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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48화 (148/649)

〈 148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12)

* * *

‘용혈 문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고대의 신비로운 유산이자, 제국 황실만이 그 문자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 공개된 정보의 전부였다. 그마저도 그 원리나 연역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부여받는 것만으로 강력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힘이었다. 제국 황실에서는 그와 관련된 정보를 엄격히 관리했으며, 따라서 용혈 문자의 소유자 또한 소수였다.

황족들을 통틀어 ‘제국 황실’ 소속이라 부르지만, 엄밀히 말해 제국 황실의 지존은 황제밖에 없었다.

그 외의 권력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제국 황실의 무수한 조직 전부가 그랬다.

권력이란 황제를 중심으로 뻗어나간 뿌리와 같았다. 그와 가까운 순서대로 권력의 서열이 결정되며, 황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그 권력을 몰수할 수도 있었다.

그토록 철두철미한 관리를 위해서는 복잡한 감시 체계가 필수적이었다.

제국 황실 소속의 첩보원조차도 황실의 조직도를 알지 못했다. 당연히 어느 조직에 누가 속해있는지 또한 기밀에 속했다. 그러다 보니 몇 가지 문제가 수반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정치는 일종의 생명과 같아서, 다발하는 변수들과 급변하는 정세를 모두 포괄해야 했다. 이를 관리하는 제국 황실의 조직들 또한 긴밀한 대응에 나설 필요가 존재했다.

그래서 부여되는 것이 바로 ‘용혈 문자’였다.

용혈 문자의 소유자는 그 숫자가 몇인지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용혈 문자를 부여받은 자는 기본적으로 황제의 측근이라는 점이었다.

‘황족’이라 불리는 황제의 자식들과, 황실에 속한 온갖 조직원들이 권세를 누리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황제의 권력을 빌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황제를 무시할 수 있는 존재는 황실에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용혈 문자의 소유자를 무시할 수 있는 인물도 존재할 수 없었다.

용혈 문자는 제국 황실의 상징이자, 황제의 위신을 상징하기 때문이었다.

마력조차 없이 발동하는 신비로운 마법은 먼 옛날 사라진 용의 흔적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용의 후예를 자처하는 제국 황실에게 용혈 문자는 그 증거 중 하나였다.

제국 황실 소속의 모든 조직이 용혈 문자의 소유자에게 복종하는 까닭이기도 했다.

황위계승자로 유력한 제1황자나 제2황녀도 마찬가지였다. 5대 귀족 가문의 가주들마저 고개 숙인다는 그들조차도, 감히 용혈 문자의 소유자를 건드리지는 못했다.

그들의 권력은 그저 황제가 될 가능성 덕에 주어진 것에 불과했다. 정작 황제의 권력을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한 와중에 황위계승서열도 한참이나 밀리는 제5황녀가 날 건드린 것이다.

성녀로서는 코웃음을 칠 만도 했다. 내가 용혈 문자의 소유자인 줄도 모르고 덤벼들었다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그녀는 내게 소소한 위로의 말조차 건네지 않았다.

용혈 문자가 드러나면 모조리 끝날 문제였으니까.

성녀는 용혈 문자를 쓰는 ‘나’를 본 두 사람 중 하나였다. 그녀와 유렌을 동시에 제압했을 때 사용했다고 하는데, 승부욕 강한 그녀도 용혈 문자 앞에서는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잊고 있던 기억이었다.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성녀는 이제야 떠올랐냐는 눈빛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타박이 이어졌다.

“아무리 조직의 일이라지만, 너무한 거 아니에요? 그래도 신분 정도는 밝힐 수 있잖아요. 당신 정체를 알면 황녀가 얼마나 놀랄지…….”

조잘조잘 떠드는 성녀의 목소리에도 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그래, 일단 용혈 문자만 있으면 모든 상황이 해결되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내게는 아직 결정적인 문제가 남아있었다. 바로 나는 용혈 문자를 사용할 줄 모른다는 점이었다.

일단 내게 부여되어 있는 것 같긴 한데, 정작 사용법을 모르니 쓸 수가 없었다.

곤란했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라면, 용혈 문자의 소유자임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용혈 문자를 보여주는 것뿐이었다.

