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16)
* * *
일순 세상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잘려나간 팔이 땅을 굴렀다. 주륵주륵 흘러나오는 피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학생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남은 한 손으로 절단면을 틀어막았다.
손가락 틈새로 핏물이 울컥이며 배어나오고 있었다. 통증을 애써 참아내는 그녀의 눈에 핏발이 섰다.
엠마를 괴롭힐 때까지만 해도 여학생들의 기세는 등등했다. 그러던 그들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릴 때까진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때로는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곤 했다.
허공에 피분수가 내뿜어지고, 핏물이 뜨끈한 비린내를 피워 올릴 즈음에는 여학생들도 내심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안 페르쿠스는 미친놈이다.
평민도 아니고, 귀족이었다. 그런데 고작 평민의 뺨 한 대를 날렸다고 단숨에 팔 하나를 잘라내 버렸다.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짓은 아니었다.
귀족을 건드리면 비단 아카데미 내에서만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심하면 가문 간의 갈등으로 불거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특히 여학생들이 건드리고 있던 것은 고작 평민 계집애 하나다.
시골 약초꾼의 딸 따위, 아카데미에 입학하지만 않았어도 죽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을 이들이 바로 귀족들이었다.
평민 좀 괴롭혔다고 이러는 이안의 사고방식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내 그들은 내심 잊고 있던 사실 몇 가지를 떠올려야 했다.
첫 번째, 애초에 이안 페르쿠스는 황녀를 건드린 상태였다. 그러니 귀족 가문들과 갈등이 빚어지든 말든 관심도 없을 가능성이 컸다.
어차피 황가를 건드린 순간 페르쿠스 가문의 몰락은 확정적이었으니까.
두 번째, 엠마는 이안 페르쿠스가 무려 1만 골드가 넘는 비용을 들여 되살려낸 여자였다. 소유권을 주장하더라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다만 여학생들이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 몇 가지 있었다.
우선 이안이 엠마를 아끼든 말든 그녀는 평민에 불과했다. 불장난 상대가 귀족한테 대들다가 한 대 맞았다고 해서 팔을 자르는 인간은 없었다.
일단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 여학생들이 듣기로 이안은 퇴학을 두려워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황녀를 따로 찾아가 퇴학만은 막아달라고 요청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는 믿을 만한 정보원으로부터 동시다발적으로 전해진 소식이었다.
여학생들은 그 정보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황실을 건드렸더라도, 아카데미 졸업장만 있으면 가문이 몰락해도 성국이나 열왕국에서 밥벌이는 할 수 있을 테니까.
어차피 황족에게 물을 뿌린 정도로는 퇴학에 이를 수 없었다. 이안이 황녀를 도발할 때 수위를 조절한 까닭은 그 때문이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앞에 놓인 현실은 그 모든 판단을 상회했다.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그들 중 하나의 팔이 처량히 땅 위를 구르고 있었고, 그리고 이는 높은 확률로 남은 이들의 미래일 터였다.
선연한 공포가 여학생들의 심상을 사로잡았다.
이안 페르쿠스는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너무 느리지도, 또 빠르지도 않은 속도감에 여학생들의 낯빛이 점점 더 창백해졌다.
감히 대항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네임드급 마수를 토벌하고, 마인을 쓰러트렸으며, 황녀의 호위기사 넷을 제압한 괴물이었다. 고작해야 아카데미 중위권에 불과한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적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들은 지금껏 그래왔듯 또 다른 힘에 기대기를 택했다.
“……그, 그만!”
발악처럼 여학생 중 하나가 소리를 내질렀다.
이안의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그러나 여학생을 바라보는 그 금빛 눈동자에서는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마지막으로 이야기나 들어보겠다는 태도였다.
여학생은 직감했다. 이것이 최후의 기회라고.
지금 이안을 설득하지 못하면 피보라가 일 것이다. 기껏해야 평민 계집애 하나의 뺨을 때렸다고, 이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고귀하게 나고 자란 그녀들과 평민 계집애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격차가 있었다. 감히 그녀들에게 손찌검을 했다고 평민의 팔을 자를 수는 있어도, 그 역은 성립해서는 안 됐다.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고작 그까짓 일로 변명을 늘어놓아야 한다는 사실마저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느껴졌다.
