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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39화 (139/649)

〈 139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3)

* * *

제국 황실의 위엄은 대륙 전역을 통틀어도 오롯했다.

아무리 제국의 날고 기는 귀족이라 해도 황제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했다. 영주들은 황제로부터 영지의 통치권을 위임받은 이들에 불과했다.

황제가 마음만 먹으면 모든 영지를 몰수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명목상이 아니라, 실제로도.

영주들은 치안 유지에 필요한 수준의 병력밖에 육성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마저도 훈련기간을 수료한 병사들 중 삼할은 중앙군의 편제에 넣어야 했다.

그래서 몇몇 가난한 영지에는 훈련병밖에 없는 병영이 존재하기도 했다.

중앙군에 기껏 훈련시킨 병사를 갖다 바칠 만큼 여유가 없으니, 차라리 훈련병을 수료시키지 않는 편을 택한 것이다.

물론 자체적으로 치안 유지가 불가능한 곳에는 중앙군이 배치되긴 하지만, 이를 반기는 영주는 제국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파견된 중앙군의 지휘관은 영주와 동등한 서열에 놓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당연히 황제의 명령만을 따르며, 영주의 부탁을 일일이 들어줄 만큼 호락호락한 상대도 아니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권력의 기반은 공인된 폭력이었다. 군대조차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자를 지배자라 부를 수는 없었다.

다시 말해, 영주가 최저한의 독립성이라도 갖추고 싶다면 어떻게든 병력을 짜내야 한다는 소리였다.

일부 영주가 편법까지 동원해 가며 병력을 유지하는 까닭이었다.

황실도 아주 무자비한 통치자는 아니었다. 영지의 사정에 따라 그처럼 뻔한 속임수를 눈감아줄 때도 많았다.

단, 선을 넘지 않을 시에만.

혹여 황실의 권위에 손상이 갈 수도 있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이에 따른 응징은 철저했다.

굳이 직접 손에 피를 묻힐 필요도 없었다. 황실에게는 그들을 대신해 움직여 줄 5대 명문가라는 수족이 있었으니까.

일단 5대 귀족 가문 중 하나라도 움직이기 시작하면, 제국에서 그들을 당해낼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무력으로든, 금력으로든, 황실의 심기를 거스른 영지는 곧 질식사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제국의 절대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곳이 황실이었다.

그리고 제국은 명실상부한 대륙의 최강국이었으므로, 제국 황실은 대륙 최대의 권세가라도 봐도 무방했다.

시엔은 바로 그 제국 황실 출신이었다.

비록 제5황녀로, 황위계승권과는 거리가 멀긴 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황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녀의 몸에 흐르는 피는 고귀했다. 따라서 만국의 사절들은 마땅히 그녀 앞에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해야 했다.

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던지라, 시엔은 이에 대해 의문을 품어본 적조차 없었다.

예외가 있다면 성국의 주교들이나 남부 열왕국의 왕족들뿐이었다. 심지어 그들조차도 시엔의 앞에 서면 그녀의 눈치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명목상 평등과 공정을 표방하는 아카데미에서도 이는 다르지 않았다. 시엔은 그 혈통만으로도 수많은 학생들의 경의를 받을 자격이었다.

게다가 시엔은 모종의 까닭으로 인간의 심리에 통달해 있었다. 그러한 그녀에게 이상적인 황녀를 연기하는 일쯤은 어렵지도 않았다.

입학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아카데미에는 황녀를 칭송하는 목소리만이 드높아졌다.

시엔이 노리고 있던 바이기도 했다.

긍정적인 이미지는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이는 제 사람들을 모을 때도 마찬가지였다.시엔은 이를 기반으로 아카데미에서 인재를 모으고 있었다.

당연히 황위에 관심이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애초에 황위계승서열도 낮아 언감생심 권좌를 향한 꿈을 품을 수조차 없을뿐더러, 시엔은 황좌에 미친 그녀의 언니 오빠들이 싫었다.