이대로라면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도 당하고 살아야 할 판이었다. 나는 끙끙거리며 한참이나 무의식의 파편을 훑어보았다.

물론 그런다고 용혈 문자의 사용법에 대한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기왕 사고를 칠 거면 좀 더 실용적인 정보를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예를 들어, 용혈 문자의 사용법이라던가.

그런데 남긴 말이라고는 ‘용의 눈을 가진 자는 인간의 마음을 모른다.’ 같은 알 수 없는 문장뿐이라니, 그 융통성 없는 행동이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미래의 ‘나’를 속으로 곱씹고 있을 때였다.

혼자서 말을 이어가던 성녀는, 이내 캘록이며 기침을 했다. 아무래도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목이 갈라진 모양이었다.

나는 아직도 수통을 든 채 멍하니 고민에 잠겨 있었다. 그래서 성녀가 멋대로 내 수통을 채갈 때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아, 목말라… 조금 마셔도 되죠? 어차피 물이야 어디서든 채우면 그만이니까.”

그러시든가, 나는 시큰둥하니 성녀를 바라보다가 멈칫했다.

문득 내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내가 수통에 물을 채워 넣었던가?

분명 다른 것을 집어넣었던 것 같은데, 나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성녀를 만류했다.

“아니, 잠깐……!”

그러나 이미 늦은 뒤였다.

잠시 수통의 액체를 꼴깍꼴깍 넘기던 성녀의 눈이 곧 부릅떠졌다. 그리고 푸우우, 하고 물을 뿜어내는 성녀의 입.

나는 탁, 하고 낯가죽 위로 손을 얹었다.

수통 안에 든 액체의 정체는, 물이 아니라 술이었다.

오늘 아침에 내가 그렇게 넣어두었기 때문이었다. 하도 심란해서 말이다.

켁켁, 성녀는 목 막힌 소리를 내며 가슴을 탁탁 두드렸다. 식도 부근이었다. 지금쯤 타는 듯한 통증이 일고 있겠지.

성녀는 옅은 물기마저 맺힌 눈으로 내게 애원했다.

“무, 물! 물 좀 주세요!”

“없습니다, 참으시죠.”

내 한숨 섞인 대답에 성녀는 울상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유렌을 시키면 물쯤은 떠다 줄 수 있지만, 그 시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편이 더 효율적이었다.

어느 쪽이든 진정되는 것은 마찬가지일 테니까.

과연 내 예상대로 성녀는 얼마 가지 않아 기침을 멈추었다. 그녀는 지쳤다는 듯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으으, 냄새 이상해…….”

“술은 처음 마셔봤어요?”

“성녀가 무슨 술을 마셔요?”

째릿, 하고 원망을 담아 나를 노려보며 성녀는 그렇게 답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누가 멋대로 수통을 채가랬나, 내게는 잘못이 없었다.

그러나 사고는 늘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 법이었다.

잠시 나를 쏘아보던 성녀의 얼굴에, 옅은 홍조가 어리기 시작했다.

동공이 살짝 풀리고 하아, 하고 내뱉는 숨결에 열기가 느껴졌다. 너무나 익숙한 조짐이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취했다고?

고작해야 한두 모금에 불과했다. 그 정도로 취기가 올라올 정도라면 술이 꽤 약하다는 소리였다.

내 머릿속에 유력한 미래가 그려졌다.

술에 취한 성녀가 기도실을 나서서, 비틀거리며 신전을 활보하는 광경이었다. 신도들은 성녀를 보고 수군거리겠지, 다름 아닌 성녀가 신전 안에서 음주를 했다고 말이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지 않아도 평판 관리에 목숨을 걸고 있는 성녀였다.

이러한 실수로 이미지가 실추된다면, 얼마나 낙담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재빨리 성녀의 손에 들린 수통을 낚아챘다. 혹여나 취기에 술을 더 마실까 염려돼서였다.

그리고 기도실의 문을 열고, 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유렌에게 말했다.

“유렌, 물 좀 떠와.”

“……뭐?”

그는 느닷없는 요청에 무슨 일이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지만, 내 손에 들린 수통에서 올라오는 냄새를 맡고 곧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언제나 눈치가 빨랐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유렌은 곧바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기도실의 문을 쿵, 하고 닫은 뒤 성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몽롱한 눈빛이었다. 살짝 달구어진 피부가 음란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취기에 녹아내린 연분홍색 동공이 나를 향했다.

