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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53화 (153/649)

〈 153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17)

* * *

분노란 휘발적인 감정이다.

타오를 때는 그 무엇보다 뜨겁지만, 일단 진정하고 나면 금세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머리가 뜨거워지면 일단 침묵하는 편을 선호했다.

화가 나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나는 제국의 귀족이었고,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실력 있는 검사였다. 그 행위에 따르는 책임의 무게는 여타의 시민들과 비교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워낙 무던하게 지내왔던 탓일까, 나는 단 한 번도 분노가 극에 이르렀던 적이 없었다.

오늘 처음으로 알았다.

분노는 뜨거운 감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정도가 깊어질수록 뇌리에 이는 풍랑은 점점 더 잠잠해졌다.

고요하고 차갑다.

다만 섬뜩할 만큼 시린 적의가 가슴을 지배했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처럼 내 사고는 상대를 도륙할 수단만을 도출했다.

엠마가 뺨을 맞고 쓰러지는 순간 떠올렸다.

신전의 집중치료실에서 보았던, 창백한 낯빛의 여인.

그녀의 아버지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내 탓일지도 몰랐다. 아니, 내심은 내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심상이 겹쳐진다.

쓰러진 여인의 위에 눈발이 떨어졌다. 핏기 없는 얼굴과, 곳곳에 남은 상처. 마지막까지 손에서 놓지 않은 검이 덩그러니 처량했다.

여인은 말없이 귓가에 속삭였다.

“……살아요.”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질문하고 싶었지만, 차마 뱉어지지 않았다.

기억은 또 다시 일변했다. 색을 바꾼 계절이었다.

타닥거리는 잔불 앞에 사내가 서 있었다. 엄숙한 분위기로, 사제들과 병사들이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올렸다.

천신에게 영혼을 보내는 제의였다.

아무 말도 없이 불꽃을 응시했다. 나무로 층층이 쌓인 그 단 안에는, 여인의 시체가 있을 터였다. 사내는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틀렸다.

너무나 안일했다. 어째서 깨달음은 늘 뒤늦게 찾아오는 것일까, 후회하지 않으려면 그 누구보다 잔혹해져야 했다.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도록.

물기 어린 금빛 눈동자가,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흐릿해진 풍경이 흙먼지를 지나 사막을 향했다. 그곳에서도 여인이 서 있었다.

그 감겨진 눈은 뜨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맹인이었다.

우르릉, 거리는 소음이 대지를 울렸다. 쉭쉭거리는 거슬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에서 산맥이 움직이고 있었다. 살아 움직이는 검은 그림자, 오메로스의 칠죄성(七??) 중 하나였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수천에 이르는 군세 사이를 침묵과 공포가 가로질렀다.

새파랗게 질린 낯빛이 수두룩했다. 도무지 전의를 북돋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사내마저 저 거체를 앞두고는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일순 멍청해졌다.

감히 ‘승리’라는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은 여인만큼은 평온한 기색이었다. 그녀는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떠나세요, 경.”

“하오나…….”

화들짝 놀란 사내가 고개를 내저으려 했지만, 여인의 의지는 완강했다.

“당신에게는 할 일이 남아 있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사내는 입술을 뗐다가, 닫았다.

그의 고개가 힘없이 떨구어졌다.

“……죽어도 함께 죽겠습니다.”

“그렇다면 명령이에요.”

그 나지막한 선언과 동시에, 허공에 수없이 많은 도형들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밀도 높은 마력이 습기처럼 물리법칙을 침범했다. 대기가 웅웅 떨리고 있었다. 대마법사의 저력이란 이토록 위대했다.

여인은, 웃었다. 그 눈만큼은 볼 수 없었지만.

“내 업보를, 내가 감당하는 것뿐이에요. 그러니 부탁이에요, 경…….”

그렇게 저주처럼 가슴을 파고드는 목소리.

“……부디 살아주세요.”

히히힝, 하고 말이 우는 소리가 텅 빈 대지에 울려 퍼졌다. 구슬픈 울음소리였다.

달리고 달리면서, 사내는 이를 악물었다.

나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도망쳐야만 했다. 함께 죽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한 삶이었다.

다시는, 다시는 도망치지 않으리라.

다시는 물러나지 않으리라.

되뇌이는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려 퍼졌다.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소중한 이들이 하나둘씩 스러져갔다.

그 이름을 하나하나 가슴팍에 새기고, 지우지 않을 흉터로 남겨 비틀비틀 걸어가던 사내가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와중에도 그 금빛 눈동자만큼은 선연했다.

죽여야 해.

흐릿한 속삭임이었지만 내 귓가를 간지럽히는 그 소리는 너무나 명확했다.

죽여야만 해, 아니라면 팔다리를 찢어놔.

다시는 반항할 수 없도록.

문득 시야가 되돌아왔다.

