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14)
* * *
델핀 선배가 원하던 ‘벌’을 내린 후, 나는 침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과연 이 관계가 맞는 걸까?
델핀 선배는 진심으로 내게 순종하는 듯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녀에게 내가 맞춰주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었다.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 징계위원회에 회부될 시 얼마나 강한 처벌을 받는지 고민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델핀 선배는 다소 만족했다는 표정이었다. 은근슬쩍 쭉 내뻗은 하체의 곡선이 훌륭했다.
최근 델핀 선배가 요구하는 벌은 점점 더 수위가 높아져 가고 있었다.
본래는 뺨을 도끼날로 긁거나, 명치를 후려치는 정도였는데 오늘은 맛이라도 들렸는지 엉덩이를 때려달라고 할 정도였다.
물론 촉감은 좋았다.
탄력 있는 살집이 손바닥에 감기는 시원한 감각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델핀 선배는 그 얼굴만큼이나 몸매 또한 완벽했으므로, 솔직히 말해 호강은 호강이었다.
단지, 유르디나 후작님께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을 뿐이었다.
곧 방학이 시작되면 델핀 선배의 편으로 건강에 좋은 선물이라도 챙겨드려야 할 듯 싶었다. 그래야 내 죄책감이 좀 줄어들 것만 같았다.
그 도도하고 자존심 강하던 유르디나 가문의 영애가, 웬 외간남자의 발에 기쁘게 입을 맞추고 있다니.
심지어 일부러 벌을 받고 싶어 하는 이상기벽까지 생기고 말았다.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는 모습이었다. 유르디나 후작께는 물론이고, 세리아도 지금의 델핀 선배를 보아서는 안 됐다.
그러다간 세리아마저 비틀거리다 풀썩 혼절해 버리는 미래가 그려졌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민 중이었지만, 델핀 선배는 오히려 태평한 기색이었다.
그야말로 아무 걱정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내게 평온한 목소리로 조언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주인님, 신문부는 조심하는 편이 좋아.”
그 말에 어리둥절한 내 눈동자가 델핀 선배를 향했다. 그녀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내 귓가에 다가서 속삭였다.
뜨겁고 습한 숨결이 고막을 녹일 듯이 파고들었다.
“……제국 첩보부의 아카데미 지부거든.”
“네?”
그 쓸데는 없고 자극적이기만 한 기사를 싣는 신문부가 말인가?
나는 화들짝 놀라 반문했지만, 델핀 선배의 말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제국 첩보부가 딱 봐도 수상하고 유능한 집단으로 위장하고 있을 줄 알았어?”
“……그도 그렇네요.”
나는 과연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보잘 것 없어 보여야 더욱 의심을 피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한 면에서 신문부로 위장한 제국 첩보부의 선택은 탁월했다.
'잠깐 관심이 가는 정보만 읽고 태워버리는 불쏘시개 공급처'.
그 정도가 아카데미 신문부의 현 위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델핀 선배에게 그 정보를 접하기 전까진 나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야 아카데미에 황실의 입김이 닿고 있으니, 어딘가에 첩보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는 생각했지만 말이다.
그러던 나는 문득 품에 넣어두었던 신문에 생각이 닿았다.
유독 나에 대한 왜곡된 정보를 제공하곤 했던 그 신문, 그제야 그 논조가 이해가 가는 느낌이었다.
고위 귀족과 황실을 연달아 건드렸으니 심기가 불편할 만도 했다.
흐, 하고 나는 되다 만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 전까진 ‘제국 첩보부’하면 무시무시한 비밀요원들을 떠올렸는데, 이제는 별 감흥이 없었다.
그까짓 놈들보단 마인이나 신화 속의 괴물, 그리고 암흑사제들이 더 무서웠다.
언젠가 신문부를 찾아가긴 해야 할 듯 싶었다. 찾아간다고 해서 내가 뭘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날고 기는 인재들이 모인다는 제국 첩보부였다. 그들의 심계를 통상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면 곤란했다.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혹시나 싶어 델핀 선배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 ‘무도회의 여왕’도?”
“당연히 제국 첩보부 소속이지, 아카데미 지부장.”
역시나, 나는 침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도회의 여왕’, 평민 출신으로 귀족들이 바글바글한 사교계를 장악한 그녀에 대해서는 나도 들은 바가 있었다.
미모도 미모지만, 그 정보력과 심계가 보통이 아니라고 들었다.
도대체 평민 출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궁금하던 차였다. 그런데 델핀 선배의 말을 들으니, 그 모든 의혹이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 모든 정보를 뇌에 꾹꾹 눌러담았다. 새삼스레 델핀 선배가 대단해 보였다.
수렵제 이후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로서 영 위엄을 세우지 못하던 그녀였다.
그런데 극비 중에 극비라는 제국 첩보부의 지부까지 알고 있을 정도였으니, 다시금 그 권세가 실감이 났다.
그녀야말로 제국 5대 귀족 가문의 후계자인 것이다.
그렇게 델핀 선배의 정보력에 절로 감탄이 나오는 한편으로, 나는 일말의 죄악감 또한 느끼고 있었다.
재차 말하지만, 제국 첩보부에 대한 정보는 극비였다.
따라서 외부에 유출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아무리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최측근이라면 몰라, 가문 소속도 아닌 내게 그러한 정보를 건네줄 의리는 없는 셈이었다.
