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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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의 대신전은 늘 방문객으로 붐볐다.
기도실을 찾거나 예배에 참석하려는 신도들은 물론이고,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들까지 몰려드는 곳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이처럼 수백의 인파가 상주하는 대신전은 누구나 평등한 대우를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공명정대는 천신교에서 중시하는 가치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딛고 선 땅도 속세에 속한지라, 신전도 어쩔 수 없이 특별 취급을 하는 손님이 몇몇 존재했다.
제국의 제5황녀 시엔이 그중 하나였다.
제국와 성국이 별개의 국가이긴 해도 대륙 각국의 지도층들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제국의 황실과 성국의 교황청 또한 마찬가지였다.
명실상부 대륙의 최강국인 제국과, 종교라는 강력한 권력을 틀어쥔 성국 사이는 특히나 나쁘지 않았다.
서로 갈등을 빚어봐야 하등 좋을 것 없는 관계인 탓이었다.
그러니 시엔이 제국뿐만 아니라 성국에서도 귀빈으로 대우받는 건 당연했다. 이는 아카데미의 대신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겉으로는 특혜를 누리지 않는 체 하긴 했지만, 시엔은 필요에 따라 교묘히 제 특권을 이용할 만큼은 영악했다.
바로 지금처럼.
신전의 집중치료실은 통상적으로 면회가 불가능한 곳이었다.
환자의 절친한 친구나 가족, 담당 사제가 아니라면 환자 본인의 동의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바로 집중치료실이었다.
시엔이 그중 하나를 방문할 수 있었던 까닭은 전적으로 그녀의 신분 덕이었다.
루페시아 영애, 얼마 전에 이안에게 처참히 당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후 집중치료실에 틀어박힌 채 모든 면회를 물리치고 있다더니, 과연 그 말처럼 루페시아 영애는 넋이 나간 듯 앉아 있었다.
드러난 상반신의 두 팔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그곳에서 흐릿하게 배어나오는 핏물은 그녀가 당한 부상이 어떤 것인지를 입증했다.
절단상.
다리 하나를 제외한 사지를 잘려 버렸다. 단지 평민 계집애의 뺨을 한 대 날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황녀도 그러한 정보를 듣긴 했지만, 정작 그 피해자의 몰골을 보니 그녀조차 속으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순 미친놈 아니야?
폭력의 행사가 너무나 잔혹했다.
백 번 양보해서 먼저 시비를 건 루페시아 영애가 잘못했다고 해도, 무력화된 상대의 사지를 절단한다는 발상은 정상인이 떠올릴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쯤 되면 시엔도 감사하는 마음이 앞설 정도였다.
그 또라이와 엮여서 아무런 상처도 없이 풀려나지 않았는가. 그 대가로 그녀가 총애하는 기사 하나가 방구석 외톨이가 됐을 뿐이지.
아이린의 생각을 하니 시엔은 다시 울적해졌다.
어떻게든 이안 페르쿠스를 제거해야 했다.
비단 시엔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아카데미를 위한 결정이었다. 그녀는 어느새 이안을 무지막지한 악적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크흠, 하는 자그마한 헛기침 소리가 정적에 잠긴 병실을 일깨웠다.
루페시아 영애의 눈동자가 멍하니 시엔을 향했다. 그녀는 한동안 시엔의 정체를 짐작해내지 못했는지, 얼빠진 표정이었다.
정신적인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하기야 제 눈앞에서 사지가 날아다니는 꼴을 보고도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했다. 시엔은 내심 루페시아 영애의 마음을 헤아리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루페시아 영애의 시선에 흐릿한 이채가 떠오른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황, 녀… 전하?”
시엔은 자애로운 미소를 띠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레 그녀의 엉덩이가 침대 옆의 의자 위로 맞붙었다.
“루페시아 선배님, 괜찮으세요? 그간 찾아뵙지 못해 죄송해요.”
