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57화 (157/649)

〈 157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21)

* * *

이안은 그대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그 사실을 확인한 네리스의 눈빛에 옅은 실망감이 어렸다. 오랜만에 불이 붙었는데, 예상 외로 시시한 결말이었다.

네리스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주위의 오러를 거둬들였다. 그러자 공간 전체에 심어져 있던 그녀의 감각들이 하나둘씩 차단되고, 어둑하던 주위가 밝아졌다.

천장에는 몇 개의 단검이 틀어박혀 있었다. 사실, 네리스의 오러 특성은 단순했다.

마력을 퍼트리면 그 공간 내의 사물들을 세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인간도 마찬가지였고, 더불어 생명체에 한해서는 감각을 흩트리는 것도 가능했다.

이를 응용하면 몇 가지 잔재주가 가능했다.

뒷짐을 지는 척, 천장에 단검을 몇 자루씩 꽂아 넣고 필요할 때마다 떨군다거나.

잠시 감각만 흩트리면 가능한 일이었다. 단검을 떨어트릴 때는 또 다시 단검을 던지면 그만이었다.

물론 제국 첩보부의 요원이 그러한 정보를 흘릴 리가 없었다.

그 실력도, 능력도, 심지어는 신분 자체도 거짓말투성이인 인생이었다. 네리스에게도 숨겨진 비밀이 많았다.

그녀는 연녹색 눈동자를 이안에게로 옮겼다.

이제부터 고문할 예정이었다.

도대체 누구에게서 정보를 받아냈는지 알아내야 했다. 고작 시골 자작가의 차남 따위가 그 정체를 간파할 수 있을 만큼 제국 첩보부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물론 아카데미 지부는 정식 지부가 아니었고, 따라서 지부에 속한 첩보원들도 훈련이 덜 된 실습생에 불과하긴 했다.

애초에 제국 첩보부의 정식 지부는 간판과 본거지를 주기적으로 옮겨 다녔다. 수백 년에 이르는 유서 깊은 역사와 전통을 가진 동아리로 위장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제국 첩보부는 첩보부였다.

아카데미의 인재들을 포섭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라도 그 기밀 유지만큼은 철저했다. 만약 정보가 유출되었다면 그 근원까지 캐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지 않으면 네리스의 창창한 미래가 어긋날지도 몰랐다.

에휴, 하고 네리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더욱 혹독한 고문을 가해야 할 듯 싶었다. 그 죄목은, 그녀의 기분을 거스른 죄.

나쁘지 않았다. 시건방진 귀족의 애원을 듣는 것은 네리스의 비밀스러운 취미 생활 중 하나였으니까.

네리스의 눈이 부릅떠진 것은 그때였다.

문득,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한기가 타고 올랐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녀의 등 뒤에서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 느껴졌다.

말도 안 돼.

마력을 제한 당했다. 그녀의 부하들이 쓰는 마취 독은 북부 이끼지대의 매머드조차 몇 초면 쓰러트리는 강력한 독이었다.

불신을 담은 그녀의 시선이, 슬그머니 사내를 향했다.

무심한 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하자마자 네리스의 몸이 얼어붙었다. 본능의 영역이었다.

마치 사람이 달라진 듯했다.

사내는 느긋한 태도로, 제 허벅지에 박힌 단검을 뽑아냈다.

그리고 차가운 충돌음을 내며 땅을 구르는 단검, 사내의 입이 열린 것은 그 무렵의 일이었다.

“……네리스 핀들스턴.”

벼락이 치는 듯한 충격이었다. 네리스의 몸이 일순 부르르 떨렸다.

평민에게는 성이 붙지 않는다. 그러므로 네리스에게도 성이 존재하지 않아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성을 가지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버렸던 이름이었다.

제국 황실, 그중에서도 심부에 존재하는 이들을 제외하면 알 수 없는 정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머리가 새하얘진 네리스는 곧바로 적의를 드러내며 다시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이름, 누구한테 들었지?”

사내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몽롱하던 그의 눈동자에는 어느덧 서늘한 한기가 머무르고 있었다.

“잠자코 듣고 있으려니 가지가지 하더군… 조금 더 입이 무거우면 좋았을 텐데.”

“……누구한테 들었냐고 묻잖아!”

그렇게 외치며 내뻗은 단검을 쥔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네리스의 눈동자가 그 근원을 찾을 수 없는 공포로 물들기 시작했다.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이었다. 당연히 저 사내도 알아서는 안 됐다.

네리스의 명민한 두뇌는 곧바로 판단을 내렸다.

지금 다시 제압해야 한다.

사내에게서는 마력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독이 통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마취가 풀렸더라도 마력을 쓸 수 없다면 네리스의 상대는 아니었다.

그러한 결론을 내린 네리스의 몸이 곧바로 땅을 박찼다.

쿵, 하고 자그마한 진폭이 울려 퍼지며 네리스의 신형이 쏜살같이 쏘아졌다.

그녀가 사내의 지척에 도달할 때까지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였다.

마력이 없다면 차마 대응도 할 수 없는 속도, 네리스의 예상대로 사내는 미동조차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됐다. 전력은 아직 그녀 쪽이 압도적으로 우위였다.

그렇게 승리를 확신하며, 네리스가 단검을 꽂기 직전.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금 부릅떠졌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허공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

핏물처럼 일렁이는 마력이 길을 만들었다. 그 경로를 타고 기기묘묘한 문양이 그려지고 있었다.

