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49화 (149/649)

〈 149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13)

* * *

북부의 금사자, 델핀 유르디나.

그녀는 제국의 5대 명문 가문 중 하나이자, 북부의 권세가인 유르디나 후작가의 정명한 후계자였다.

제국의 건국부터 북방의 이종족들을 막아낸 혁혁한 전과가 있는 가문이었다.

그들은 이민족과 마찰이 잦은 국경지대를 관리할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황실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을 보인 바 있었다.

이를 감안해 황실은 유르디나 가문에 한해 보유 사병의 제한을 철폐했다. 그래서 유르디나 가문의 사병은 물경 1만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군부 가문이라는 특성상 유르디나 가문 출신은 중앙군의 요직에도 많이 진출해 있었다.

제국의 금권을 상징하는 가문이 알펜하우저라면, 군권을 상징하는 가문은 명명백백 유르디나였다.

최소 수천, 최대 수만에 이르는 군대를 통솔하는 유르디나의 가정교육은 악명 높기도 했다.

수없이 많은 생명을 등에 짊어져야 하는 삶이었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훈련에 매진해야 했으며, 전술과 전략에도 능통해야 했다.

당연히 델핀 또한 어린 시절부터 유르디나 가문의 유일한 적자로서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 덕에 검술은 물론이고, 제국의 역사와 전쟁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에 조예가 깊은 그녀였다. 더불어 그 도도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는 아카데미의 인재들을 홀리기에 적합했다.

‘금사자’라는 영예로운 호칭은 그렇게 주어졌다.

북부를 지키는 유르디나 가문의 상징은 사자였다. 그리고 그 찬란한 금빛 머리카락과 아름다운 외모, 천성적인 매력이 더해져 델핀은 비로소 맹수의 이름을 얻었다.

이는 세상이 그녀를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로 인정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가문의 사병부터 중앙군의 몇몇 군단까지, 수만에 이르는 군세를 통솔하는 대군벌의 자리에 오를 자격을 증명한 철의 여인이었다.

그 델핀 유르디나가, 지금 공손히 내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무척 기쁜 기색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만약 이 광경을 유르디나 가문의 가신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까.

당장 세리아부터 정신을 잃고 쓰러질지도 몰랐다. 차라리 그 정도로 그치면 다행이지, 병세가 완연하다는 유르디나 후작은 그대로 혈압이 올라 죽어버릴 수도 있었다.

하루 속히 나와 델핀 선배와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하는 까닭이었다.

나는 쩔쩔매면서, 어떻게든 델핀 선배를 일으키려 했다.

“아니, 델핀 선배… 이러실 필요 없다니까요, 얼른 일어나세요.”

“하지만 어찌…….”

그러나 내가 아무리 애원해도 델핀 선배는 고개를 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제야 델핀 선배가 뭘 원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내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기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은 일분일초가 귀중한 상황이었으니까.

“……델핀 유르디나, 일어서.”

차가운 명령조였다. 그제야 델핀 선배는 만족했다는 듯, 공손한 태도로 몸을 일으켰다.

“네, 주인님.”

무슨 말이든 하라는 대로 따를 기세였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달래고자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래도 두통은 가시지 않았다.

당장의 관계개선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최소한 이 관계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델핀 선배, 그리고 앞으로 그렇게 대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이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보이는 그대로의 관계겠죠, 주인님과 노예.”

델핀 선배의 대답은 뻔뻔스러울 만큼 시원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더욱 가슴이 답답했다.

요즘 노예는 주인을 선택한단 말인가?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노예를 자처하는 델핀 선배를 볼 때마다, 내 심정은 암담해지기만 했다. 그래서 나는 다소 거친 방법을 동원하기로 했다.

“그러지 마세요.”

“하지만…….”

“명령입니다.”

‘명령’이라는 한 마디에 델핀 선배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그녀는 슬쩍 내게 불만스러운 눈초리를 보냈지만, 내 태도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델핀 선배는 공손히 모아두었던 손을 풀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명령이라면야, 뭐.”

그리고 그녀는 다시 앉아있던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 자세에서는 어느덧 여유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평소대로의 델핀 선배였다.

그녀는 나른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래서 주인님, 무슨 생각이야?”

‘주인님’이라는 호칭이 거슬려 한 마디 할까 했지만, 참았다.

