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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44화 (144/649)

〈 144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8)

* * *

또 다시 새벽녘이 찾아왔다.

어제 있었던 일들이 전부 꿈만 같았다. 몽롱한 정신 사이로, 나는 더듬거리며 수통을 찾았다.

탁, 하고 손에 묵직한 무게감이 전해졌다. 이내 익숙한 손짓이 벌컥벌컥 수통의 물을 식도에 쏟아부었다.

그제야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퍼뜩 정신이 든 나는 상반신을 일으켰다.

지난밤의 일이 서서히 재생하기 시작했다. 어제는 종일 몽롱한 채로 지냈던 것 같은데, 기억을 되짚어 보니 해낸 일도 꽤 많았다.

우선 황녀를 건드렸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그리고 엘시 선배에게 한동안 만나지 말자는 뜻도 전했다.

그때 엘시의 선배의 모습이 꽤 처량했는데, 울먹이면서 내 옷깃을 붙잡았을 정도였다. 그녀는 애절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에, 엘시가 잘못해서 그래? 죄, 죄송합니다… 다, 다시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그, 그러니까아… 제발 버리지 말아줘…….”

순간적으로 마음이 흔들릴 뻔했으나,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엘시 선배를 위한 일이었다. 내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엘시 선배, 그런 거 아니에요. 왜 이러는지는 잘 아시잖아요…….”

나는 마지막으로 엘시 선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등을 돌렸다. 하지만 그토록 좋아하는 포상임에도 불구하고, 엘시 선배의 눈동자에서는 눈물만이 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뚝, 뚝, 떨어지며 빗방울처럼 땅을 적시던 엘시 선배의 흐느낌이 떠올랐다.

다시 떠올려도 속이 쓰린 광경이었다. 나는 괜히 수통을 탁탁 털어 찬물을 들이켰다.

그러고 보면, 이른 새벽에도 사건이 하나 있었다.

주기적으로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실수가 아닐까 싶어 넘어가려 했지만, 그 장난이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지자 내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다.

괴롭히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수단은 있다는 뜻이겠지.

아무래도 상대는 내게 불면의 밤을 선물해 주고 싶었던 듯했다. 그래서 나도 그 마음에 보답해 주기로 했다.

깜짝 선물이면 충분할 터였다.

문 뒤편에 숨을 죽인 지 몇 분째, 비로소 문앞으로 다가서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호흡을 멈춰 그나마 있던 기척마저 남김없이 지웠다. 그리고 누군가 내 문을 두드리려던 순간, 벌컥 내 손이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어어, 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남학생이 하나.

그 뒤에도 일당으로 보이는 몇 명의 학생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문을 두드리려던 그의 손이 훅 잡아당겨졌다.

그리고 다시 쿵, 하고 닫히는 문짝. 마지막 순간까지도 남학생의 패거리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마루에 내던져진 남학생은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볼 필요는 없는데.

콱, 하고 내 주먹이 남학생의 안면을 강타했다.

콧등이 무너져 내리며 으드득, 하고 연골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학생은 곧바로 제 안면을 틀어쥔 채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아아아아악!”

그제야 문밖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내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문은 잠겨 있고, 저들에게 문짝을 뜯을 용기가 없다면 남학생의 신변은 내 손 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곧바로 그의 몸 위에 올라타 주먹을 날렸다.

콱, 콱, 콱.

단 세 번의 주먹질이면 충분했다.

처음에는 비명을 내지르던 남학생은, 일타를 맞고 이빨이 날아가더니 이어지는 이타를 맞고 성대조차 제대로 통과하지 못하는 바람 소리만을 냈다.

마지막 삼타, 어느덧 얼굴에는 타박상의 흔적이 수두룩했다. 울먹이는 소리가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 그만해… 내,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삼켰다. 그래서 또 사타.

콱, 하고 틀어박힌 주먹에 사내의 격렬히 꿈틀거렸다. 나는 주먹질을 한 번 더하려다가, 참았다. 아무래도 상대가 검술학부는 아닌 듯했다.

잘못하다간 죽을 수도 있었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는 흐느끼는 남학생에게 물었다.

