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15)
* * *
사랑에 빠진 소녀의 세계는 일변한다.
이 진리에 예외는 없었다. 물론 엠마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 달 전, 엠마는 어느 사내에게 반해 버렸다. 그때부터 그녀의 일상은 너무나 달라져 버리고 말았다.
기말고사가 끝났을 무렵의 일이었다.
종일 책에 파묻혀 살던 엠마에게도 비로소 여유가 찾아왔다. 본래라면 연금술 공식이나 물약 조제법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요즘 엠마는 공방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길 때가 더 많았다.
그녀가 떠올리는 대상은 대개 하나뿐이었다.
이안 페르쿠스, 한때 친구였고 지금은 엠마의 첫사랑이 된 남자.
그는 죽음을 앞두었던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기도 했다. 무려 1만 골드가 넘는 마수의 시체를 공물로 바쳐, 중상을 입은 그녀를 구원해준 사내였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사내를 마주했을 때의 기억도 떠오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엠마의 가슴은 고장 난 것처럼 콩닥거렸다.
내게는 그럴 가치가 없다고, 하찮은 평민 계집애에 불과할 뿐이라며 엠마는 울부짖었다. 그러나 이안은 조금도 후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도리어 살아가라고, 행복하라고 말해주던 그 목소리에는 어떠한 사심조차 없어 보였다.
사내는 진심이었다. 그래서일까, 엠마 또한 그날부터 진심이 되고 말았다.
진심으로 이안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공방에 틀어박혀 새로운 물약을 조제하는 것만이 삶의 낙이던 엠마의 인생에, 느닷없이 사내 하나가 나타난 순간이었다.
그날부터 엠마의 사고방식은 일변했다.
예전에 그녀는 물약을 만들 때마다 경제성을 고려하곤 했다.
아카데미에서 장학금이 나오긴 하지만, 평민 출신이라 늘 빠듯한 생활을 하던 엠마였다.
그녀에게 있어 물약은 유일한 생계수단이나 다름없었다. 물약을 만들 때마다 재료비를 고려할 수밖에 없던 이유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엠마는 이안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자나깨나 그러한 생각에 골몰하느라 나머지 문제는 신경조차 쓸 수 없을 정도였다.
신분도 미천하지, 가난한 약초꾼의 딸이라 돈도 없었다. 그나마 생김새는 예쁘장하긴 하지만, 이안의 곁에는 그에 못지않은 여인들이 널려 있었다.
당장 셀린과 세리아만 하더라도 2학년 검술학부의 두 꽃이라 불리고 있지 않은가.
그처럼 잘난 점이 없는 엠마가 이안에게 보일 수 있는 헌신은 하나뿐이었다.
연금술, 그녀의 유일한 특기였다.
엠마는 수많은 시약들을 연구하고, 어떤 물약이 이안에게 더욱 도움이 될지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재료비가 줄줄 새어나가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밥이야 굶으면 됐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불편을 감수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이안은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에 관한 헌신만큼은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엠마가 생각하기로, 이안은 조금 더 좋은 대접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더 좋은 곳에서, 더 좋은 대우를 받으며, 더 좋은 것을 먹고, 더 좋은 침실에서 잠들었으면 했다. 이를 위해서라면 엠마는 얼마든지 제 일상을 희생할 용의가 있었다.
엠마의 마음은 늘 한결같았다. 이안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언제나 진심으로 바랐다.
그를 위해 평민 계집애의 하잘 것 없는 인생을 바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럴 생각이었다. 그만큼이나 엠마는 이안을 사랑했다.
첫사랑은 이토록 맹목적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헌신적인 성격이던 엠마였다.
이안이 실습 파견을 나갔을 때는 매일 밤 애타는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혹여 어디 다치지는 않았을까, 물약을 조금이라도 더 챙겨주었어야 좋았으리란 후회에 그녀는 애가 닳았다.