권력에 눈이 멀어 제 피붙이들을 죽일 궁리만 하는 인간이 될 바에야, 시엔은 권좌와 거리를 두는 편을 택하기로 했다. 그녀는 그저 스스로를 지킬 힘 정도면 족했다.

다만 그 소박한 목표를 위해서조차 힘이 필요할 따름이었다.

단지 황위계승권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죽어나간 황족은 수도 없이 많았다. 제국의 정치판은 비정했고, 절대권력은 제2의 권력을 용인하지 않았다.

황가의 살생부에 이름을 올리기 전까지, 시엔은 어떻게든 우수한 조직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피 묻은 제국의 정치사에 희생양으로 기록되리라.

훌륭한 인재들을 모아 세력을 결성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유력한 황위계승권자에게 힘을 실어준 다음, 중앙에서 거리가 먼 어딘가에서 안락한 여생을 보내는 것.

그것이 시엔의 목표이자 꿈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수많은 인재들이 필요했다. 온 대륙에서 천재와 수재들이 몰려드는 아카데미에 그녀가 발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시엔은 그 자체로도 돋보이는 마도의 재능을 지닌 원석이기도 했다. 아카데미는 아직 원석에 불과한 재능 있는 마법사를 찬란한 보석으로 만들어줄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러한 연유로 아카데미에 입학해, 순조롭게 아카데미 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

시엔의 귀에 재미있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안 페르쿠스’라…….”

한가로운 오후, 황녀는 향긋한 찻물을 홀짝이며 서류 한 장을 눈으로 죽 훑었다.

누군가의 인적사항이 담긴 문서였다. 검은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미남자의 외모파기를 필두로, 그에 대한 정보가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흥미로운 이력 일색이었다. 그녀의 옅은 회색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시골 자작가의 차남이, 고작 두 달도 안 돼서 이만한 활약을 보일 수 있나?”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등 뒤에 시립해 있던 기사 하나의 입이 열렸다.

푸른 머리카락을 단정히 뒤로 묶어놓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과장된 정보일 가능성이 큽니다.”

“흐응, 그렇단 말이지.”

황녀는 묘한 소리를 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 방금 입을 연 여인의 말이라면 믿을 만했다.

이름 높은 황실 근위기사단의 일원이자, 제국 5대 명문가 중 하나인 루페미온 가문의 여식이 바로 그 여기사의 정체였으니까.

아이린 루페미온,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시엔의 최측근으로, 아카데미에서도 시엔의 호위 업무를 총괄하는 입장에 있었다.

다만 생각해 보면 조금 우스운 일이긴 했다.

아이린은 이미 아카데미를 졸업한 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제국의 5대 귀족 가문 출신답게, 열일곱 살이라는 나이에 아카데미 조기입학을 확정 받은 그녀였다.

수석이나 차석은 아니더라도 우수한 성적을 꾸준히 거둬왔으며, 남부럽지 않은 석차로 아카데미를 졸업한 것이 벌써 3년 전이었다.

이후에는 황실 근위기사로 활동하다 시엔의 측근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다 시엔이 아카데미행을 결정하면서, 아이린은 다시금 아카데미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아이린은 아직도 그날 품었던 감상을 기억하고 있었다.

참 세상 일은 알 수가 없다고, 그녀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졸업할 때만 해도 다시는 못 올 곳처럼 작별을 고했던 곳인데 말이었다.

그렇게 회상에 잠겨 있던 아이린은, 슬그머니 제 주군의 의중을 떠보았다.

“……그 사내가 마음에 드십니까?”

“조금, 일단 배경이 없잖아. 시골 자작가의 차남이라면 작위도 계승하기 힘들 테고, 내 사람으로 쓰기엔 적당하지.”

거침없는 평가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아이린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

얼마쯤 침묵을 지키던 그녀는, 곧 시엔이 원하던 대답을 내놓았다.

“평가에는 과장이 섞여 있을지 몰라도, 그 성장세는 주목할 만합니다. 물론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를 쓰러트렸다던가, 마인을 단독으로 토벌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닐 테지만요.”

