, 여인이 보였다.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고개를 돌린 순간 사내의 무릎이 저절로 굽혀졌다. 이내 목소리를 내려던 그는,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멈칫하고 말았다.

“……밀월여행은 즐거웠나요?”

사내는 잠시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결국 그는 준비하고 있던 인사의 말 대신, 한숨 섞인 대답을 내놓아야 했다.

“저와 그녀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곧 그렇게 되겠죠, 들려오는 소문이 그래요.”

딱, 하고 여인이 손가락을 퉁기자 하늘을 날던 서류들이 일제히 책상 위로 켜켜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몸을 의자 등받이에 파묻었다.

짓궂은 미소가 인상 깊었다. 사내는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그 시선을 피했다.

“후후, 재미있네요. 대마녀의 제자가 흩뿌리고 다니는 염문설이라…….”

“엄밀히 말해, 제자는 아닙니다. 그리고 염문설의 대부분은 사실이 아니고요.”

“알고 있어요, 그중 일부는 제가 뿌리고 있으니까.”

그 말에 사내의 표정이 살짝 무너질 뻔했다. 그가 멍하니 여인을 올려다보자, 그녀는 종잡을 수 없는 미소를 지은 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툭툭, 하고 무릎 꿇은 사내의 어깨를 두드리며 한 마디.

“너무 티내고 다니지는 마세요. 나, 질투심이 많으니까.”

그럼, 걸을까요.

이어지는 제안에 사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여인의 손을 마주잡았다.

오후의 태양은 뜨거웠고 후끈한 열기가 흙바닥을 달구고 있었다. 더위에 허덕일 만도 한데도 사내와 여인의 숨소리를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전장을 앞두었다.

사내의 움직임이 흠칫 굳었다. 얼어붙는 눈동자가 지평선 너머를 응시했다.

“……어때요?”

여인의 말에, 사내의 입술이 열리다 닫혔다.

그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저 너머에 자리 잡은 거대한 짐승의 그림자가 이 머나먼 거리에서도 확연히 눈에 띄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그 거체가 부풀었다 가라앉는 모습까지 보일 정도였다. 저만한 크기라면 최소 수십 미터에 달하는 괴물이었다.

“얼마 전 황실이 보관하고 있던 신물을 희생해서 움직임을 묶어두는 데 성공했어요. 적어도 한 달 동안은 저러고 있겠죠.”

“……얼마나.”

더듬거리며 뱉어진 질문에, 의아하다는 듯 여인의 얼굴이 사내를 향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습니까? 저 괴물이 풀려난다면.”

그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공포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평선을 뒤덮은 저 그림자를 본다면, 그 누구라도.

여인만이 흐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애써 태연한 척을 했을 뿐이었다.

“버틸 수 없어요.”

군더더기 없는 담백한 진술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그 절망감이 와 닿았다. 사내의 입이 곧장 다물어졌다.

“제 눈에, 그만한 가치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설마 저 무시무시한 신화 속 존재를 불러내다니…….”

무심코 사내는 쓴웃음을 짓는 여인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영영 뜰 수 없겠지.

“경, 이제 시간이 없어요.”

누구에게, 라는 말은 불필요했다.

어차피 돌아올 대답은 뻔했으니까.

모두에게 시간이 없었다. 인류에게 남은 시간을 경각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시종일관 여유롭던 여인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 것은 그때였다.

“……델피렘이 오고 있습니다.”

사내는 입을 다문 채 그저 지평선 너머의 그림자를 응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햇빛이 가라앉으며 사내의 금빛 눈동자에 그늘을 드리웠다.

암울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

이내 허억, 하고 거친 숨소리가 내 몽롱한 정신을 일깨웠다.

내가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였다. 타는 듯한 갈증에 더듬거리는 손길이 머리맡의 탁자 위를 훑었다.

묵직한 무언가가 붙잡히는 감각이 손에 익었다. 나는 곧장 수통의 뚜껑을 열고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점차 정신이 되돌아왔다. 이제는 다소 익숙한 풍경이었다.

넘어가 있는 달력,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은 고풍스러운 편지 봉투.

나는 욕지거리를 한 번 내뱉고는, 조심스레 편지봉투를 살펴보았다.

지금껏 도착했던 그 어떤 편지봉투보다 고급스러운 재질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이 편지 봉투의 봉인을 뜯었다.

내 눈동자가 줄글을 훑어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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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사랑하는, 나의 이안 페르쿠스에게

행복한 미래를 약속해야 할 이 시기에, 과거를 이야기하는 이 못난 연인을 용서하세요.

오늘은 달이 유독 차서 당신 생각이 간절합니다. 철없던 어린 시절의 부끄러움을 뒤로 하고, 이처럼 펜을 잡은 것도 그 탓입니다.

