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47화 (147/649)

〈 147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11)

* * *

대신전은 천 년이 넘는 아카데미의 역사를 함께했다.

세월의 풍파를 견디지 못해 새하얗던 대리석은 회색으로 가라앉았고, 곳곳에 이가 나가긴 했지만 내부는 여전히 웅장했다.

고색창연한 역사적 건축물은 그 자체로 엄숙한 분위기를 풍긴다. 아카데미의 대신전 또한 마찬가지였다.

방문자들로 하여금 침묵과 겸양을 강제시키는 그 위대한 천신의 집 앞, 나는 울려 퍼지는 찬송가를 들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예배가 진행 중인 모양이었다. 혹여 성녀도 참여 중인가 싶어 괜히 걸음걸이가 어색해졌다.

헛걸음만 아니라면 좋을 텐데, 그러한 내 걱정을 해소해 줄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났다.

옥빛 머리카락을 가진 중성적인 외모의 사내, 유렌이었다.

어느 기도실 앞을 지키고 있던 그와 내 눈이 마주쳤다. 유렌은 곧바로 싱긋 웃으며 슬쩍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이안.”

“……유렌.”

나는 그를 보자마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유렌은 성녀의 호위무사였다. 그가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뜻은, 성녀가 그 안에 머무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지금 유렌이 지키고 선 방은 ‘기도실’이었다. 자연스레 성녀는 기도 중이라는 결론이 내려질 수밖에 없었다.

기도를 하고 있는 신앙인을 방해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하물며 일반인도 아니고 사제라면 더더욱.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한동안 기다려야 할 듯했다.

유렌은 시시각각 변하는 내 낯빛을 보고 대략적인 사정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그가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도 누님께 볼일이 있는 거야?”

“뭐, 일단 그렇지.”

딱히 숨길 만한 문제도 아니었기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흐음, 하고 침음을 삼키던 유렌은 곧 내게 길을 터주었다.

의아한 내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러나 유렌은 어깨를 으쓱이며 의뭉을 떨 뿐이었다.

“요즘 누님이 기도를 많이 하고 있거든… 누굴 위해 기도 중인 것 같아?”

당연히 내가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 종류의 질문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셀린의 마음도 아직 잘 모르겠는데, 내숭의 달인인 성녀의 마음속을 내가 들여다 볼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유렌은 애초에 내게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았던 듯했다. 그는 재차 손으로 손잡이를 가리키며 입장을 권했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결국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손잡이를 쥐었다.

다름 아닌 유렌의 보증이 아닌가.

거의 남매와 같은 사이라고 했으니, 성녀의 마음은 나보다 그가 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나는 일말의 불안감을 버리지 못했다. 조심스레, 최대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으며 내 몸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조명이 없어 전체적으로 어두운 방이었다.

여러 사람이 기도할 수 있도록 공간은 넉넉했다. 자그마한 창문 하나에서 빛이 새어들어오며 유일한 광원을 만들고 있었다.

빛줄기가 사선으로 이어진다. 그 금색의 세례 아래, 무릎 꿇은 채 두 손을 모은 여인이 보였다.

은빛 머리카락을 타고 햇빛이 흘러내렸다. 닫힌 눈꺼풀 탓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안에는 분명 보석 같은 연분홍색 눈동자가 숨겨져 있을 터였다.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와, 사제복 너머로도 느껴지는 여성적인 굴곡까지.

아름답지 않은 부분이 없는 존재였다. 차라리 천신이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하늘에서 빚어낸 예술품이라는 설이 더욱 믿을 만했다.

언제 보아도 어여쁜 여인이었다. 입만 다물고 있으니 나조차 잠시 숨이 멎었을 만큼의 미모를 자랑했다.

그래, 입만 다물고 있다면.

그녀의 입에서 중얼거리며 기도가 읊어졌다.

“주여, 부디 이 어린양을 구원하소서… 폭력적이고, 성격 나쁜데다, 시건방지기까지 한 사내의 생각으로 마음이 어지럽습니다. 이 또한 주께서 내리신 시련이옵니까? 무, 물론 조금 멋지긴 합니다. 또 고아를 아끼는 것으로 보아 상냥하고, 약자를 사랑할 줄 알며, 드물게도 솔직담백하며 계산적이지 않은 사내라 나, 나쁜 사람은 아니고…….”

주저리주저리 흘러나오는 말을 들으며,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후반부는 몰라도, 전반부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성녀는 여전히 내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한 채였다.

한참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던 그녀는, 곧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 또한 주님의 뜻이라면 순명하겠습니다. 우,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죠, 네. 그, 그렇죠? 성녀니까, 주님의 뜻을 따라야…….”

