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58화 (158/649)

〈 158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22)

* * *

정신을 차렸을 때, 내 몸은 이미 비틀거리며 일으켜진 뒤였다.

둔탁한 통각이 찌릿한 통증을 일으켰다. 우선 정신을 차리긴 했어도 아직 마취의 효과는 남아있어서, 사고회로는 공회전을 반복했다.

쏟아져 내리는 기억들이 있었다.

토막 난 언어들이 밀물을 맞이한 바닷물처럼 밀려들었다. 죽음에 관한 기억들, 이별에 관한 기억들, 사내는 늘 그 사이에 서 있었다.

물론 내 기억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 희미하고 흐릿한 기억의 경계 속에서, 실마리를 하나 잡아냈다.

“……네리스 핀들스턴.”

누구의 이름인지는 알 수 없었다.

네리스 선배에게 성이 있다니 난생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 낯선 인명을 호명하는 내 목소리는 힘 있고 확신이 넘쳤다.

그 정보가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네리스 선배의 몸이 세차게 떨렸다.

워낙 마취의 잔향이 강력하다 보니 그 후의 일도 띄엄띄엄 했다.

네리스 선배가 쇄도하는 순간, 내 동공이 세로로 찢어졌다. 다소 익숙한 감각이었다.

공간의 굴곡을 도해했을 때의 그 느낌.

나는 그제야 용혈 문자를 어떻게 쓰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껏 ‘공간’이라고 보았던 세계의 질곡에는 보다 복잡한 요소가 존재했다.

공간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도, 마력도 그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용혈 문자는 그중 마력의 세계에 접속할 수 있는 일종의 자격증 같은 것이었다.

네리스 선배의 단검이 내게 닿기 직전의 일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허공에 용혈 문자를 그렸다. 어차피 마력의 사용은 제한되어 있었고, 네리스 선배를 신체능력으로 압도할 수단은 없었다.

오직 용혈 문자만이 내가 택할 수 있는 대응 중 최선이었다.

마력조차 없이 즉각적으로 발동하는 마법은 대체로 유용했다. 심지어 그 위력까지 강력하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불꽃과 폭음이 사방을 뒤덮었다.

엉망진창으로 흩어지고 반파되고 튕겨나가는 사물들 중 예외는 오직 나밖에 없었다. 나조차도 불꽃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뿐, 충격파에는 다소의 영향을 받아야 했다.

또 다시 나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마취가 덜 풀려 아직 신체 제어가 능숙하지 못했다.

물론 용혈 문자에 직격당한 네리스 선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발차기에 얻어맞은 소동물처럼 날아간 그녀는, 벽에 한 차례 부딪힌 뒤 마룻바닥을 굴렀다. 그 위로 불길이 번져 나갔다.

“꺄, 꺄아아아아악! 사, 살려줘!”

곤혹스러운 느낌이었다. 아직 정신이 몽롱해서 네리스 선배를 어떻게 구해야 할지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생각이 미친 곳이 내 허리춤에 매달린 수통이었다.

그래, 물이면 되겠지.

매우 단순한 판단이었다. 애초에 불길을 그 정도 양의 물로 진화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다만 그때 내 사고회로는 뭉근히 녹아내린 지 오래였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수통에 담긴 액체가 물이 아니라 술이라는 사실을, 불길이 더욱 거세게 타오르자 네리스 선배의 눈동자는 더욱 강렬한 공포로 물들었다.

숫제 미친놈을 보는 눈빛이었다.

요즘 따라 자주 사는 오해였다. 하지만 내 의도가 그렇지 않았다고 변명해 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을 듯했다.

한숨이 저절로 푹 새어나왔다. 이러나저러나 네리스 선배를 죽일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차선책을 강구했다.

팍, 하고 네리스 선배를 발로 차자마자 그녀는 문밖으로 튕겨 나갔다.

불붙은 여인을 손으로 옮길 수는 없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네리스 선배는 발에 채인 통증 따위는 신경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그대로 물만 뿌리면 될 테니까.

난 대걸레가 담겨 있던 바구니의 물을 곧장 네리스 선배에게 끼얹었다.

그 이후는 더더욱 난감했다.

“……어, 어디서 오셨습니까.”

네리스 선배가 머리를 조아리며 던진 질문에, 나는 잠시 침묵했다.

어떻게 해야 최대한 내 정체를 오래 위장할 수 있을까.

용혈 문자는 황제가 부여하는 권위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황제는 누가 용혈 문자의 사용자인지 전부 꿰고 있을 터였다.

만약 나에 대한 정보가 황제에게 보고된다면?

얼마 가지 않아 제국 첩보부의 진정한 실세들이 나를 방문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로 끙끙대며 고민하고 있기를 잠깐.

내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마치 당연히 이래야 한다는 듯.

“네리스 핀들스턴, 앞으로 나를 대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을 하나 알려주마.”

그리고 손도끼가 허공을 갈랐다.

순식간이었다. 이토록 부드러운 궤적을 그리는 일격이 치명적일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내가 움직인 것인데도, 스스로 놀랄 정도였다.