이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면 도리어 고집을 부릴까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대개의 고위 귀족들은 자존심이 강했고, 그러다 보니 이상한 고집을 피우기 십상이었다.

그 고집이 노예 신분을 자처하는 것이라니, 무척 놀랍긴 했지만 말이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연구실 벽면에 등을 기댔다.

무슨 생각이냐고 물어봐야 돌려줄 대답이 없었다. 황녀를 도발한 건 어디까지나 내가 아니라 미래의 ‘나’였으니까.

“일주일 동안 나는 보러 오지도 않고, ‘혹시 내 충성심을 시험하나?’ 싶어서 한동안 긴장하고 있었는데…….”

“아니, 제가 그런 짓을 왜 합니까.”

“사람을 다루기 위해서는 때때로 일부러 충성심이 흔들리도록 방치해야 하는 법이거든. 내게는 그래도 돼, 주인님. 그런다고 내 충성심이 흔들릴 리는 없거든.”

나는 매끄럽게 이어지는 델핀 선배의 설명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싱긋 미소를 지은 꼴을 보니, 아무래도 델핀 선배는 진심인 듯했다.

여전히 정신세계를 알 수 없는 여자였다.

차라리 미래에서 온 ‘나’를 만나지 않았다니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지금의 델핀 선배를 보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내가 그렇게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델핀 선배는 여전히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황실을 건드린 건 심했어, 주인님. 유르디나 가문이라도 제국 황실이 나서면 움직이지 못해.”

“벌써 5대 귀족 가문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까?”

“듣기로는, 알펜하우저가 나설 것 같던데.”

느긋한 화답이었다. 델핀 선배는 시종일관 여유로워 보였다. 마치 모든 고민을 벗어던진 듯한 태도였다.

그러나 그 내용만큼은 범상치 않아서, 내 머리가 더욱 복잡해졌다.

알펜하우저, 제국의 곳간지기.

대상단을 운영하며 제국의 재무를 쥐고 있는 가문이었다. 그들이 나섰다는 것은, 곧 세입과 세출을 비롯해 페르쿠스 영지의 온갖 재정 상황을 탈탈 털어버리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마침 페르쿠스 가문에는 여동생이 운영하는 상단이 하나 있었다.

알펜하우저가 나서면 페르쿠스 영지는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경제적인 고사 상태에 놓일 터였다. 그때가 되면 이미 늦었다.

델핀 선배는 그러한 내 속마음도 모르고 태평하게 말을 이어갔다.

“물론, 유르디나에게도 이야기가 들어오긴 했어. 하지만 내가 주인님의 가문을 공격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거 참 기특한 소리였다.

문제가 있다면 굳이 유르디나 가문이 아니더라도, 페르쿠스 가문을 말려죽이기 위해 움직일 가문이 많다는 점뿐이었다.

알펜하우저는 물론이고, 당장 황녀의 호위기사 중에는 루페미온 가문의 여식도 있었다니 그쪽도 이를 갈고 있을 터였다.

이 상태로는 답이 없었다.

고위 귀족이라면 몰라, 페르쿠스 가문은 약소 가문에 불과했다. 5대 귀족 가문이 움직이면 얼마 버틸 수가 없었다.

설령 버틴다고 하더라도, 그 짧은 시간 내에 많은 것들이 끝장나 있겠지.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델핀 선배에게 부탁했다.

“……일단 유르디나 가문이 맡아주시죠.”

델핀 선배의 핏빛 눈동자가 물끄러미 나를 향했다. 흐응, 하고 그녀는 고민하듯 묘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내게 되물었다.

“괜찮겠어? 유르디나 가문이 나선다는 건, 군대가 움직인다는 뜻이야. 끊임없이 도발해서 견디지 못할 때까지 몰아붙일걸? 그리고 유르디나가 쓸고 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아.”

“그래도 속도를 조절할 수는 있지 않습니까.”

내 말에 델핀 선배의 눈이 가늘어졌다. 재미있다는 듯, 그녀는 이내 옅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만약 그렇게 좋은 방법이었다면 이미 델핀 선배가 먼저 내게 제안했을 터였다.