여인은 저 귀족의 행색을 한 야만인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자 했다. 그녀의 입에서 열변이 토해졌다.
“미, 미쳤어? 우리는 귀족이야! 저, 저 계집애는 평민이고! 아무리 평민이 마음에 들었더라도, 당신도 귀족이라면 최소한의 사리 분별은……!”
그러나 그 말은 채 이어지지도 못했다.
은빛의 섬광이, 공간을 절단한다.
언제 다가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사내가 두어 걸음을 내딛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여학생의 어깻죽지에는 실금이 가 있었다.
부릅떠진 눈으로, 여학생은 제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은빛 실금 사이로 핏물이 배어나왔다. 그것은 전조에 불과했다.
푸슉, 하고 터져 나오는 핏물이 다시금 땅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뒤늦은 통증이 여학생의 뇌리를 새빨갛게 달구었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끄,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여학생은 주저앉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제 팔이 사라진 자리를 황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안은 그녀를 기다려 줄 생각이 없었다.
콱, 하고 여인의 명치에 사내의 발이 틀어박혔다.
거침없는 발차기였다. 단숨에 흑색 궤적을 그리며 틀어박힌 일격은, 고요한 충격파를 전달했다. 이를 중심으로 여인의 몸이 구겨지듯 꺾였다.
여인의 신형이 튕겨나가듯 땅을 굴렸다. 그러고도 충격을 전부 흘려낼 수가 없어 그녀의 몸이 땅 위로 몇 번 튀었다.
팔에서 흘러넘치는 핏물이 그 흔적을 허공에 그렸다. 팔 한쪽을 잃은 여체가 흙바닥 위를 구르며 핏자국을 남겼다.
명치를 강타당한 여인은 꺼윽, 꺽, 하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제 명치를 쥐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팔이 하나밖에 남지 않아 조금 모자란 느낌이었다.
남은 여학생들은 셋, 그들의 낯빛은 새하얗다 못해 창백했다. 그들의 얼어붙은 시선이 이안을 향했다.
그는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
그제야 세 여인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서로를 향했다.
상대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미친놈이었다. 최소한 기존의 상식으로 설득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어떻게든 무력으로 제압하는 수밖에, 여학생들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여인의 발이 땅을 박찼다.
나머지 하나는 마법사였는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창인 듯했다.
이안은 여전히 걸음을 옮기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그들이 쇄도하든 말든 그가 해야 할 일은 하나인 것처럼.
그리고 그와 여학생 하나의 신형이 마주친 그 순간.
서걱, 하고 거친 올려베기가 검을 내려찍으려던 여학생 하나의 팔을 절단했다. 핏물이 튀기기도 전, 이안은 그 반탄력으로 역방향으로 돌아섰다.
두 번째로 다가오던 여학생의 눈동자에 경악이 스쳤다.
사내가 너무 빠른 속도로 그녀의 품을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탓에 이안은 등을 돌리고 있었고, 여인은 이만하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내의 팔꿈치가 그녀의 명치를 찍어버리기 전까지는.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여학생의 머릿속에 천둥이 쳤다.
갑작스런 통각에 근육이 제멋대로 수축했다. 뻣뻣해진 몸뚱아리는 뇌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할 수 없었다.
그 잠깐의 빈틈이면 충분했다.
이안의 신형이 다시 정방향으로 회전하며, 검극이 여인의 복부를 관통했다.
울컥, 하고 핏물이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사내는 그대로 힘을 주어 전진했다. 내달리는 그의 앞에는 방패막이처럼 꿰뚫린 여학생의 몸이 자리하고 있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대응에 마법사의 눈동자에 혼란이 감돌았다.
아직 실전 경험이 일천했던 탓이었다. 그 결과는 곧 드러났다.
팍, 하고 핏물이 튀었다. 아직 이안과 몇 걸음 정도의 거리를 남겨두고 있던 마법사의 눈동자가 멍청해졌다.
손도끼였다. 지반에 박혀 있던 도끼가 멋대로 마법사의 어깨를 내리찍은 것이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마법사는 비명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안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이게 무, 슨…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사내의 검이, 여인의 허벅지를 절단한다.
마법사의 몸이 단번에 균형을 잃었다. 기우뚱 기울어 버린 그녀의 몸은 다시는 바로 세워지지 않았다.