그러다 이안이 단독으로 마인을 토벌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기도 했다. 그날 엠마는 그야말로 뛸 듯이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아카데미에 실려 온 이안은, 중상을 입은 채 혼절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엠마의 낯빛은 창백히 질려 버렸다.
하루하루가 지루할 틈이 없었다. 이안에 관한 자그마한 소식 하나하나에 엠마는 천당과 지옥 사이를 오고갔다.
그러니 최근 들어 엠마가 침울해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설마 황녀를 건드릴 줄이야.
엠마는 이안을 믿었다. 그에게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을 터였다. 나쁜 마음으로 황녀를 도발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엠마는 우울감을 이겨내기가 힘들었다. 도리어 이안의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답답했다.
분명 이안은 잘못하지 않았을 텐데, 온 아카데미가 그를 욕하고 있었다.
이안에 대해 도대체 뭘 안다고 그러는 걸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인을 단독으로 토벌했다며 소리 높여 그를 찬미하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단 하루만에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다니.
화가 났다. 식재료를 송송 써는 손에 무심코 힘이 들어갔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려고 해도, 주위에서 이안을 비방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엠마는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당사자도 아닌 그녀가 그럴진대, 지금 이안을 얼마나 힘들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온갖 중상(中?)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을 이안만 생각하면 엠마는 가슴이 아렸다. 속이 상해 어떻게든 그를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엠마는 도시락을 만드는 중이었다.
최근 생활비가 빠듯하다 보니 비싼 식사를 대접할 수는 없지만, 정성을 들인 요리를 대접하면 그나마 위로를 전할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홀아비 밑에서 자라 어린 시절부터 살림을 도맡았던 엠마였다. 요리 솜씨는 믿을 만했고, 그녀는 곧 먹음직스러운 닭고기 수프를 완성할 수 있었다.
휴우, 하고 엠마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녀의 손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랜만에 하는 요리라 걱정했는데, 냄새를 맡아보니 나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사랑하는 사내를 찾아가는 일뿐이었다.
이안을 만날 생각에 엠마는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성들여 도시락을 준비하는 스스로에게서, 남편에게 식사를 준비하는 아내의 모습을 겹쳐보기도 했다.
물론 헛된 망상이었다. 곧 엠마의 입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평민 주제에 귀족과 결혼할 꿈을 꾸다니, 간도 컸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더라도 귀족과는 빠지지 않기로 다짐했었는데.
세상일은 참 알 수가 없었다. 엠마는 그렇게 생각하며 수프를 보온병에 옮겨 담았다.
미리 준비한 바구니 안에 수프를 담은 보온병이 들어섰다. 그리고 그 위로 차곡차곡 쌓이는 물약병들, 전부 엠마가 이안을 위해 만든 것들이었다.
바구니 안이 그득 차오르자, 엠마는 그제야 만족했는지 나갈 채비를 했다. 지금 이안이 어디에 머무르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정 찾을 수 없다면 기숙사에 맡기면 그만일 터였다. 그토록 가벼운 마음으로 나선 외출이었다.
그런데 설마 시비가 걸릴 줄이야, 엠마의 눈빛에 난감함이 스쳤다.
사실, 이안과 친하다는 이유로 최근 엠마를 괴롭히려는 시도가 몇 번 있긴 했다. 엠마는 그럴 때마다 번번이 자리를 피했다.
어차피 엠마는 평민 계집애에 불과했다. 그녀를 괴롭히겠다고 이곳저곳 들쑤시기도 애매했다. 소문에 따르면 그녀가 이안의 소중한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있긴 해도 말이다.
그래봐야 귀족에게 있어 평민 계집은 하룻밤의 불장난 상대에 불과했다. 굳이 엠마를 찾아가면서까지 괴롭힐 필요는 없었다.
다만 언젠가 마주치면 제대로 손을 봐줘야겠다고, 몇몇 이들이 벼르고 있던 그때였다.
마침 엠마가 귀족 일당의 눈에 띄고 만 것이다.
대여섯 명쯤으로 구성된 무리가 엠마에게 다가섰다. 키득거리는 소리가 벌써부터 불길했다.