“그러게 왜 사람 신경을 긁어?”

“시, 신고할 거야… 크흐흑, 너, 신고해서 퇴학시킬 거… 끄아아아아악!”

나는 눈물을 훔치는 사내의 손가락을 그대로 꺾어버렸다. 우득, 하는 소리와 함께 역방향으로 꺾인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강렬한 고통에 또 다시 몸부림이 일었다. 그제야 나는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황실을 건드린 사람이, 설마 퇴학 따위를 무서워할 거라 생각한 거야?”

그러자 남학생의 눈에 선연한 공포가 어렸다. 덜덜 떨리는 눈빛이 나를 향했다.

내가 이렇게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더욱 의아했다.

상식적으로 제국 황실까지 건드린 사람이 퇴학을 두려워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내게 걸리는 이들 족족 ‘퇴학’을 운운하고 있었다.

내 의문을 해소해 준 것은 남학생의 떨리는 목소리였다.

“화, 황녀님께서 퇴학만은 면해 주신 거 아니었어?”

멋진 헛소리였다.

아카데미의 전통은 유구했고, 황실 또한 그 권위를 존중했다. 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 중 하나인 아이달로스 선제 폐하 시절부터 그랬다.

황실은 단 한 번도 아카데미의 규율에 간섭한 적이 없었다.

그러한 누대의 전통을 따라, 제국 황실은 아카데미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설령 황족을 모욕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물리적인 시해 사건이라면 몰라, 물을 끼얹은 정도로 제국 황실이 개입할 리가 없었다. 이는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제국 황실의 권위를 떨어트리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대신 제국 황실은 보다 간접적으로 움직이곤 했다.

예를 들어 제국의 5대 명문가를 보낸다든가, 여러 인맥을 동원해 압박을 가하는 식이었다.

지금 황녀가 내게 취하고 있는 대응 방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황녀가 아카데미 징계위원회를 소집했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승산 없는 승부에 돈을 거는 승부사는 없었다. 그래봐야 정당방위라는 판단이 내려질 것이 뻔했다.

물을 끼얹은 것은 잘못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검을 들고 죽이려 달려든 것은 더더욱 잘못이 컸다. 따라서 내 대응은 정당했다.

일단 아카데미 내에서는 황족이든, 귀족이든, 평민이든 일개 학생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명목상에 불과하더라도 징계위원회가 이러한 규정을 무시할 확률은 한없이 낮았다.

그러니 애초에 황녀가 내 퇴학을 봐주었다는 말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전제였다.

물론 제국 황실이 그럴 의지만 보인다면 가능이야 하겠지만, 황위계승서열에서도 한참 밀리는 황녀를 위해 그래줄 의리는 없었다.

차기 황제로 유력하다고 전해지는 제1황자와 제2황녀라면 또 몰랐다. 하지만 시엔은 그들에 비해 권력도 세력도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의문을 품는 수밖에 없었다.

대개의 제국 귀족들이 황실을 향한 충성에 눈이 먼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처럼 기본적인 사실관계를 착란할 가능성은 적었다.

답은 하나뿐이었다. 누군가 잘못된 정보를 뿌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남은 의문은 누가, 도대체, 왜라는 질문밖에 없었다.

“황녀 전하가 내 퇴학을 봐줘? 누가 그래?”

“네, 네가 황녀 전하께 부당한 폭력을 행사했다고…….”

“호위기사들만 조금 팼을 뿐이야, 황녀 전하께는 손도 안 댔어.”

그러나 남학생은 불신이 가득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쯧, 하고 나는 혀를 찼다.

확신이 들었다. 아카데미 내에서는 지금 왜곡된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아카데미에서 그만한 조직력을 가진 집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몇몇 유력 가문이 아카데미 내의 소문을 통제할 때는 있어도, 이는 입만 다물게 할 뿐 진상 자체는 알음알음 퍼져 나가기 마련이었다.

반면 지금 남학생이 보이는 태도는 전혀 달랐다.

진심으로 그 정보를 신뢰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그날 수십 명의 목격자들의 증언마저 깔아뭉갤 수준의 정보전을 펼칠 수 있는 조직이 있다고 봐야 했다. 고작해야, 황위계승서열도 한참 먼 5황녀를 위해서.