덜덜 떨리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여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팔다리가 하나씩 떨어져 나가, 이제는 다리 하나밖에 남지 않은 비참한 몰골.

잔혹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놀라울 만큼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는 스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그랬지?”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이내 루페시아 영애의 표정이 멍청해지더니, 곧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무, 무슨 소리를… 마, 말할게요! 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내 검이 치켜들어지는 순간, 그녀는 곧바로 몸을 웅크리며 최선을 다해 지혜를 짜내기 시작했다.

출혈이 심했다. 아무리 단련된 아카데미 학생이더라도 저 정도라면 빈혈이 올 터였다.

머리가 어지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머리를 굴리던 루페시아 영애는, 곧 깨달았다는 듯 외쳤다.

“……신문부!”

검을 치켜들고 있던 내 팔이 우뚝 멎었다.

신문부,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제국 첩보부의 지부라고 했던가.

흐, 하고 내 입에서 되다 만 웃음이 흘러나왔다.

가소로웠다.

“시, 신문부가 그랬어요… 퇴, 퇴학을 당하기 싫어하실 거라고! 은근히 황녀 전하의 마음에 들려면 당신 주변 사람들을 괴롭혀야 한다고… 다, 다들 그랬다고요!”

이제야 수수께끼가 조금 풀리는 느낌이었다.

신문부로 위장한 그들은 사실 제국 첩보부의 요원이었고, 당연히 정보조작이나 선전·선동에 능숙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 까탈스러운 아카데미의 귀족들을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차차 알아 가면 될 터였다.

신문부를 찾아가 몇 명쯤 족치다 보면, 알려주겠지. 어차피 이 시대의 제국 첩보부들은 아직 고문 내성 훈련도 제대로 이수하지 않은 놈이 태반이었다.

평화가 참 두려웠다. 권태처럼 일상 속을 독과 같이 스며들곤 하니까.

루페시아 영애는 여전히 흐으, 흐으, 하고 거친 숨을 들이마시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동공이 풀린 것이 출혈의 영향이 큰 모양이었다.

잠시 고민했다.

이 기회에 본보기를 보여 다시는 내 주변 사람들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만들지, 아니면 이대로 참고 넘어갈지.

검을 치켜든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풀리기를 반복했다. 그러기를 한참.

내 망설임을 끝내준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이, 이안!”

잊고 있던 소녀의 부름에, 내 사고가 잠시 부유했다.

누구였더라.

내 몸이 천천히 뒤를 향했다. 그곳에는, 적갈빛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있었다.

여인이 안기듯이 내 품을 끌어안았다.

그 부드러운 감촉에 서서히 기억이 재생됐다. 그래, 엠마였다.

내가 지켜야 할 사람.

퍼뜩 정신이 되돌아왔다. 꿈속을 헤매다 느닷없이 현실로 부상할 때 특유의 느낌이 뇌리를 후려쳤다.

허억, 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나는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쳤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나를 올려다보는 연녹빛의 시선이 애처로웠다. 흔들리는 그 눈동자에서는 여러 가지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놀람, 걱정, 그리고 두려움.

엠마는 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서슴없이 사지를 절단해대는 미치광이를 두려워하지 않을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엠마는 그 마음을 꾹 참고 내게 다가온 것이다. 나를 위해서.

그제야 나는 맑은 정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붉은 핏자국들이 곳곳에 묻어 있었다. 피투성이였다.

“이, 이안… 괘, 괜찮아? 너, 너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였어…….”

엠마가 울상을 지으며 한 말에, 나는 차츰차츰 기억을 더듬었다.

팔다리를 하나씩 날려버렸다. 그리고 루페시아의 영애의 도발에 더 잔혹한 폭력으로 대응했다.

왜 그랬지?

처음에는 몇 대 패주고 끝낼 생각이었다. 코뼈 좀 으스러트리고, 정 안 되면 귀족 가문을 향한 모욕을 빌미로 조금 더 패도 좋겠지.

귀족의 명예를 건 승부는 늘 생사결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긴 순간부터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엠마의 가녀린 몸이 옅게 떨리고 있었다.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했다. 적어도 그녀의 앞에서 보여줄 모습은 아니었다.

내 표정이 암담해졌다.

“나, 난 괜찮아… 그러니까 그만해도 돼, 이안. 어떡해… 피 묻은 거 봐…….”

울먹이면서, 엠마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주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엠마의 입에서 자책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나 때문에 그래… 워, 원래 이렇게까지 될 일은 아니었는데. 미안해, 이안… 평민 계집애라 민폐만 끼치고…….”

그러다 흐느끼기라도 할까 봐, 나는 그 전에 살짝 엠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흠칫, 하고 몸을 떨던 엠마는 이내 내 눈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지친 표정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아, 엠마. 아무래도 내가 조금 이상해졌었나 봐.”

고개를 흔들며 잡생각을 털어냈다.