수많은 기억들이 파도처럼 제 시간을 때리고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날의 추억은 제 인생의 이정표가 되었지만, 당신에게는 여전히 불쾌한 시간으로 남아있을까 저어되네요.

다시 한 번 당신이 겪어야 했던 아픈 기억에 대해 깊이 사죄드립니다.

모두를 위해 오해와 아픔을 감내해야 했던 당신의 심정을 제가 어찌 감히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그날 이후 단 하루도 그때의 일을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당신이 저를 위해 그랬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에는 더더욱.

그날 싹튼 감정이 저를 괴롭히더군요. 일생에 단 한 번 찾아온 친애의 마음이 심장을 녹일 듯이 제 가슴을 삐걱거리게 만들었습니다.

고백하자면, 매일 밤 울었습니다.

조금 더 좋은 첫 만남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첫사랑이란 그토록 무서운 감정입니다. 당신 곁의 여자들이 전부 여우처럼 보이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지은 죄가 있다는 생각에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습니다.

처음이었어요.

마수들이 행렬을 습격했을 때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끝내는 암흑사제의 함정에 빠지기도 했죠.

하지만 마지막 순간 당신이 토굴에 들어왔을 때, 제 인생에는 비로소 색채가 생겨났습니다.

그날 당신의 품에서 생각했어요. 남은 평생을 이 남자에게 속죄하며 살아야겠다고.

그래서 얼마 전부터는 요리를 배우고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당신과 결혼하면 이곳저곳을 옮겨 가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때로는 하인 없이 지내야 할 수도 있겠죠.

남편을 내조하는 것은 아내의 책무이자 권리입니다. 무엇보다 당신이 기뻐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은 인생의 반쪽을 만드는 과정이라는데, 왜 제게는 당신이 제 인생의 전부처럼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덧 밤이 깊었습니다. 쓰고 싶은 말이 많지만 이만 펜을 내려두려 합니다.

다시 한 번 제 눈을 지켜주어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사랑해요, 이안.

내일도 당신을 마주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추신 1: 최근 대륙 서단으로 발령받은 인사에 대한 뜬소문이 도는데, 이는 전부 사실이 아닙니다. 물론 그녀가 거슬리긴 하지만, 언제나 객관적인 근거에 의거해서 그녀가 아란코트를 수호하는 데 적합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질투는 아니에요, 절대로.

추신 2: 성국에서 최근 파발이 오고 있는데 다소 걱정이 됩니다. 이안, 당신은 제국의 기둥이고 상대도 성국의 최고위 인사입니다. 타국과 내통한다는 혐의를 받을 수도 있어요. 다시 말하지만, 질투는 아니에요. 절대로.

From. 당신 생각으로 밤을 지새우며,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제국력 571년 지팡이의 달 첫 번째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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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잠자코 편지를 읽고 있던 나는, 곧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전히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편지였다.

행렬? 마수의 습격? 그리고 암흑사제?

또 ‘눈’은 무슨 소리란 말인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 보니, 얼핏 꿈에서 ‘눈’에 대해 들어본 것 같다는 감상이 스치기도 했다.

나는 일단 편지지의 뒷면을 살펴보았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있었다.

편지의 글과 전혀 다른 필체로 휘갈겨 쓴 글자들.

‘용의 눈을 가진 자는 인간의 마음을 모른다.’

멀거니 그 문장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곧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품에 넣었다.

우선 마음에 걸리는 내용부터 파악해야 했다.

내가 겪어야 했던 ‘아픈 기억’에 대해 사과하고 싶다고?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일단 나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러던 나는 문득, 문 밑의 틈새로 새어 들어온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반으로 접힌 종이였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 아무 생각 없이 종이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종이를 펼친 그 순간.

화륵, 하고 불길이 일었다. 나는 깜짝 놀라 곧바로 종이를 내던지고 뒷걸음질을 쳤다.

순간적이지만 화력이 무척 강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화상을 입었을 터였다.

아무리 장난이라 생각하려 해도 질이 나빴다.

“아니, 어떤 미친 새끼가……!”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아직도 열기가 남아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자그마한 불꽃이 길을 만들며 잿빛 글자를 새기고 있었다.

짤막한 문장이었다. 고작해야 한 줄에 불과한 글자.

하지만 그 내용을 확인한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는 수밖에 없었다.

‘황실을 건드린 자, 대가를 치러야 한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 뇌리가 새하얗게 질렸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잠시 후, 내 손이 절로탁, 하고이마에 얹어졌다.

설마, 이제는 반역이란 말인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벌써부터 앞으로의 일이 암담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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