복잡한 형태의 문자였다.

만약 네리스가 아니었다면, 그 정체를 곧바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네리스는 보자마자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허공에 새겨지고 있는 그 문자의 정체를.

제국 황실 소속의 첩보원이라면 누구나 그럴 터였다. 그 비밀스러운 문자는 황제의 권위 그 자체나 다름없었으니까.

느릿한 시간 속에서, 핏빛 문자가 그 온전한 형태를 이룬 그 순간.

화륵, 그 문양을 중심으로 이글거리며 불꽃의 심지가 일었다.

그 다음으로 벌어질 일은 뻔했다. 네리스는 당장이라도 몸을 빼고 싶었지만, 이미 단검을 휘두르기 직전까지 온 그녀의 몸을 물릴 수는 없었다.

네리스의 눈에 암담한 절망이 스쳤다. 그녀의 몸이 튕겨나간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쾅, 하는 폭음이 터져 나왔다.

불길이 방 안을 휘감았다. 서류들이 화르륵 타오르며 흩어졌다. 폭심지를 중심으로 가구들이 반파됐고, 네리스는 그대로 튕겨나가 벽에 처박혔다.

둔탁한 충격에 네리스는 흐윽,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것은 차라리 적은 고통에 해당했다.

불길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이글거리는 통증이 피부에 느껴졌다. 아직 마력이 남아있어 저항하고 있었지만, 곧 열기로 그녀의 피부가 녹아내릴 것은 명약관화 했다.

소사(?死)에 대한 공포로 네리스의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 꺄아아아아악! 사, 살려줘!”

그러나 쑥대밭이 된 방 안에서, 유일하게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사내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마룻바닥을 구르며 어떻게든 진화를 해보려던 네리스의 눈에 희망이 어렸다.

아무리 그래도 불태워 죽일 생각은 없을 터였다. 화형은 사형수 중에서도 가장 악질들에게 가해지는 형벌이었다.

가장 끔찍한 고통을 주기 때문이었다.

네리스는 사내에게 한 줌의 자비심이 있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하듯이, 사내는 허리춤의 수통을 꺼냈다.

뚜껑을 따서, 물을 부어주려는 거구나.

불길이 스친 것은 단 한 순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이미 방 안은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길이 수두룩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작해야 수통의 물로 뭘 할 수 있을까 싶지만, 불길에 휩싸인 네리스는 그러한 판단 능력조차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사내는 네리스의 바람대로 수통을 기울였다.

쪼르륵, 하고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들로부터 묘한 냄새가 풍겼다. 불타는 와중에도 네리스의 예민한 후각은 그 냄새를 포착해냈다.

술 냄새?

네리스의 눈동자가 일순 멍청해졌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네리스를 휘감은 불길이 더더욱 강해졌다.

“꺄, 꺄아아아아악! 그, 그만! 그, 그만해 주세요!”

네리스의 몸부림이 더욱 거세졌다. 사내는 아무런 말도 없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내 네리스를 발로 차버렸다.

텅, 하고 튕겨나간 그녀의 몸이 부장실 밖을 굴렀다. 사내가 대걸레와 함께 놓인 물 바구니를 든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촤악, 하고 걸레 빤 물이 흩뿌려지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네리스를 휘감은 불길의 기세가 한 풀 꺾였다. 그녀는 몸을 웅크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고, 이내 주위에서 올라오는 습기에 불길이 완전히 꺼졌다.

더러운 냄새가 났다.

걸레 빤 물을 끼얹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네리스는 슬그머니 제 머리를 감싼 팔을 내리고, 공포에 젖은 눈빛으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이 사내, 네리스를 죽이려고 했다.

수통에 담긴 술을 뿌린 것이 결정적인 증거였다. 불에 타죽으려는 여인에게 술을 붓는 인간이 제정신일 리가 없었다.

냉혈한 중의 냉혈한, 그러나 네리스는 내심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복마전이나 다름없는 제국 황실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온 사내였으니까.

네리스는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 비틀비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 어디서 오셨습니까.”

사내는 무심한 눈빛을 잠시 옆으로 향했다. 잠깐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이내 그는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네리스 핀들스턴…앞으로 나를 대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을 하나 알려주마.”

네리스는 물에 빠진 생쥐 꼴로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의 대리인을 향해 갖추어야 할 마땅한 예우였다.

다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직도 옅은 의혹이 어려 있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전세 역전이었다. 아무리 눈치가 빠른 그녀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네리스의 시선이 흘깃 위를 향했다. 사내의 눈빛이라도 읽어보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콰득, 하고 연골이 박살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리스의 눈이 멍하니 제 어깨를 향했다.

손도끼였다.

그러지 않아도 혼란스러웠던 네리스는 또 다시 새된 비명을 내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으, 꺄, 꺄아아아아아악!”

그러나 곧 네리스의 비명은 멎고 말았다.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사내가 강제로 눈을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그 서늘한 금빛 눈동자를 마주하자마자 네리스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눈빛을 읽을 수가 없었다. 단지, 그는 언제나 진심으로 보였다.

사내의 입이 나지막한 경고를 토해낸 것은 그때였다.

“……내게 의문을 가지지 마라.”

네리스는, 그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제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오는지도 모른 채.

*

이안은 수통에 담긴 액체를 붓다 생각했다.

아, 맞다. 이거 술이었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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