신음하는 여학생들의 상태가 슬슬 위험했다. 출혈이 심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었다. 아무리 강인한 아카데미의 재학생들이라도, 한도가 있었다.

마력은 유용했지만 만능은 아니었다.

대량의 출혈이 지속되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엠마에게 말했다.

“엠마, 혹시 포션 좀 있어?”

“으, 응? 몇 개 있긴 한데…….”

그렇다면 이야기는 간단했다. 나는 엠마에게 조심스레 부탁했다.

“우선 응급처치 좀 해줄 수 있어? 그 이후에, 신전으로 가서 성녀님을 불러. 내가 이야기했다고 하면 알아들을 거야.”

“……너는?”

내 입이 잠시 다물어졌다.

엠마의 눈동자는 걱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직은 내가 두려울 텐데도, 이만큼 나를 걱정해 주는 그녀를 보니 마음이 조금 풀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미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만 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숙사에 가서, 옷 좀 갈아입어야겠어. 이 꼴로 돌아다니면 너무 눈에 띄잖아?”

딴에는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어색한 변명이기도 했고.

사건을 저질렀으면 뒷수습까지 하고 떠나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제3자인 엠마에게 부탁하고 떠나겠다는 말은 이상했다.

하지만 엠마는 워낙 혼란스러운 듯했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게 현장을 떠나려던 나는, 잠시 내가 만든 참상을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절단면은 깔끔했다. 성녀의 솜씨라면 이어붙이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터였다. 그래도 한동안 안정을 취해야 하긴 하겠지만.

그 와중에도 나름 선을 지키려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때는 반쯤 정신을 잃다시피 해서 기억은 애매했다.

그럼에도 단 하나, 얼음 연못에 틀어박힌 못처럼 깊숙이 틀어박힌 생각이 남아 있었다.

신문부로 향해야 한다.

그곳을 제압하지 않으면, 한동안 이러한 일들이 반복될 터였다. 각오를 정한 내 발걸음이 서서히 움직였다.

내 눈동자가 다시금 차갑게 가라앉았다.

**

신문부는 나름 역사와 전통이 있는 동아리였다.

수많은 동아리가 신문을 발행하지만, ‘신문부’라는 이름을 가진 곳은 오직 하나였다. 그것만 보더라도 신문부가 얼마나 명맥 있는 조직인지 알 수 있었다.

정작 그 ‘신문’의 품질이 별로라는 점만 제외하면 그랬다.

그 덕인지 신문부는 여타의 동아리와 달리 건물 하나를 통째로 전용하고 있었다. 2층짜리 자그마한 건물이긴 했지만, 통상적인 동아리가 방 하나를 배정받는 점을 생각해 보면 대단한 특혜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그 정문 앞에 섰다. 마침 들어서고 있던 신문부원 하나가 힐끔 나를 쳐다보았다.

내 옷에는 핏물이 튀어 있었고, 따라서 누가 봐도 정상적인 행색은 아니었다.

내 눈치를 살피던 신문부원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무슨 용건으로……?”

나는 그를 무시하고 정문을 벌컥 열어제꼈다. 얼떨떨한 눈빛을 하던 신문부원은, 곧장 내 뒤를 쫓아왔다.

정문으로 들어서자 기다란 복도가 이어졌다. 그곳에서 몇 명의 신문부원들이 바삐 걸음을 옮기다 내게 시선을 보냈다.

문밖에서부터 나를 뒤따라온 신문부원이, 내 팔을 움켜쥐며 당황한 기색으로 외쳤다.

“아, 아니! 왜 멋대로 들어오고 그러세요!”

“……제국 첩보부.”

우뚝, 하고 신문부 전체의 움직임이 멎었다.

신문부원은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고개가 갸웃, 하고기울였다.

“무슨 소리에요?”

“너희, 제국 첩보부잖아. 이 비밀 새어나가도 되겠어?”

내 팔을 붙잡은 신문부원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말뜻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라, 대부분의 인간은 이쯤에서 그만두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이해했다.

이제, 온다.

빛살처럼 쏘아진 단검이 내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재빨리 몸을 비틀어 신문부원을 털어낸 탓이었다.

캉, 하고 금속이 충돌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손도끼와 비수가 새빨간 불꽃을 튀겼다. 복도는 너무 좁아서, 일단 검보다는 손도끼로 응대하는 편이 나았다.

설마 내가 기습에 대응할지는 몰랐는지, 신문부원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것이 끝이었다.

콱, 하고 어깨 연골을 박살내며 틀어박히는 도끼날.

신문부원은 끄윽, 하고 옅은 신음과 함께 비틀비틀 물러났다.

복도를 오가던 신문부원 전원의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랄 말고 덤벼.”

그 말을 신호탄으로, 신문부원들이 들고 있던 서류를 일제히 땅바닥에 내던져 버렸다.

전투의 시작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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