너무나 빠르다.

심지어 마력을 쓰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빠르고 정확한 궤적, 단 한 점의 낭비도 없는 깔끔한 일격이 네리스 선배의 어깨에 틀어박혔다.

핏물과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든 말든 내 손은 네리스 선배의 젖은 갈색 머리채를 쥐어 잡았다. 그녀의 공포로 젖은 눈동자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내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게 의문을 가지지 마라.”

그러자 네리스 선배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한동안 오해를 푸는 것은 무리라고.

내 정신이 온전히 맑아진 것은, 마취 효과를 중화하는 약물을 주사받은 직후의 일이었다.

훅, 하고 곧장 내 의식이 전면에 부상했다.

몽롱하고 둔감하던 신체의 감각들이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그제야 나는 팔다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살짝 인상을 찌푸려야 했다.

정으로 돌을 쪼개듯 쿡쿡 찌르는 두통이 불쾌했다. 마취의 잔향일 터였다.

회의실로 보이는 장소였다.

놀랍게도 신문부의 건물은 2층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들은 비밀리에 지하의 넓은 공간을 전용하고 있었다.

조명은 충분했다.

조도가 높은 마력등은 제국 황실의 자본력을 상징하는 듯했다. 못해도 수백 골드는 주어야 하는 고급품들이었다.

못해도 수십 명은 앉을 수 있는 탁자였다. 중앙에 가장 상석이 있고, 그 양옆으로 배석할 자리가 남겨져 있었으며, 그 후로 죽 이어지며 놓인 의자들.

당연히 최고 상석에는 내가 앉아 있었다.

내 팔에 중화제를 놔준 사람은 네리스 선배였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길로 주사기를 서서히 내게서 빼냈다.

네리스 선배의 몰골은 여전히 처량해 보였다.

걸레 빤 물을 뒤집어썼는지라 퀴퀴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불길의 잔향으로 네리스 선배의 제복 곳곳은 탄 자국이 가득했다.

몇몇 곳은 뜯겨져 그 새하얀 맨살이 비칠 정도였다.

여성으로서 수치스러운 일이겠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차라리 공포를 사는 편이 나았다.

애초에 내 사람들을 먼저 건드린 쪽은 이들이었으니까.

네리스 선배를 제외하고도 낯이 익은 신문부원 중 멀쩡해 보이는 사람은 드물었다. 느닷없는 호출에 달려온 나머지 인원들만이 마른침을 삼키고 있을 뿐이었다.

단신으로 제국 첩보부의 아카데미 지부를 박살낸 사람이 바로 나였다.

심지어 그들 중 최강자인 네리스 선배도 내게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다. 흘깃흘깃 네리스 선배를 바라보는 사내들의 눈이 그녀의 새하얀 속살을 향했다.

잘만 하면 은밀한 곳까지 비칠지도 모른다는 그 욕망이 뻔히 보였다.

네리스 선배는 그 탓에 더욱 수치스러워 보였지만, 나는 그보다는 다른 면이 불편했다.

제국의 첩보원들이 어째서 이토록 감정을 숨기지 못한단 말인가.

도끼 좀 찍혔다고 비명을 내지르질 않나, 상대를 무력화 시켰다고 제 행적을 두루뭉술하게나마 떠들지를 않나.

심각했다. 아무리 정식 요원들이 아니라도 마찬가지였다.

제국 첩보부에 속해본 적도 없는 내가 왜 이리 기분이 나쁜지 모를 노릇이었다. 자연스레 내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눈 깔아.”

흠칫 놀란 몇 명의 시선이 그대로 내리깔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쯧, 하고 혀를 찼다.

네리스 선배는 더욱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조직원의 수준은 전적으로 지부장의 책임이었다. 내 심기가 불편해질수록 더욱 살 떨리는 쪽은 네리스 선배일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몇 마디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무런 첩보 활동 경력도 없는 인간이 나서봐야 오지랖에 불과했다.

대신 나는 한숨과 함께 본론을 꺼냈다.

“……한동안 잘들 놀아주셨더군, 내 주변 사람들도 잔뜩 들쑤시고.”

신문부원들의 눈에 공포가 스쳤다. 네리스 선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더듬거리면서 변명을 시도했다.

“그, 저… 황녀 전하께서 부탁을 하시는 바람에…….”

“그래서 내가 찾아왔잖아.”

내 눈이 흘깃 네리스 선배를 향했다. 그녀는 감히 내 눈동자를 마주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곧장 고개를 숙였다.

더 할 말은 없었다. 나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못을 박았다.

“……앞으로는 건드리지 마라, 내가 다시 찾아오기를 바라지 않으면. 오늘은 너희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 정도로 그친 거야.”

내 말에 나를 맞상대했던 신문부원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물론 네리스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나에 대한 악명은 그들도 이미 몇 번이고 들어본 바 있을 터였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그 악명에 걸맞은 행동을 보여줄 각오도 있었다.