“……뭐합니까?”

이제는 홀로 자문자답을 반복하는 그녀를 향해, 무심한 내 물음이 던져졌다.

성녀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그녀는 감전이라도 당한 듯 화들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곧바로 몸을 일으켜 나를 돌아보았다. 그 연분홍빛 눈동자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흐, 흐야앗?! 누, 누구… 이, 이안? 어, 어, 어떻게……!”

그러면서 성녀의 시선이 슬그머니 내 허리춤을 향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아서,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단언했다.

“도끼로 부수고 들어온 거 아닙니다. 유렌이 문 열어줘서 들어온 거예요.”

성녀의 눈이 나와 내 뒤에 있는 문을 번갈아 살펴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성녀는 안심했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다행이네요. 자칫하면 교칙상의 문제가 생길 뻔했어요.”

“도대체 저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내 허탈한 목소리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성녀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더니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슬쩍 내 눈치를 살피면서, 그녀가 내게 물었다.

“그래서, 왜 들어온 거죠? 설마 성녀의 기도를 방해해 놓고 아무 용건도 없었다고 할 생각은 아니잖아요?”

그 도도한 말을 들으니, 내 가슴속에 장난기가 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아무 용건도 없었다면요?”

내 반문에 성녀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헛, 소리…….”

그러나 처음에 따지려는 듯하던 그녀의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점점 흐려졌다. 이내 침묵, 성녀는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우물쭈물 하더니, 내 시선을 피해버렸다.

“무, 뭐, 뭐… 아니면 보고 싶었다는 소리라도 하려고요? 어, 어이없어라…….”

성녀의 뽀얀 뺨 위로 옅은 홍조가 떠올랐다. 그 연분홍빛 눈동자가 힐끔힐끔 내 동태를 살폈다. 나는 그래서 쓴웃음을 머금는 수밖에 없었다.

내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담백했다.

“당연히 아니죠, 오늘은 용건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은근한 기대를 담고 있던 성녀의 눈빛이 차게 식었다. 그녀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나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지난번에 저 만나신 적 있죠?”

이제 성녀가 의아한 눈빛을 내게 던질 차례였다.

흐응, 하고 묘한 소리를 내며 성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의도냐는, 의심이 넘치는 눈빛.

나는 곧바로 보충 설명을 덧붙여야 했다.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만 대략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사실, 그때의 저는 미래에서 온 인격인데…….”

“아직도 그 설정 밀고 있어요? 그, 조직의 ‘나’와 아카데미 학생인 ‘나’는 다른 존재다?”

설정이라니, 기껏 마음을 터놓고 진실을 이야기해 줬는데.

내 표정이 단숨에 불퉁해졌지만, 성녀는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느닷없이 미래에서 온 인격이 빙의하고 떠나가다니, 그것도 온갖 기행을 저지르고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성녀는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뭐, 조금은 성의가 늘었네요? 미래에서 온 인격이라… 으음, 그러고 보니 뭔가 다른 느낌도 들었는데. 지금처럼 행복한 느낌이 들지도 않았고…….”

“행복해요?”

혼잣말을 하던 성녀는, 내 말을 듣자마자 안색이 얼어붙더니 그 자리에서 펄쩍 뛰고 말았다.

“무, 무, 무슨 소리에요! 저, 저는 성녀니까 당연히 천신 아루스의 품에 있을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낍니다. 그, 그런데 마치 외간남자와 단 둘이 이, 있다고 즐거워한다는 망발을… 아아, 주님! 오늘도 이 어린양께 시련을 내리시는……!”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말의 폭풍에 내가 절로 어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단 급히 그녀를 제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 알겠습니다. 알겠으니, 이제 그만 진정하시죠.”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성녀는 우뚝, 말을 멈춰세웠다. 그리고 크흠, 하고 귀여운 헛기침을 하며 이내 안색을 갈무리했다.

아직 그 볼에는 옅은 홍조가 남아있었지만, 나는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진 않기로 했다.

“……아, 아무튼 그때 무슨 일이 있었냐고요? 별 일 없었어요. 그냥 느닷없이 찾아오더니, 뭐 하나 달라고 하고 떠났잖아요.”

무얼 달라고 했다고?

비로소 단서를 잡은 내 눈에 이채가 맺혔다. 나는 곧장 성녀에게 되물었다.

“뭘 달라 했다고요?”

“네, ‘성수’요.”

‘성수’, 말 그대로 성스러운 물이라는 뜻이었다.

신성력을 농축시킨 성수는 무색, 무취, 무미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 물과 구분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 효험만큼은 천차만별이었다.

듣기로는 마시면 천수를 누린다고 하던가, 못해도 수천 골드에 달하는 물건이었다.