그녀는 정치와 권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여인 중 하나였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조금 지체하는 수준에 불과해. 황실이 뒤에 버티고 있고, 난 아직 유르디나의 가주가 아니거든. 기껏해야… 한두 달?”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내 즉각적인 대답에, 델핀 선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유심히 내 눈동자를 살펴보았다. 아무리 살펴봐도 내 결정이 달라질 리는 없었다.

어차피 미래의 ‘나’는 황녀가 준 3개월의 유예기간을 그 삼분지일로 줄여버렸다.

그 말은 즉 한 달 이내에 이를 만회할 수 있는 사건이 터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델핀 선배의 힘을 빌어 조금이라도 가문에 가는 타격을 최소화시켜야 했다.

최소한 유르디나의 군대가 영지를 쓸어버리기 전까지, 페르쿠스 영지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터였다.

사실 델핀 선배에게는 미친 소리처럼 들릴 제안이었다.

아무리 황녀가 황위계승서열에서 멀다고 해도 황족은 황족이었다. 제국 황실이 움직인 이상 단기간에 판을 뒤집기란 불가능했다.

그런데 나는 한두 달이면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미쳤거나, 오만이 극에 달했다고 평가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 말도 없이 나와 델핀 선배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러기를 한참, 델핀 선배는 의외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래, 그래야 주인님이지.”

그녀는 만족한 기색이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흐릿한 희열이 번져 나갔다. 아무래도 내 제안이 마음에 든 듯했다.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모로 유르디나 가문의 힘이 절실하던 차였다.

델핀 선배가 움직인다면 한동안 페르쿠스 영지의 안전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와 그녀의 관계를 고려했을 때, 델핀 선배가 나를 도와주리란 기대는 실현 가능성이 컸다. 그럼에도 일단 확답을 받아두는 편이 좋을 듯해서, 나는 혹시나 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들어주시는 겁니까?”

장난스러운 미소가 델핀 선배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그녀는 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짐짓 시치미를 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내게 속삭였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이 여자가 또 왜 이러나, 하는 눈으로 바라봐도 델핀 선배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녀는 도발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봐야, 유르디나 가문에겐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로서 그 부탁을 들어주어야 할 이유는 하등 없는 것 같은데.”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불퉁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델핀 선배는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트리더니 곧 등을 돌리고 말았다.

마치 이대로 떠나버리겠다는 듯 손을 살랑이는 모습은 덤이었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델핀 선배가 왜 저러는지.

오늘만 하더라도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쉰 나는, 어쩔 수 없이 벽에 기대고 있던 상반신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저벅저벅 걸어, 막 연구실을 나서려던 델핀 선배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서슴없이 훅, 하고 당겨지는 어깨에 델핀 선배와 내 눈이 마주쳤다.

다소 얼떨떨한 기색의 핏빛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에서는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제 어깨를 붙잡은 강한 완력에 델핀 선배의 숨이 거칠어졌다.

“……델핀 유르디나.”

내 위압적인 목소리를 듣자마자, 델핀 선배의 눈동자가 몽롱해졌다. 헐떡이는 숨결에는 달큰한 냄새가 났다.

허벅지를 오므리면서, 델핀 선배는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그녀의 핏빛 눈동자가 애절했다.

나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명령이야.”

델핀 선배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그녀는 그대로 무릎을 꿇더니, 이내 내 신발에 입술을 맞췄다. 움찔거리는 하체가 음란했다. 무척 기뻐 보이는 기색이었다.

델핀 선배는, 이내 주인을 섬기는 충성스러운 노예처럼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네, 주인님… 무슨 명령을 하시든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결국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히려 이 정도로 유르디나 가문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라고 생각해야 했다.

그렇게 속으로 씁쓸함을 곱씹고 있던 찰나.

델핀 선배의 입에서 달뜬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하아, 하아, 하고 거칠어지는 숨결이 내 발등을 달구었다.

“주, 주인님…….”

내 의문을 담긴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델핀 선배는 엎어진 자세 그대로, 내게 애원했다.

“주, 주제도 모르고 감히 반항을 한 이 암노예에게…부, 부디 벌을…….”

은근슬쩍 허벅지를 비비적대며 말하는 그 목소리에서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묻어나오고 있어서.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려야 했다.

유르디나 가문에게 너무나도 미안한 심정이었다.

*

괴롭힘을 당하던 엠마를 마주친 것은, 그날 오후의 일이었다.

* *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