“……이안?”

“네, 성녀님. 저 여기 있습니다.”

혹시나 돌발상황이 생길지 몰라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어떻게든 냉수라도 마시고 성녀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는 버텨야 했다. 성녀는 내 대답을 듣자마자 후후,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볼을 쿡, 하고 찔렀다.

흐트러진 성녀의 모습은 숨이 막힐 듯이 아름다웠다. 달콤한 체향이 술 냄새와 뒤섞어 코끝을 간지럽혔다.

성녀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바보.”

“네, 바보 맞습니다.”

“멍청이.”

“멍청이도 맞고요.”

고작해야 두어 마디를 나누었을 뿐인데,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성녀는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곧 그녀가 내 품에 제 얼굴을 기댔다. 혹여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나는, 당신처럼 손해 보고 사는 사람 처음 봤어요.”

“……마냥 손해만 보고 사는 건 아닙니다.”

나는 무심코 변명을 늘어놓았으나, 성녀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쿡쿡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그녀가 내 목을 끌어안더니, 그대로 끌어당겼다.

엉거주춤 내 귓가에 성녀의 입이 닿을 듯 말 듯 다가왔다. 그녀의 탄력 있는 젖가슴이 내 가슴에 꾸욱, 하고 눌려졌다.

기분 좋은 촉감이었다. 만지면 분명 기분이 더 좋겠지.

나도 모르게 그러한 생각을 해버릴 만큼, 성녀의 숨소리는 달큰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내 귓가에 속삭여지는 말소리에,

“그래서 좋아요, 이안.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랑 달라요, 특별하니까.”

나는 잠시 침묵했다.

누가 들으면 고백이라고 오해할지도 모르는 말이었으니까. 얼어붙은 내 눈빛이 다시금 성녀를 향했을 때, 그녀의 몸에서는 스르륵 힘이 풀려 있었다.

잠든 것이다. 고작 술 두어 모금만 마셨을 뿐인데.

차라리 이 편이 낫겠다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자리에 눕혔다. 새근새근 잠든 그녀의 얼굴은 천사와 같았다.

나는 기도실 벽면에 등을 맞댄 채로 유렌을 기다리다가, 혹시 몰라 잠든 성녀에게 물었다.

“성녀님, 혹시 용혈 문자 어떻게 쓰는지 알고 계십니까?”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나는 피식, 하고 웃으며 잠든 성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슬슬 몸을 일으켰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유렌이 돌아온 듯했다.

그렇게 발걸음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눈.”

자그맣게 새어나온 그 잠꼬대에, 내 몸이 우뚝 멎었다.

흘깃 뒤를 돌아보니 성녀는 아직도 꿈나라였다.

“눈으로, 하아암… 눈으로, 봐야 해요… 모든, 마법의 기보오온…….”

성녀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잠들어버렸다. 어쩌면 애초부터 깨어난 적이 없었을지도 몰랐다.

그 모습이 꽤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나는 멍하니 성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내 주제에 무슨 성녀란 말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내게는 할 일이 남아있었다. 그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연애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나는 품속의 편지를 만지작거렸다.

세계를 구해야, 내 미래의 약혼자들도 구할 수 있을 터였다.

이제 델핀 선배를 만날 차례였다.

**

나는 으슥한 연구동에 들어섰다.

무슨 목적으로 방치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관리는 꾸준히 하고 있는지, 내부는 깔끔하고 안온했다.

본래라면 지금쯤 아이달로스 관을 찾아가야 했다.

하지만 최근 나를 둘러싼 상황이 워낙 좋지 않다 보니, 델핀 선배는 미리 선수를 쳐 내게 쪽지를 보내왔다.

그렇게 그녀가 날 불러낸 곳이 이 인적 드문 연구동이었다.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며 걷다보니, 어느덧 약속한 연구실 앞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델핀 선배는 그곳에 있었다.

화사한 금빛 머리카락과 핏빛 눈동자, 그리고 새하얀 피부가 어울리는 북방계 미녀는 나를 보자마자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앉고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이내 무릎을 꿇고 공손한 말씨로 고개를 조아렸다.

“……오셨어요, 주인님?”

사실,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랐지만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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