나는 헛웃음을 머금으며,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콰득, 하고 뼈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와 함께 남학생의 의식이 멀어졌다.

그의 고개가 툭, 하고 떨어졌다. 숨을 쉬는 것으로 보아 다행히 죽지는 않은 듯했다.

나는 그의 품을 뒤적였다. 내가 머무르는 기숙사는 하급 귀족들이 많았으므로, 그도 귀족이라면 호신용 단검은 하나쯤 가지고 있을 터였다.

과연 다소 투박한 단검이 하나 발견됐다. 나는 그 단검을 축 늘어진 사내의 손에 쥐여 준 다음, 내 뺨을 살짝 그었다.

정당방위를 주장할 최소한의 요건은 충족한 셈이었다.

그렇게 기절한 남학생을 다시 방 밖으로 던지려던 찰나, 남학생의 속주머니에서 툭 튀어나온 회색 종이가 하나 눈에 띄었다.

잠시 침묵하던 나는 그 종이를 빼들었다. 신문이었다.

[그날 중앙대로에서 있었던 일의 진실! 황녀 전하의 자비심은 어디까지인가?]

아무래도 일단 방문해야 할 곳이 하나는 정해진 듯했다.

나는 그 신문을 내 품에 넣고, 남학생을 질질 끌었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툭, 하고 밖으로 던져버렸다.

바깥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남학생의 일행들이 화들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을 위해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금 폭력적인 친구더라. 대화 좀 나누려 했는데, 다짜고짜 덤벼들더라고?”

그들은 황당하다는 눈빛이었으나, 엉망진창이 된 제 친구의 얼굴을 보고 곧 낯빛이 창백히 질렸다.

그 침묵이 어색해서 나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한 마디를 남겼다.

“앞으로도 나와 대화하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 방문을 두드리라고 전해줘. 그럼 이만.”

그 후 내 방문을 두드리는 학생은 없어졌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수통에 물을 채우려 했다.

그러던 내 손이 멈칫한 것은 어떠한 발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내 눈이 은근슬쩍 술병을 향했다.

새내기 때가 생각났다. 유독 수련이나 공부를 하기 싫던 날이면, 수통에 물 대신 술을 넣고 다니며 조금씩 마시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유독 속이 쓰라린 날이 될 듯했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결국 위스키 한 병을 들어 수통에 콸콸 쏟아부었다.

또 하루의 시작이었다.

오늘은 황녀에게 어떻게 반격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볼 차례였다.

**

우편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나른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무렵의 일이었다.

본래 기숙사 한켠에 각 호실에 배정된 우편함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오늘 아침에 보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붉은색 글씨로 ‘죽어’라고 쓰여있는 것은 예삿일이고, 각종 쓰레기에 먹다남은 음식물까지 넣어져 있었다.

고전적인 방법이었다.

결국 우편을 정상적으로 수령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우편국은 내게 따로 언질을 보냈다. 우편국에 직접 와서 수령하려는 소리였다.

황실을 적으로 두니 귀찮긴 했다. 그러한 생각을 하며 하품을 하고 있는데, 골목 사이를 빠져나오는 일당이 문득 내 눈에 들어왔다.

킥킥거리며 손을 털고 나오던 그들은, 나와 눈을 마주치자 흠칫 몸을 굳혔다.

그러더니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도망치는 것이 아닌가.

내 의아한 눈빛이 그들의 뒤를 쫓았다. 그러다 퍼뜩 불길한 느낌이 들어, 나는 곧바로 골목 안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쓰레기더미가 놓여 있었다. 미관상 보기에 좋지 않아, 기숙사의 쓰레기를 배출하는 곳은 골목 안에 위치하곤 했다.

그 쓰레기더미에 처박힌 사내의 얼굴이 너무나 눈에 익었다.

“레토!”

끙끙거리며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 신음하던 그는, 제 머리 위에 얹어진 바나나 껍질을 툭 내던지며 말했다.

“……왔냐, 이안.”

그 태도가 심히 불만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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