철퍽, 하고 핏물이 쏟아져 내린 땅바닥에 마법사의 몸이 엎어졌다.
어느덧 복부를 관통한 칼날로부터 자유로워진 여학생 하나가 그 옆으로 나란히 포개졌다.
몇 초 필요하지도 않았다. 남은 것은 핏물과 비명, 그리고 아직도 신체로부터 떨어졌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꿈틀대는 팔다리뿐.
“내, 파, 팔이… 팔이이이이익!”
“끄으, 흐으… 아으으으윽!”
“다, 다리가 없어… 아, 아파아…….”
이안은 성큼성큼 걸어, 마법사의 어깨에 꽂힌 손도끼를 뽑아냈다.
뒤늦은 피분수가 흙바닥을 검붉게 물들였다. 느닷없는 통증에 여인의 몸이 경련했지만, 이안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다만 아직까지도 포기하지 못한 여학생이 하나 남아 있었다.
“복수, 크흐흐… 복수, 할 거야…….”
이안의 금빛 눈동자가 슬쩍 등 뒤를 향했다.
그곳에는 처음으로 팔을 절단당한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 여인이 새파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증오와 원독이 뚝뚝 떨어지는 푸른 눈동자가 이안을 응시했다.
“퇴, 퇴학… 퇴학 시켜줄게, 응? 네 인생을 아주 끝장내 주겠다고… 드, 듣고 있어?!”
사내는 잠시 침묵했다.
한참이나 우뚝 멈춰 서 있던 그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 직후였다. 그가 다시금 저벅저벅 걸어 여인의 앞에 섰다.
귀족 여학생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는 강렬한 복수심이 들끓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통증을 이겨내기가 힘든지, 억지로 말아 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안은 턱을 쓰다듬다가, 그녀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루페시아 백작 영애.”
“그, 그래!”
금빛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
싸가지 없는 귀족 영애의 전형처럼 생긴 여인이었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사실에 신이 났는지,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네까짓 게 감히, 나를 건드려? 너, 퇴학당하고 싶지 않다며? 으흐흐… 내, 내가 퇴학시켜 줄게! 징계위원회를 소집해서, 모든 인맥과 권력을 전부 동원해서라도……!”
그러나 루페시아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멍청해졌다. 어딘가 익숙한 감각이 느껴졌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청각이 멀어진다. 다만 어깻죽지에서 느껴지는 위화감만이 선명했다.
루페시아의 푸른 눈동자가 공포로 젖어들었다.
굳이 시선을 옮길 필요도 없었다.또 다시 뿜어져 나오는 피분수가 그 결과를 짐작케 했으니까.
루페시아의 남은 팔 하나마저 떨어져 나간 것이다.
불에 달군 쇠꼬챙이가 척추를 관통하는 그 느낌, 차라리 비현실적이라 느껴질 정도라 한동안 루페시아는 반응을 하지 못했다.
그보다 먼저 반응한 것은 그녀의 목청이었다.
“흐으, 꺄… 꺄아아아아아아아악!”
루페시아는 재빨리 그 절단면을 틀어막으려 했지만, 팔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 푸른 눈동자에 두려움이 가득 차올랐다. 여인은 엉덩이를 뒤로 끌면서, 어떻게든 사내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 무심한 금빛 눈동자로부터.
하지만 그 시도는 곧 좌절되고 말았다.
서걱, 하고 울리는 섬뜩한 소리.
이제는 허벅지였다. 루페시아의 오른다리가 절단되며 남긴 단말마였다.
“꺄으, 흐으… 꺄, 꺄아아아아악! 으으, 끄으, 흐으, 으흐……!”
과호흡, 공포를 넘어 실질적인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었다. 뇌리가 새하얘진 루페시아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잘못 건드렸다.
그러한 명백한 결론만이, 루페시아의 사고회로를 지배했다. 세차게 떨리는 동공이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사내의 금빛 눈동자는, 소름이 돋도록 무감정했다.
단지 그는 서늘한 목소리를 한 마디 뱉었을 따름이었다.
“……그러십시오.”
그 담백한 대답에, 루페시아의 눈동자에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잘못 건드렸다, 진심으로.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절절한 후회를 느껴야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