그 고급스러운 원단을 사용한 옷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엠마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신분의 여학생들이었다.
무심코 주눅이 든 엠마는 그만 눈을 내리깔고 말았다.
평민과 귀족, 그 신분의 격차는 어디에서나 여실했다.
심지어 아카데미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엠마가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자, 귀족 여학생들은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잔인한 미소가 그들의 입가에 어렸다.
여학생 중 하나가 나서 엠마에게 물었다.
“야, 네가 그 ‘엠마’야?”
잠시 고민하던 엠마는, 재빨리 자리를 피하는 쪽을 택했다.
일일이 대응해 봐야 그녀만 곤란해질 뿐이었다. 하지만 바삐 걸음을 옮기려던 엠마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귀족 여학생 중 하나였다. 그녀가 키득거리며 엠마에게 물었다.
“이안, 그 또라이가 1만 골드 넘는 돈을 주고 네 처녀를 샀다던데… 반반하긴 하네, 1만 골드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느닷없는 모욕이었다. 엠마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달아올랐다.
그녀의 어깨가 곧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모욕감도 모욕감이었지만, 무엇보다 이안을 그런 인간으로 매도하는 말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싫었다.
엠마의 눈동자에 선연한 적의가 떠올랐다.
하지만 전투 능력도 없고, 신분도 평민에 불과한 그녀가 귀족 여학생들에게 대항할 수단은 전무했다. 킥킥거리는 조소가 이어졌다.
“앙칼진 맛이 있네… 그런데, 뭐 어쩌려고?”
“평민 따위가 뭘 할 수나 있겠어? 그냥 노려만 보는 거지.”
그 말대로였다.
엠마는 비참한 심정이었지만, 이내 입술을 짓씹으며 마음을 가다듬어야 했다.
화라도 냈다간 저들이 원하는 대로 일이 틀어질 가능성이 컸다. 지금은 일단 자리를 피하는 쪽이 급선무였다.
“……아가씨들, 이만 지나가겠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자그맣게 의사를 전달한 엠마였지만, 귀족 여학생들은 조금도 물러날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더욱 삐뚤어진 미소를 지어 보였을 따름이었다. 엠마를 둘러싼 그들의 눈에 은근한 희열이 맺혔다.
약자를 단체로 괴롭히는 기쁨, 얼마나 달콤한가.
저열한 인간의 본성이 귀족 여학생들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조금 더, 더 괴롭히라고.
“불쌍하긴 불쌍하네… 솔직히 얘는 죄 없잖아? 이안 그 새끼가 감히 황녀 전하를 건드릴지 어떻게 알았겠냐고.”
“그럼, 조금 봐줄까?”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여학생 중 하나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엠마를 비롯한 일동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모양 빠지게 우리가 평민 계집애 하나를 괴롭혀야겠어? 그냥, 이렇게 말해. ‘이안 페르쿠스는 주제도 모르고 나대는 병신에 그 가문은 근본도 없는 시골 촌놈 모임이다.’ 그럼 지나가게 해줄 테니까.”
당연히 엠마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감히 상상 속에서라도 이안을 욕해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엠마가 다시 한 번 걸음을 옮기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귀족 여학생들은 도무지 그녀를 보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탁, 하고 엠마의 어깨가 붙들렸다.
“야, 평민… 시키는 대로 하지? 네 아버지, 약초꾼이라며? 우리 가문 기사가 잠깐 지나가다 죽여도 아무도 모를 텐데.”
“기사까지 갈 필요가 뭐 있어? 사병이 가도 끝날걸?”
점입가경이었다.
이제는 대놓고 신분을 빌미로 협박을 가하고 있었다. 당연히 교칙 위반 사항이었고, 심하면 퇴학까지도 갈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렇게 시시덕대는 귀족 여학생들 중 처벌을 두려워하는 이는 없었다. 아카데미의 오랜 관례상, 평민이 귀족을 고발한 사례는 손에 꼽기 때문이었다.
설령 고발하더라도 나중에 보복을 가하면 그만이었다.