사실 시엔은 루페시아 영애와 그다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지 않았다.
고작해야 지나가며 몇 번 얼굴을 본 정도, 그리고 루페시아 영애의 의도가 뻔한 아부에 맞장구를 얼마쯤 쳐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시엔이 보이는 태도는 마치 절친한 친구를 대하는 듯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깜빡 속아넘어갈 정도였다.
아니, 권력자가 보이는 아첨은 하급자의 인식마저 뒤틀어 버린다.
루페시아 영애는 살짝 미간을 좁혔으나, 이내 곧 시엔의 호의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그래, 친한 사이였나 보지.
시엔의 눈동자가 날카로운 빛을 품은 것도 모른 채 루페시아는 그렇게만 생각했다.
“……이안 선배한테 당하셨다면서요?”
은근한 어조였다.
슬쩍 찔러보는 듯하면서도, 그 내용은 굉장히 직설적이라 루페시아 영애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녀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덜덜 경련하는 어깨, 누가 보아도 극한의 공포를 느끼고 있는 기색이었다.
그 맹렬한 감정에 시엔은 눈이 아파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참고, 그녀는 미소를 머금었다.
아주 훌륭한 재료였다. 어떻게 요리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될 지경이었다.
“그, 아, 으…….”
“무서워하지 마세요, 루페시아 영애. 이곳은 아무도 없어요. 게다가 그 인간도 절대 들어올 수 없으니까요.”
망가진 것처럼 언어화 되지 못한 소리를 반복하는 루페시아 영애의 귓가에, 시엔의 속삭임이 뱀처럼 휘감겨 들었다.
“그 무도한 폭력을 듣고 저도 견딜 수가 없더군요. 솔직히 루페시아 영애가 무얼 잘못했나요? 고작해야 평민의 뺨 한 대 때린 정도로.”
시엔의 말이 루페시아의 귓가를 파고들수록 가파르던 호흡이 차차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끝끝내 그 눈망울에 어린 공포의 기색은 떨어져 나가는 법이 없었다.
재차 황녀는 여인을 설득했다.
“……징계위원회에 회부하죠.”
“아, 안 돼요!”
루페시아는 깜짝 놀라 그렇게 소리 질렀다.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금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그 미친놈은 절대 그딴 걸 신경 쓸 만한 놈이 아니에요… 직접 만나보니 알겠더라고요, 건드리는 순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미친개라는 걸!”
“맞아요, 그런 놈이죠.”
시엔은 루페시아의 말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면서, 또 다른 말을 뱉어냈을 뿐이었다.
“……그런데, 앞으로 그 미친놈이랑 함께 지낼 수 있겠어요?”
벼락이라도 맞은 듯 루페시아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시엔을 향하는 그 푸른 눈동자를 보며 시엔은 속으로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공포는 공포로 제어하면 그만이다.
“생각해 보세요, 루페시아 선배. 아직 아카데미 생활이 남아 있잖아요? 그런데 그동안 이안 선배도 함께 이 아카데미의 교정을 거닐고 있을 거라고요. 언제든지, 루페시아 선배를 습격할 수 있는 위치에서.”
“아, 으, 그으…….”
다시금 떨리는 루페시아의 몸을 보며 시엔은 확신을 가졌다.
조금만 더 건드리면 넘어온다.
도리어 정신적 상흔이 클수록 더 큰 공포에 취약해지는 법이었다. 시엔은 지금껏 그렇게 인간을 다뤄왔다.
“차라리 징계위원회에 회부해서, 아카데미에서 제거해 버려요.”
“그, 그러다간 그, 그 남자가 찾아와서…….”
“비밀로 하면 돼요.”
시엔은 마치 그것만이 유일한 해답이라는 양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비밀리에 징계위원회를 열어서, 최후소명만 남겨두고 기습적으로 퇴학시켜 버리죠… 물론, 루페시아 선배의 안전은 제가 보증할게요.”
