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40화 (140/649)

〈 140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4)

* * *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이안의 나무랄 데 없는 인사에, 시엔의 눈동자에 흡족한 기색이 어렸다.

하급귀족의 차남이라기에 걱정했는데, 예상 외로 예법 교육이 철저했다.

적어도 측근으로 쓴다고 사교계에서 책잡힐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을 듯했다.

하지만 시엔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그 속마음과 정반대로 겸양을 듬뿍 담고 있었다.

“이안 선배시죠? 후후, 그렇게 예를 갖추실 필요 없어요. 아무리 황녀라도 아카데미에서는 일개 학생에 불과하니까요.”

그와 함께 시엔은 살짝 상반신을 숙이고, 애교 넘치는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남자들은 이러면 대개 끝이 났다. 시시하게도.

살갑고 예쁜 여자를 싫어하는 수컷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 사내만큼은 그 예외에 속하는 듯했다. 슬쩍 들린 사내의 시선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감정한, 텅 빈 눈동자.

과연 그것이 진심인지, 단지 속마음을 숨기는 데 능한 것인지 시엔은 조금 헷갈렸다.

어차피 곧 알 수 있을 터였다. 황녀의 연회색 눈동자가 이안의 시야를 파고들었다.

이제 볼 수 있을 터였다.

시엔의 동공이 잠시 흐릿해졌다. 마치 이곳이 아닌 머나먼 곳을 응시하는 것처럼.

하지만 잠시 후, 시엔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제 눈가를 비비적대고 있었다.

어라, 이럴 리가 없는데.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시엔은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지금껏 이랬던 적은 일생을 통틀어도 몇 번 없었던 탓이었다.

그러나 시엔이 어떻든 간에, 이안은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 듯했다. 단지 특유의 무감정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질 뿐이었다.

“……그래서, 무슨 용건으로 찾아오셨습니까?”

일개 후배로 대하라는 말을 들었지만, 이안은 여전히 경어를 고수하고 있었다.

부담스러워 하지 않는 선에서 황녀 대접은 착실히 해주겠다는 뜻이었다.

훌륭한 판단이었다. 윗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능력이 생각보다 뛰어났다.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시엔은 제 마음 한구석에서 꿈틀거리는 소유욕을 느꼈다.

욕심이 앞선 탓일까, 시엔은 그녀답지 않게 다소 모험적인 판단을 내리고 말았다.

어차피 굳이 볼 필요도 없었다.

상대는 시골 자작가의 차남이고, 최근 두 달 동안 급격한 성장세를 보였다. 그렇다면 마땅히 그럴 만한 까닭이 있어야 했다.

어떻게든 성장을 이루어내야 하는 계기가.

과연 그를 추동케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인간의 심리는 대개 뻔했다. 욕망일 테지, 그리고 인간은 대개 결핍된 부분을 욕망한다.

시골 자작가의 차남에게 부족한 것이라면, 그래.

권력이구나. 이내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 시엔의 연회색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았다.

“이안 선배의 활약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어요. 얼마 전 마인을 토벌하셨다면서요? 사실, 그에 대해 황실을 대표해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황실을 대표해 어여쁜 황녀가 찾아온 것도 감격스러운데, 하급 귀족에 불과한 학생을 이토록 깍듯이 대하면 감읍하는 편이 보통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황실이 내릴 포상에 대한 기대감을 차마 숨기지 못하거나.

하지만 사내에게서는 놀랍도록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단지 짙은 피로가 느껴지는 금빛 눈동자로 시엔을 응시하고 있을 뿐.

욕심이 없지는 않을 테고, 속내를 숨기는 데도 능하다고 봐야 했다.

훌륭했다. 황녀는 살포시 미소를 머금었다.

점점 더 제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사내였다.

굶주림 끝에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와 같은 충동이 시엔을 사로잡았다.

“전례가 없는 활약을 하시다 보니, 우리 황실도 꽤 골치를 앓고 있거든요. 포상을 내리긴 내려야 하는데, 도대체 이안 선배가 무얼 원하시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러면서 황녀는 은근슬쩍 이안의 지척까지 다가섰다.

까치발을 들고, 속삭이듯 사내의 고막을 물들이는 소녀의 음성이 이어졌다.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그대로 들어드릴 수 있도록, 제가 손을 써드릴 테니.”

“……무엇이든?”

이안은 그제야 조금 흥미가 간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시엔의 입가에 걸린 호선이 더욱더 짙어졌다.

그래,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그 또한 인간에 불과했다.

시엔이 내뱉는 숨결이 더욱 달콤해졌다.

“네, 무엇이든… 대신, 제가 다리를 놔주었다는 사실만 기억해 주세요.”