경고를 했는데도 또 다시 실수를 반복한다면, 내가 보복에 나서야 할 까닭은 충분했다.

그때 내 귓전을 파고드는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그, 그러면 황녀 전하는…….”

그렇게 내게 의문을 제기하려 했던 신문부원 하나는, 내 눈동자가 그를 향하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용혈 문자의 소유자는 황제의 대리인이었다. 아무리 황녀라고 하더라도, 심지어는 차기 황제 자리를 두고 다투는 제1황자나 제2황녀라 하더라도 내 명령보다 우선일 수는 없었다.

내 말이 곧 황제의 뜻이었으니까.

그만큼이나 용혈 문자가 지닌 권위는 터무니없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속으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황제의 대리인을 사칭했다?

나 혼자만의 일로 끝나지는 않을 터였다.

처음에는 적당히 간만 보려고 했는데, 몽롱한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질러버린 상황이라 철회도 불가능했다.

아직도 의문이었다.

마취의 효과가 아직 남아있을 때 내가 저지른 짓들은, 평소의 나라면 하지 않을 만한 행동들에 속했다.

무엇보다, 그때네리스 선배의 어깨를 파고들었던 도끼질.

내가 그리는 궤적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물론 고민한다고 당장 해결이 가능한 의문은 아니었다.

단지 지금으로선 기억이 흘러들어올 때마다 미래의 ‘나’의 경험도 흡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볼 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네리스 선배에게 다시금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네리스, ‘행렬’과 ‘토굴’, 그리고 ‘용의 눈’에 대해서 조사해 봐.”

“……네, 네?”

느닷없는 요구에 네리스 선배는 의아한 눈빛을 내게 보냈다.

‘행렬’과 ‘토굴’, 그리고 ‘용의 눈’.

전부 다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에 적혀 있던 내용들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지막 하나는 미래의 ‘나’가 남긴 메모로 추측 중이었지만 말이다.

어느 것이든 지금으로서는 짐작이 가는 부분이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정보 수집은 전문가에게 맡기면 된다. 마침 내 손 위로 정보 조직이 하나 떨어져 내려왔으니, 이를 이용하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네리스 선배는 잠시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지만, 나 또한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덜덜 떨리는 눈동자, 초조한 듯 모아진 두 손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지금쯤 그녀의 뇌리 속에는 내가 남긴 한 마디가 재생되고 있을 터였다.

‘내게 의문을 가지지 마라.’

네리스 선배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마, 말씀대로 이행하겠습니다… 그, 혹시 성함이……?”

그러면서 흘깃흘깃 내 눈치를 보는 눈동자.

‘이안 페르쿠스’라는 인물이 위장 신분이라고 반쯤 확신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기야 용혈 문자를 받을 정도의 최측근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시골 자작가의 차남이 황제의 최측근으로 등극할 경우의 수는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예상했던 질문이라 내 대답 또한 담백했다.

“……이안이라고 불러.”

네리스 선배가 듣기로는 선을 긋는 말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가명을 쓰기도 우스운 상황이었으니까.

네리스 선배는 군말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네, 넷!이안 님. 그, 그러면 오늘 일에 대한 보고는 누구에게 하면……?”

중요한 질문이었다.

제국 첩보부의 보고 체계의 정점에는 황제가 있었다. 용혈 문자가 나타날 정도의 일이라면 당연히 그의 귀까지 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한동안은 그 보고 체계를 가동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일부러 차가운 낯빛으로 말했다.

“보고는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하는 것 아닌가?”

다시 말해, 나보다 상급자도 아닌 사람에게 멋대로 보고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명민한 네리스 선배는 곧바로 내 뜻을 헤아렸는지 충직스러운 대답을 내놓았다.

“……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물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대답은 아닐 터였다.

아직도 네리스 선배의 몸은 긴장으로 뻣뻣이 굳어 있었고,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그녀의 공포심을 증언했다.

그래도 당장은 이 정도로 충분했다.

나는 말없이 몸을 일으켜 회의실을 나서려 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나는 마지막으로 경고를 남겼다.

“다시 말하지만, 내 주변 사람들은 건드리지 마… 똑바로 처리해, 알겠어?”

내 단호한 어조에 앉아있던 신문부원들이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네!”

나는 그제야 흡족한 기분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이쯤 되면 한동안 레토나 엠마를 건드릴 간 큰 놈은 나오지 않을 터였다.

*

그리고 다음날, 나는 신문부에서 발행한 일간지를 받아들었다.

[아카데미 재학생 중 98%가 몰랐던 그날의 진실! 사실 이안 페르쿠스에게는 아무런 약점도 존재하지 않는다?!유르디나 가문도 놀라고 황실도 놀랐다!“작은 이안 페르쿠스를 건드리면 아주 좆되는 거야.”]

내 입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한참 뒤, 내가 뱉어낼 수 있었던 감상은 단 하나뿐이었다.

“……뭐야, 이 좆같은 제목은.”

다시 한 번 신문부를 찾아가야 하나, 나는 진지한 고민이 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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