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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61화 (161/649)

〈 161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25)

* * *

신문부를 장악한 뒤, 나는 오랜만에 평온한 일상을 누릴 수 있었다.

내 지인들을 향한 괴롭힘이 사라진 덕이었다.

이제 내 사람을 건드리면 어떠한 응징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두가 알게 된 것이다.

지금껏 내 지인들을 괴롭히던 이들이 공유하고 있던 믿음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나를 비롯한 내 주변 사람을 건드리더라도 황실이 뒤를 봐주리라는 점.

이는 사실이었다.

징계위원회를 소집하면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이더라도, 그 뒤에 황실이 버티고 있다면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레토나 셀린 같은 하급귀족일수록 그러한 경향이 심했다. 황실에 조금이라도 밉보였다간 생존을 담보할 수 없는 약소귀족 출신인 탓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나 같은 사람도 있었다. 황실의 눈치조차 보지 않는 또라이, 그러나 이는 무척이나 예외적인 경우에 속했다.

제국, 아니 대륙에 사는 그 누구도 제국 황실을 적으로 두길 원하지 않는다.

아카데미 내의 상주인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폭력이 있더라도 방조하고, 폭력을 당했더라도 입을 다문다. 끊임없는 폭력의 고리를 만들어내는 악순환이었다.

아카데미의 내규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내 지인들에게 마음껏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까닭이기도 했다.

그리고 두 번째, 내가 퇴학만큼은 바라지 않고 있다는 점.

이는 신문부가 여론을 조작하고 증언을 위조함으로써 만들어낸 거짓 근거였다.

아카데미 재학생이라면 누구나 퇴학을 두려워하긴 한다. 나 또한 얼마 전까지 그 예외에 속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당장 황실까지 건드려서 가문이 망할 판인데, 그깟 퇴학이 두려울 리가 없었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었다.

그 탓에 내 검과 도끼에 묻은 핏자국만 늘어나고 있던 와중이었다.

거짓말은 결국 신문부가 스스로의 죄를 고백하면서 탄로 났다. 내 첫 번째 방문 이후 신문부는 꾸준히 나에 대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그 일환이 단 며칠만에 신문부가 쏟아낸 수많은 기사들이었다.

내게는 약점이 없어 퇴학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든가, 폭력에 한해서는 더욱 잔혹한 보복에 나설 가능성이 농후하든가 하는 논조의 기사들이었다.

솔직히 말해 제목은 영 별로였으나 의외로 효과는 좋았다.

아무리 실습생에 불과하더라도 제국 첩보부는 제국 첩보부였다. 도시 하나의 여론도 선동하는 그들에게 있어 아카데미의 여론쯤은 손쉬운 먹잇감에 불과했다.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아직 황실이 뒷배를 봐준다는 믿음은 남아있지만, 그것이 내 지인들을 건드려도 될 이유로는 성립하지 못했다.

누구나 제 목숨만큼은 아까워하기 때문이었다.

평민 계집애의 뺨을 한 대 쳤다고 팔다리를 뎅겅뎅겅 자르는 인간이었다. 괜히 엮여봐야 애꿎은 피만 흘리게 될 뿐이었다.

설령 황실이 뒤를 봐준다고 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무리 든든한 뒷배가 있어도 날붙이는 늘 그보다 가까운 법이었으니까.

나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나를 건드리는 녀석들이야 그때마다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내 주변 사람들을 건드리는 것만큼은 나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종일 친구들과 붙어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하물며 내 친구 중 대다수에게는 지켜야 할 가문이 있고 창창한 앞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황실이나 고위 귀족의 미움을 살 수는 없으니 늘 참고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늘 쓰린 마음으로 속을 졸이던 며칠이었다. 이제야 나는 조금이나 편안해진 마음으로 아카데미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마냥 좋아진 것만은 아니었다.

중앙대로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던 나는 셀린을 마주쳤다. 드물게도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었다.

자연스레 나와 셀린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흠칫 몸을 굳혔다. 그리고 한동안 우물쭈물 하더니, 곧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섰다.

셀린은 늘 그렇듯 쾌활한 목소리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려먼서 내게 팔짱을 걸어온 것은 물론이었다.

언제나 보아왔던 대로의 셀린이었다.

“안녕, 이안 오빠! 오랜만이네?”

배시시 웃으며 건넨 셀린의 인사에도 내 심기는 편해지지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나는 알았다.

지금은 셀린은 연기를 하고 있었다.

혹여 내가 걱정할까 싶어 아무렇지 않은 체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점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묻고 말았다.

“……오늘은 혼자네?”

내 질문에 셀린은 다시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본래 발이 넓은 그녀는 어딜 가든 친구들을 대동하고 다니곤 했다. 홀로 다닐 때가 있다면 오직 나를 찾아다닐 때뿐이었다.