그럼에도 루페시아의 눈에는 망설임만이 가득했다.
머뭇거리며 차마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루페시아의 귓가에, 시엔은 마지막이라는 듯 속삭였다.
“……그렇지 않으면, 루페시아 선배가 아카데미를 떠날래요? 너무하잖아요, 가해자는 그 남자인데.”
그제야 루페시아의 떨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흐릿하지만 그 눈동자에서 공포가 아닌 감정이 엿보이고 있었다.
분노였다.
당연히 제거해 버리고 싶겠지, 무서운 만큼 화가 나고 굴욕감도 심할 터였다. 당장이라도 주변에서 사라져 줬으면 하고 수백수천 번은 빌었으리라.
그 기회를 지금 제공해 주겠다고, 시엔이 말하고 있지만 루페시아는 아직도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그만큼이나 이안이 그녀에게 남긴 상흔이 깊었던 탓이었다.
루페시아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그래도 하필 그 가문을 모욕하는 말까지 했는데… 마, 만약 귀족의 명예를 건 승부라는 이야기라도 나오면…….”
“그럼 깔끔히 죽여야지, 왜 그렇게 괴롭히겠어요? 그 정도야 제 힘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어요.”
시엔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루페시아의 떨리는 손을 쥐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루페시아 선배의 복수, 도와드릴게요… 그게 제가 원하는 바이기도 하니까. 제국 황실과, 주제 모르고 날뛰는 미친개. 어느 쪽에 거실래요?”
굳이 물어볼 것도 없는 질문이었다.
원하는 대답을 받아낸 시엔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병실 밖을 나섰다. 그러던 그녀는 툭, 하고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푹신한 감각이 느껴지더니, 부드러운 탄력이 곧바로 시엔을 튕겨냈다.
황녀는 어안이 벙벙해서 그 촉감의 정체를 응시했다.
성녀였다. 그녀도 당황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멀뚱멀뚱 시엔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시엔은 곧장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해요. 성녀님. 잠시 방심한 사이에…….”
“아니에요, 시엔 자매님. 저도 루페시아 자매님의 병실에 누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네요.”
성녀는 늘 그렇듯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보였고, 시엔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주춤주춤 자리를 피해야 했다.
신체 굴곡이 너무 압도적이었다.
설마 그 쿠션감의 정체가 젖가슴이었다니, 누가 예상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도 시엔은 잠깐이나마 흐릿한 의심을 떠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성녀는 그 사내와 함께 실습을 나갔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은근히 사내를 신경 쓰는 기색이라는 정보도 있었고.
혹시 엿들은 내용을 전해 주거나 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곧 시엔은 피식, 하고 웃어버리며 그 생각을 지워버리고 말았다.
성녀는 공명정대한 천신의 총애받는 딸이며, 폭력을 용납하지 않고 공과 사의 구분이 확실하다는 평가가 있는 여인이었다.
설마 징계위원회 같은 민감한 정보를 전하지는 않으리라는 판단이었다.
혹여나 연인 관계라면 또 몰라, 성녀가 사랑을 한다는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눈’을 떴는데도 마땅한 실마리는 느껴지지 않았으니, 거의 확실했다.
그래서 황녀는 차마 눈치 채지 못했다.
그녀의 등을 바라보는 성녀의 연분홍빛 눈동자가, 일순 가늘게 뜨여졌다는 사실을.
성녀는 흐응, 하고 잠시 황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기를 잠깐, 성녀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하여간 이안 페르쿠스, 그 사내는 엮인 사건사고가 너무 많았다.
뭐, 징계위원회에 대해서는 전해줄 테지만.
성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루페시아를 치료하기 위해 병실로 들어섰다.
루페시아에게는 불행한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
시엔은 오랜만에 아이린을 대동한 채 걷고 있었다.