이안의 입에서 흐음, 하고 침음이 흘러나왔다.

시엔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입이 매끄러운 언어를 토해냈다.

지켜본 바로는 목석같은 사내였다. 보다 단도직입적인 말로 파고들어야 했다.

“어쩌다 나중에, 우리가 좋은 인연을 맺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원하시는 모든 것을 드릴 수 있어요. 단지, 제 발에 입 맞추기만 한다면.”

은유적인 표현이었으나 그 의미는 노골적이었다.

충성 맹세를 생각해 보라는 뜻이었다. 발에 입 맞추는 것은, 주군에게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예우 중 하나였으니까.

물론 당장은 자존심이 상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또한 권력의 맛을 보면 곧 생각이 달라질 터였다.

인간만큼 욕망에 솔직한 존재는 없었으니까.

오히려 처음부터 이토록 직설적인 제안을 던져야, 나중에 고분고분 그녀의 말을 따를 터였다. 이는 황궁이라는 복마전에서 시엔이 지금껏 터득해 온 용인술의 기본이었다.

사내는 침묵했다. 오래, 그리고 더 오래.

시엔은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그래봐야 시골 자작가의 차남에 불과한 인간이 아닌가.

요즘 놀라운 활약을 보이긴 했어도, 하급귀족 주제에 제국 황실에 소속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곧 사내는 기꺼이 그녀의 발에 입 맞추러 오리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 황녀는 좀 더 이안의 애를 닳게 해보기로 했다.

“……예를 들어, 작위 승계라든가?”

그 말을 끝으로 시엔은 뒷짐을 진 채 두세 걸음 물러났다.

시골 자작가의 차남으로 겪었을 설움은 알 만했다. 어린 시절부터 형과 비교당하며 자라왔을 테지, 그의 인적사항을 보니 가문의 후계자는 형으로 내정된 지 오래였다.

최근 들어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는 까닭도 그와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그 외에는 어떠한 원인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깔끔한 이력이었다.

평민 계집 따위를 살리기 위해 만 골드에 달하는 마수의 시체까지 기탁한 사내였다.

적어도 돈 욕심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남은 것은 오직 권력밖에 없었다.

물론 시엔이 건넨 말은, 듣는 사람에 따라 가문을 향한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시엔은 황녀였고 이안은 시골 자작가의 차남에 불과했다. 무엇보다도 사내가 권력에 뜻을 두고 있다면 내심 통쾌하다고 여길 말이기도 했다.

욕망을 긍정해 주는 말이었으니까, 대다수의 인간들은 아닌 척 하면서도 자신의 추악한 마음을 인정받길 원했다.

황녀는 이쯤에서 이안이 반쯤 혹했으리라 확신했다. 그녀의 무례한 제안을 듣고도 이안은 화를 내기는커녕,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엔은 재차 이안에게 물었다.

“어때요, 이안 선배? 혹시 생각난 게 있나요?”

“……마침 바라는 바가 하나 있긴 합니다.”

됐다, 황녀의 눈에 일순 희열이 스쳤다.

마무리만 하면 끝이었다. 입질을 하던 물고기에 낚싯바늘을 꿰는 심정으로, 시엔은 피어나는 꽃과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말씀만 하세요. 이안 선배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찬물이 끼얹어진 것은 그때였다.

허공에, 물줄기가 흩뿌려진다.

이안이 수통의 뚜껑을 열더니, 곧바로 그 내용물을 황녀를 향해 쏟아낸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누구도 대응하지 못했다.

시엔도, 그녀의 뒤에 시립하고 있던 호위 기사들도, 흥미진진한 눈으로 사내와 황녀의 대화를 훔쳐듣고 있던 행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후드득, 하고 허공을 날던 물줄기가 떨어져 내리며 시엔의 전신을 흠뻑 적셨다.

상상도 못한 대응에, 황녀는 미소를 지은 자세 그대로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다. 이는 황녀의 뒤에 시립하고 있던 호위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을 보고, 이안은 옅은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쯤 즐겁다는 얼굴이었다.

“……물벼락은 시원하십니까, 황녀 전하?”

그제야 시엔은 푸하, 하고 어안이 벙벙한 소리를 토해냈다. 당혹감과 수치심이 뒤섞인 감정이 그녀의 눈동자에서 일렁였다.

난생 처음 겪는 취급이었다.

황녀로 태어나 이만한 모욕을 당한 적이 있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신호탄이었다.

가장 먼저 대응에 나선 것은 아이린이었다. 그녀의 손이 벼락같이 검 손잡이를 쥐었다.

그리고 곧장 검을 뽑으려던 찰나.