“하지만 증언이 있잖아?”

“호의적인 관계를 맺은 사람이 많아질수록 평가는 후해지기 마련이죠. 그 점이 인상 깊긴 합니다… 추론이지만, 조직을 이끄는 지도자로서의 자질도 훌륭할지 모르겠네요.”

황녀는 그 말을 듣고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주판알을 튕기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그러던 그녀는 이내 훗, 하고 미소를 머금고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만약 영입에 성공한다면, 아이린은 좋겠네? 잘 생겼잖아, 이 남자. 너도 슬슬 혼기가 찼으니까…….”

“황녀 전하, 저는 검과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고작 20대 중반에 불과한 여인이 내뱉기에는 너무나 차가운 인생관이었다.

시엔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김이 팍 새버렸다는 듯이.

하기야 아이린에게 농담을 던진 것이 잘못이었다. 하도 검만 수련하다 검밖에 모르는 바보가 되어버린 여자였으니까.

그 점이 딴 생각을 품지 않아서 좋지만, 그렇게 황녀는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내의 얼굴은 한 번쯤 봐야 할 듯 싶었다.

그러면 보일 터다. 그가 어떠한 인간인지.

시엔은 무심코 제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이내 서글픈 호선이 그녀의 입가에 떠올랐다.

아이린의 눈이 의아하다는 듯 시엔을 향했다. 느닷없이 제 주군이 애처로운 미소를 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하 기색을 눈치 채지 못할 황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재빨리 분위기를 환기하기로 했다.

짓궂은 눈빛으로, 황녀는 시답잖은 농을 던졌다.

“서류에 따르면, 별명이 ‘손도끼 살인마’라는데 괜찮겠어? 나를 습격하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그 말에 아이린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녀는 곧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하. 황녀님의 호위기사는 애송이 하나 당해내지 못할 만큼 못난 사람이 아니니까요.”

과연 그 말대로였다.

시엔은 농담이었다는 표시로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녀가 내뱉고도 아차 싶었던 말이었다. 가능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시엔은 황녀였다. 그 배경만 보더라도 시골 자작가의 차남 따위가 건드릴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심지어 아이린을 비롯한 넷이나 되는 황실 근위기사단이 그녀의 호위를 서고 있었다. 황실의 근위기사단이 으레 그렇듯, 그들은 모두 대륙에서 알아주는 실력자들이었다.

그런데 그 철벽같은 호위까지 뚫고, 시엔을 습격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녀는 곧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대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황실로부터 부탁받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마침 그를 만나러 갈 용건도 생겼겠다, 더는 망설일 까닭이 없었다.

시엔은 지체 없이 몸을 일으켰다. 결단을 내리는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그녀의 장점 중 하나였다.

황녀가 이안을 찾아낼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중앙대로의 나무 의자에 앉아, 한 사내가 수통 하나를 들고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 서류에 나와 있던 신상파기 그대로였다.

이안 페르쿠스였다.

그는 무척 진지한 표정으로 수통을 이리저리 관찰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평범한 수통에 왜 그토록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상관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깟 수통보다 황녀와의 만남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제국의 세 살배기도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시엔은 크흠, 하고 귀여운 헛기침을 하며 인기척을 냈다. 그와 동시에 사내의 무감한 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시엔을 시야에 담은 사내의 얼굴에 조금 의외라는 기색이 스쳤다.

그리고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그는, 서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사내의 왼손이 오른 가슴에 얹어졌다. 뒤이어 그의 고개가 정중하게 숙여졌다.

흠 잡을 데 없는 인사였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시엔의 눈동자에 흡족한 기색이 어렸다.

하급귀족의 차남이라기에 걱정했는데, 예상 외로 예법 교육이 철저했다.

적어도 측근으로 쓴다고 사교계에서 책잡힐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을 듯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이안의 평가가 상향조정 되는 순간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시엔은 오늘의 만남이 나쁘지 않을 줄만 알았다.

그래, 이때까지는.

시엔이 사내를 얕잡아 본 것을 후회하기 단 몇 분 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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