아이린의 낯빛은 어둡기 짝이 없었다. 오랜만의 외출일 텐데도 쾌활하거나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시엔은 이러다 보면 언젠가 아이린이 다시 멀쩡해지는 날이 오리라 믿었다.
그 수법으로 택한 것이 충격요법이었다는 점이 조금 애매하긴 했지만 말이다.
시엔과 아이린은 아카데미의 외진 곳을 헤매고 있었다. 이안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도대체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 신문부를 장악했는지 떠보기라도 할 심산이었다.
아무리 이안이라 해도 황녀를 느닷없이 습격하지는 않을 터였다. 솔직히 요즘 들려오는 소문을 듣자하니 살짝 불안하긴 했는데, 그래도 인간에게는 한도라는 것이 있지 않겠는가.
하물며 이안이 신문부를 장악했다면 그 수단은 제국 황실과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제국 첩보부가 황실보다 우선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황실뿐이었으니까.
어쩌면 이안에게 시엔의 못난 언니오빠들이 들러붙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소롭게도, 시엔은 코웃음을 쳤다.
제1황자 빌테온이나 제2황녀 아이리스 정도가 아니라면 황제의 귀여움을 받는 그녀와 맞서기는 까다로웠다.
권력욕도 없으니 암살을 하기에도 애매했고, 할 수 있는 짓이라곤 이처럼 유치한 견제밖에 없는 것이다.
아마도 이안은 그 끈을 어떻게든 붙잡고 신문부를 찾아가 애걸복걸 했으리라.
신문부장 네리스는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귀찮음을 이기지 못해 알겠다는 대답을 내놓았겠지.
그러면 그 하급귀족은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을 테고.
그것이 상식이었다. 다만 그 ‘끈’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과정은 중요했기에, 황녀가 몸소 걸음을 옮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목격담을 쫓고 쫓아, 황녀와 아이린은 비로소 인기척을 찾을 수 있었다.
남쪽 숲의 공터였다.
마수가 나타난 이후 조사단을 제외하면 아무도 방문하지 않는 그곳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귀공자가 엿보였다.
이안 페르쿠스였다. 등을 돌리고 있어 자세한 얼굴은 알 수 없었지만, 손에 들고 있는 손도끼로 미루어 보아 확실했다.
손도끼를 든 것만으로도 저토록 피냄새를 풀풀 풍길 수 있는 사내는 드물었으니까.
그 뒷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아이린은 몸을 흠칫 굳혔지만, 시엔은 그 손을 붙잡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괜찮아, 아이린. 만나보면 별 거 아닐 거야… 우리가 도발만 하지 않는다면 도끼질을 할 이유가…….”
느닷없는 비명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으, 끄, 꺄아아아아아악!”
그 선명한 울부짖음에, 시엔과 아이린이 동시에 얼어붙었다.
시엔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다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곳에서는, 땅바닥에 핏물을 흩뿌리며 주저앉는 여인이 보이고 있었다.
신문부장 네리스였다.
익스퍼트에 이른 실력자이자, 제국 첩보부의 촉망받는 요원.
그녀가 도대체 왜?
그러한 의문을 떠올리기도 전에, 손도끼에 어깨를 찍힌 네리스는 공포에 젖은 눈빛으로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사내는 조용히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네리스와 시선을 마주하며, 한 마디.
“……의문을 가지지 말랬잖아.”
그 말을 듣자마자 네리스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는 다급하게 자세를 정돈하더니, 이내 그대로 머리를 조아렸다.
“부, 부디 용서를…….”
그 광경을 바라보는 시엔의 눈동자가 멍해졌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아니, 이거 현실 맞나?
본능적으로 시엔은 아이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그녀의 눈에 비치는 풍경이 진실이냐고 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시엔은 곧 깨닫고 말았다.
물어볼 것도 없었다.
아이린의 얼굴에는 이미 핏기가 가신 지 오래였으므로.
슬프지만, 현실이었다. 믿을 수 없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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