오히려 내게 정보를 건넴으로써 손해를 볼 가능성만 농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델핀 선배는 내게 서슴없이 조언을 건네주었다.
그 까닭 없는 호의가 두렵게 느껴졌다.
요즘 들어 내가 여러 활약을 하긴 했지만, 내 본질은 시골 자작가의 차남에 불과했다. 검사로서도 아직 완숙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그런데 델핀 선배는 내게 우정을 넘어선 호의를 베풀고 있었다.
그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나는 무심코 델핀 선배에게 묻고 말았다.
“델핀 선배.”
“……?”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연구실을 나서려던 델핀 선배는, 내 부름에 곧장 멈춰섰다.
그 진홍빛 눈동자에서는 의문이 느껴지고 있었다.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눈동자였지만, 지금은 그러한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었다.
나는 보다 진중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왜 저한테 그렇게 매달리세요?”
다소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여과 없이 그 의문을 뱉어냈다.
그래야만 델핀 선배의 진심을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멀거니 나를 바라보고 있던 델핀 선배는, 이내 피식, 하고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사근사근 걸어 내 귓가에 속삭였다.
“……당연히, 이기기 위해서지.”
무엇을, 이라고 되묻기도 전이었다.
내 눈이 흘깃 델핀 선배의 핏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내 입이 곧장 다물어졌다.
이글거리는 감정의 격류가 델핀 선배의 눈동자에서 끓어올랐다. 승부욕, 집착, 맹신, 그 모든 것들이 뒤섞이며 새로운 종류의 심리를 토해냈다.
광증(??), 미소 지은 채 눈빛이 죽은 델핀 선배의 모습은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질척이는 목소리가 고막 위로 죽죽 늘어졌다.
“당신 편에 서면, 나는 이길 수 있잖아? 그러면 좋아, 승리는 모든 것이거든. 패배도 마찬가지고, 나는 이길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어.”
꾸욱, 하고 내 어깨를 붙잡은 델핀 선배의 가녀린 손가락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옅은 통증이 일 정도였다.
그러나 내 미간을 찌푸려지지 않았다. 그보다는, 지금 델핀 선배가 보여주는 감정의 밑바닥이 더욱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꼬리를 흔들라고? 좋아, 얼마든지 흔들어 줄게. 당신 발에 입 맞추고, 아니, 발이 아니라 어디라도 그럴 수 있어… 벗으라면 벗고, 무릎 꿇으라면 꿇을게. 그 대신, 반드시 이겨.”
그 말을 끝으로, 델핀 선배는 탁, 하고 내 어깨를 밀치듯 내게서 멀어졌다.
그때까지도 나는 얼떨떨한 눈빛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 멍청한 시선이 델핀 선배를 향했다.
마치 방금 전 보여주었던 모습이 거짓말이라는 듯, 그녀는 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러기만 하면, 나는 평생 당신의 소유물로 살 거야… 그러니까, 노력해줘?”
델핀 선배는 그렇게 마지막으로 무릎 꿇고 내 발에 입 맞춘 뒤, 떠나갔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 동안이나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 때, 비로소 정신을 차린 내 입에 쓴웃음이 머금어졌다.
“……최선을 다해보죠.”
여전히 델핀 유르디나는 델핀 유르디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슬슬 재료가 모이고 있었다.
**
연구동을 떠나, 터벅터벅 아카데미 내의 외진 곳을 거닐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내 눈에 반가운 모습이 눈에 띄었다. 붉은색이 감도는 머리카락을 가진 사랑스러운 소녀가 그 자리에 있었다.
엠마였다. 그녀는 바구니에 무언가를 넣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나는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려다 그만두기로 했다.
민폐였다. 귀족인 레토도 나와 친하다는 이유로 그 꼴을 당했는데, 평민인 엠마에게 내가 가까이 갈 수는 없었다.
절로 쓴웃음이 머금어졌다. 지금은 참아야 할 때였다.
어차피 한 달 이내로 사건은 결판이 날 터였다. 그렇게 발걸음을 돌리려던 나는, 문득 시야에 거슬리는 광경이 있어 우뚝 멈춰 섰다.
일련의 여학생들이 엠마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귀족으로 보이는 무리들, 무언가 불길했다.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곧 입증됐다.
투닥거리는 말소리가 들리더니, 곧 실랑이가 벌어졌다. 멀리서 듣기에도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왜 그래? 그 하급 귀족이 네 왕자님이라도 되냐?”
“얼른 따라하라니까? ‘이안 페르쿠스는 주제도 모르고 나대는 병신에 그 가문은 근본도 없는 시골 촌놈 모임이다.’라고.”
키득거리며 비웃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내가 나서면 과연 엠마에게 도움이 될까?
아무리 나라도 종일 엠마의 곁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괜히 내가 나섰다가 괴롭힘이 심화된다면 본말전도였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절대 싫어!”
결기 어린 엠마의 외침이 울려 퍼졌고, 그와 함께 짝,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엠마가 비명을 내지르며 땅 위로 쓰러져 버렸다. 바구니가 떨어지며 그 내용물을 토해냈다.
여학생들 중 하나가 엠마의 뺨을 후려갈긴 것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뺨을 얻어맞고, 처량하게 엎어지는 엠마를 보자 내 뇌리에 정전이 일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단지, 툭 하는 환청이 들렸을 뿐이었다.
내 인내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