섬찟한 감각이 아이린의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본능적으로 그녀의 눈동자가 그 원인을 쫓아 움직였다.

금빛 눈동자였다. 타오르는 듯한 사내의 눈동자가, 어느새 아이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이린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이상했다. 일평생을 수련해 온 무인의 직감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는, 강하다. 상대해서는 안 되는 적이었다.

아이린의 손에서 식은땀이 송골송골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숨결이 일순 거칠어졌다.

여전히 그녀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은 채로, 사내의 입이 나지막한 경고를 토해냈다.

“아이린 경… 검에서 손 떼, 후회하기 싫으면.”

자연스러운 명령조였다. 마치 아이린을 대할 때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투라,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아이린이 화들짝 정신을 차린 것은 그때였다.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상대는 고작해야 아카데미의 3학년에 불과했다. 그녀는황실 근위기사단의 일원이었고, 근위기사단에는 아카데미 졸업생 중에서도 실력자만이 입단할 수 있었다.

아이린이 저까짓 사내에게 밀릴 리가 없었다.

그 사실을 상기해낸 여기사의 뽀얀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잠시나마 이안에게 위축되었던 것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 수치심은 곧 사내를 향한 적의로 화했다.

이를 으득으득 갈면서, 아이린은 검을 뽑아들었다.

“호위기사 전원 전투 준비!”

그리고 울려 퍼지는 금속의 마찰음, 아이린의 뒤를 따라 호위 기사 전원이 검을 뽑아들었다는 신호였다.

기사들은 전원이 익스퍼트 이상의 강자들이었다. 아카데미의 규정 탓에 갑옷을 착용하진 못했지만, 이미 그들의 전신이 흉기나 다름없었다.

타오르는 오러가 그들이 이룩한 경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아카데미 3학년 따위는 단숨에 제압해야 정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안의 눈동자에서는 아무런 감정의 파문도 엿보이지 않았다.

강적들을 앞두고 보일 태도는 아니었다. 그 낯빛에서는 두려움이나 긴장감의 편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 금빛의 눈동자에서 비치는 것은, 오직 짙은 피로감뿐이었다. 마치 그 외의 감정이 소각되어 버린 듯이.

아이린은 그 점이 못내 불길했다.

사내는 오만하지도, 자신만만해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애초에 그럴 가치도 없는 상대를 대하는 기색에 가까웠다.

결국 아이린은 이를 악물었다. 계속해서 엄습하는 불안감을 다독이기 위해서였다.

그럴 리가 없었다. 상대는 아카데미의 3학년에 불과했다. 황실의 근위기사 넷을 압도할 실력을 갖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고도 잔류하는 불안감에, 아이린은 결단을 내리고 말았다.

그래, 실력으로 증명하면 될 일이었다.

짧은 대치는 이제 끝이었다. 더는 참지 못한 아이린의 발이 땅을 박찼다.

찰나,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

마치 공간이 삭제당한 듯, 어느덧 아이린은 사내의 지척까지 쇄도해 있었다.

찢어발겨진 대기가 뒤늦은 비명을 토해냈다. 파공성조차도 느렸다. 여인의 푸른 머리카락이 칼바람에 마구잡이로 흩날렸다.

이미 아이린의 검이 이안의 심장을 노리고 쏘아진 뒤의 일이었다.

날카로운 찌르기였다. 그때까지도 이안에게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심지어 검을 뽑아드려는 시도조차 없었다. 둔중한 시간의 흐름 사이에서, 아이린은 내심 안도했다.

헛된 걱정이었다. 과연 상대는 아직 아카데미 3학년에 불과한 풋내기였다.

반격은커녕, 그녀의 기습에 대응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아이린의 눈이 부릅떠졌다.

멈춘 시간 속에서, 사내의 손이 아이린의 검면을 누르듯 밀어내고 있었다. 힘의 흐름을 온전히 파악하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오러조차 순응하며 비틀리는 완곡한 궤적.

아이린의 검이 허공을 찌르고 지나갔다.텅 빈 공간을 향해 내뻗어진 그녀의 어깨에는, 어느새 이안의 팔이 휘감긴 뒤였다.

아이린의 뇌가 새하얗게 표백됐다.

도대체, 어떻게.

그러한 질문을 던질 새도 없이, 그녀의 귓가에 고저 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후회할 짓 하지 말라니까.”

그리고 일시에, 아이린의 세계가 뒤집힌다.

쾅!

여기사가 땅바닥에 처박히며, 차라리 폭음에 가까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엉망진창으로 으깨진 돌과 자갈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흙먼지가 하늘 높이 솟구치며 자욱한 안개를 일으키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충격량을 가진 일격이었다.

수십 명의 숨소리가 정지하는 순간이었다.

* *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