말마따나 약초꾼 하나쯤은 죽여 버려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세상이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엠마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분했다. 평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유일한 가족의 목숨을 두고 협박을 당해야 하는 이 현실이.
심지어 저들은 엠마가 사랑하는 사내마저 욕보이고 있었다. 억울하고 화가 나서 눈물이 맺힐 지경이었다.
엠마가 그러든 말든, 여학생들의 조롱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왜 그래? 그 하급 귀족이 네 왕자님이라도 되냐?”
“얼른 따라하라니까? ‘이안 페르쿠스는 주제도 모르고 나대는 병신에 그 가문은 근본도 없는 시골 촌놈 모임이다.’라고.”
엠마의 연녹색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지간하면 참으려고 했지만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엠마는 욕을 먹어도 됐다.
평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안은 아니었다.
누구보다 귀족다운 그였다. 신분만 믿고 비열한 짓을 일삼는 무늬만 귀족 따위에게 욕을 먹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엠마의 눈에 섬뜩한 결기가 서렸다.
“……절대 싫어!”
엠마가 처음으로 뱉은 거절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여학생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키득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엠마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여학생 하나가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엠마와 지척에 이르자, 그녀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짝, 하고 울려 퍼지는 소리.
엠마의 눈앞에 새하얀 불꽃이 튀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엠마는 이미 땅바닥 위에 엎어져 있었다. 저 멀리 떨어져 내린 바구니에 그녀의 시선이 닿았다.
물약병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닭고기 수프를 담은 보온병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다 이안을 위해 만든 것들이었다.
끼니를 거르고, 빠듯한 살림살이에도 어떻게든 아껴 가며 만든 엠마의 작품들.
그러나 그조차도 귀족 여학생들이 보기엔 하잘 것 없는 물건에 불과했다.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트리던 여학생 중 하나가 바구니를 가리켰다.
“이야, 어디서 약 냄새가 나나 했네… 뭐야, 그 하급귀족한테 주려던 건가?”
허망한 눈빛으로 엠마의 손이 바구니를 향했다. 그러나 행동은 여학생 쪽이 더 빨랐다.
엠마의 따귀를 날린 그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바구니를 향해 팔을 뻗으려 들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어디 한 번 구경이나 해, 볼… 까……?”
푸슉, 하고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내렸다.
여학생의 눈동자가 멍청해졌다. 분명 팔을 뻗었는데, 없었다. 그녀의 팔이 있던 자리에선 피분수만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어라, 이럴 리가 없는데.
순간적으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여학생의 시선이 땅바닥을 훑었다.
그녀의 팔은 그 위를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보이는, 어느덧 지반을 파고들며 내리꽂힌 손도끼.
“으, 아, 으…….”
갑작스레 팔을 잃은 여학생의 입에서 공포에 젖은 음성이 새어나왔다.
깨닫지도 못했다. 손도끼가 날아들어 팔을 절단할 때까지, 여학생 중 그 누구도 이를 눈치 챈 사람이 없었다.
실력 격차가 그만큼 명백하다는 뜻이었다.
“꺄, 꺄아아아아악! 내, 내 팔… 팔이이이이이익!”
여학생은 그제야 찾아온 맹렬한 통증에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그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남은 팔 하나로 어깻죽지부터 사라진 제 팔의 흔적을 더듬거렸다.
잔혹한 광경이었다.
여학생들뿐만 아니라, 엠마의 눈까지 부릅떠졌다.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기색이었다.
그렇게 멍하니 울부짖는 여학생을 바라보던 그들의 등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야.”
검은 머리카락이 인상 깊은 사내였다. 그의금빛 눈동자가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타오르는 살의가 송곳처럼 심장을 파고들었다.
“너희 뭐하냐?”
신들린 도끼 투척 솜씨, 망설임 없이 가해지는 폭력,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
그 모든 요소가 한 사내를 가리키고 있어서, 여학생들의 호흡이 일순 정지했다.
이안 페르쿠스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