지금 같은 시간에 셀린이 혼자 다녀야 하는 까닭은 하나밖에 없었다.

셀린은 볼을 긁으며 슬쩍 내 시선을 피했다.

“그, 그거? 아하하… 요즘은 좀 고독이란 걸 배워야 할까 싶어서. 알잖아? 나 사실 문학소녀인 거.”

되도 않는 변명이었다.

결국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건 한숨 섞인 사죄의 말뿐이었다.

“……미안하다.”

셀린은 우뚝 굳은 채로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뒷짐을 지었다.

그녀의 발끝이 땅바닥을 긁었다. 셀린은 그제야 진정한 제 기분을 보여주었다.

우울하고 쓸쓸한 낯빛, 내 눈빛도 절로 암울해졌다.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내겐 이안 오빠가 제일 소중하니까… 단지, 조금 허무해졌을 뿐이야. 그동안 쌓아온 인연이 이렇게 모래성처럼 무너질 줄은 몰랐거든.”

가문도, 재능도 애매한 셀린이 가진 강점은 넓은 인간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1학년 때부터 그러한 관계 형성에 집착해 왔던 셀린이었다. 그토록 공들였던 인연들이 단숨에 끊어졌으니, 셀린으로서는 허무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제국 황실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원인은 미래에서 온 ‘나’라지만, 결과적으로 셀린에게는 내 탓처럼 느껴질 터였다.

그럼에도 일부러 내 마음까지 신경 써주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나는 말없이 고개 숙인 셀린을 내려다보다가, 다시금 사과를 건넸다.

“……미안, 셀린. 최대한 빨리 해결해볼게.”

그러나 내 의례적인 위로에도 셀린은 그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으응, 아니야. 그래도 요즘 들어 괴롭힘은 없어졌거든. 얼마 전부터 검술학부 2학년 사이에서는 통 이안 오빠 욕도 들려오지 않고, 이제는 좀 나아.”

친했던 친구들이 전부 등을 돌리고,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데도 ‘좀 낫다’라고 말해야 하는 셀린의 처지가 처량했다.

내 탓이었다.

내 기분이 조금 더 우울한 빛으로 침잠했다.

얼른 해결을 보아야 했다.

어떻게든.

**

결국 해결을 보기 위해선 정보가 필요했다.

편지의 내용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곳에 적힌 낱말들이 도대체 무얼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미래의 정보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 해석을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

내가 네리스 선배를 남쪽 숲의 공터로 호출한 이유였다.

고작해야 며칠, 솔직히 말해 얼마나 많은 정보를 준비해 왔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럼에도 내가 굳이 네리스 선배를 부른 까닭은 마음이 그만큼 조급해진 탓이었다.

제국 황실과의 대립이 길어질수록 피해를 보는 건 내 주변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내 여동생의 상단은 망하기 직전이라니, 얼른 해결을 보지 않으면 곤란했다.

따돌림이야 어쩔 수 없다 쳐도 상단이 망하면 돌이킬 수 없었다.

이대로 사건이 종결되더라도 여동생에게 바가지를 긁히는 미래는 확정이었다. 만약 상단이 망하기까지 한다면, 바가지를 긁히다 못해 들들 볶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또 다시 내 인생 책임지라면서 내 머리채를 쥐어뜯겠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러한 불운한 미래를 떠올리고 있다 보니 내 표정은 자연히 굳어져 갔다. 그럴수록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쪽은 내 앞에 선 네리스 선배였다.

그녀는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저, 이안 님? 호, 혹시 저희의 일처리 중 부족한 점이 있었다면 부디 마음 푸시고…….”

“아, 그런 건 아닙니다.”

내 담백한 대답에 네리스 선배는 헷갈린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진심으로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떠보려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심지어 며칠 전까지 반말로 일관하던 내가 존댓말을 쓰고 있으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굳이 네리스 선배의 마음까지 신경 쓰지는 않기로 했다.

그럴 여력도 없을뿐더러, 네리스 선배는 그동안 내 친구들을 괴롭힌 죄가 있는 사람이었다.

굳이 친절을 베풀어 줄 까닭이 없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괴롭히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우선 정보부터 들어보죠. 혹시 성과는 있었습니까?”

“워낙 시간이 짧아 많지는 않았습니다. 애초에 ‘행렬’이나 ‘토굴’ 같은 정보는 지나치게 겹치는 내용이 많아서…….”

흐음, 하고 내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오자 네리스 선배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있어 나는 황제의 대리인이었고, 따라서 내 평가는 네리스 선배의 미래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했다.

당연히 잘 보이고 싶을 터였다.

네리스 선배는 마른침을 삼키며 곧장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처음에 내뱉은 겸양의 말과 달리, 네리스 선배가 가져온 정보는 꽤 쓸모가 있었다.

천천히 이어지는 그 말을 듣는 내 눈이 절로 깊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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