내 눈에 서린 의문이 더욱 깊어졌다. 그러자 성녀는 우쭐한 표정으로 성수의 효능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정말, 그게 얼마나 비싼 물건인 줄 알아요? 성수는 기본적으로 상처 치유에도 효과가 있지만, 온갖 저주나 마법적인 이상까지 씻어내리는 효과까지 있다고요. 일례로 제국의 황제는 성국에 매년 어마어마한 양의 성수를 발주하는데, 소문에 따르면 성수로 목욕을 한다는 이야기가…….”

그러면서 은근히 내게 시선을 향하는 것이, 그만큼 대단한 물건을 주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은 듯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생색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 관심은 다른 데에 있지 않았다. 나는 문득 성녀의 설명 중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 물었다.

“……저주나 마법적인 이상을 씻어내요?”

성녀는 잠시 내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는지,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았다.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유독 그 구절에 흥미가 갔나 보다, 하는 얼굴로 성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네, 오히려 말하자면 고위 귀족들은 성수의 효능 중 그쪽을 으뜸으로 쳐요. 효과 하나는 확실하거든요. 아마 암흑교단의 저주까지 씻어낼 수 있을걸요? 대신, 마시면 안 되고 몸에 뿌려야 해요.”

그 말을 듣는 내 눈빛이 더욱 멍해졌다.

나는 문득 생각이 미치는 부분이 있어, 더듬거리며 허리춤을 훑었다. 그리고 이내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자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수통이었다. 오랜 시간 나와 함께한 물건.

그 수통을 보자마자, 성녀는 앗, 하고 놀란 듯한 탄성을 내질렀다.

“그래요, 그 수통! 멀쩡히 병에 담겨 있는 걸 그 투박한 물건에 담았잖아요! 뭐야, 기억하고 있으면서…….”

성녀의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하지만 지금 내 관심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간 지 오래였다.

골목길에서 패버린 남학생은, 내가 수통에 담긴 물을 황녀에게 끼얹었다고 했다.

물론 그 또한 전해들은 사실관계에 불과했다. 사소한 오류가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아귀가 딱딱 맞아들어가면, 아무래도 새로운 추론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었다.

미래에 ‘나’는, 성수를 뿌렸다. 황녀에게.

도대체 왜?

저주에 걸렸다면 조금 더 섬세한 방식으로 황녀 측에 위험을 알릴 수 있을 터였다. 황녀쯤 되면 아무리 교묘한 저주라도 해주가 가능했으니까.

황실에서 파견된 마법사들의 실력은 그만큼 믿을 만했다.

애초에 황녀를 도발한 까닭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진정시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악수였다. 그 탓에 내 행동반경은 더욱 제한되고 말았다.

제국 귀족의 협력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끙끙거리며 고민에 빠져 있자, 조금 놀란 듯한 눈빛으로 성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 연분홍빛 눈동자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괜찮아요? 혹시, 그 황녀 때문에 그래요?”

당연하다면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성녀는 이미 나와 황녀의 충돌에 대해 들은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진의는 다르겠으나 아무튼 성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복잡한 심경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내 시인에도 불구하고 성녀는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 그래서 나는 도리어 의문을 담은 시선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성녀의 입이 열린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래서, 무슨 생각이래요?”

또 다시 그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

물끄러미 내 눈이 그녀를 향하고 있자, 이제는 답답함마저 느끼는지 성녀가 제 가슴을 팍팍 두드렸다.

존재감 넘치던 흉부 굴곡에 파문이 일며 탄력이 시각적으로 구현되었다. 오랜만에 하는 눈 호강이었다.

성녀는 그러든 말든 짜증이 어린 기색으로 재차 내게 물어왔다.

“그 황녀 말이에요! 무슨 자신감으로 당신을 건드렸냐고요.”

무슨 헛소리람, 나는 그러한 심정을 담아 성녀를 바라보았다.

고작해야 시골 자작의 차남에 불과한 나였다. 성녀나 델핀 선배, 엘시 선배와 같은 권력자와 연이 있긴 해도 그들 모두를 합치더라도 제국 황실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무조건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쪽은 나였다.

그러나 성녀는 진심으로 답답해 보여서, 내 고개는 갸웃 기울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뭐야, 혹시 나도 모르는 출생의 비밀이라도 있나?

그러자 성녀는 결국 답답함이 극에 달했는지,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당신, ‘용혈문자’ 가지고 있잖아요! 그런데 황녀가 무슨 자신감이 있어서 당신을 건드리냐고요!”

그 말에, 몽롱해지던 내 정신에 벼락이 스쳤다.

그래, '용혈문자'가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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