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27)
* * *
네리스 선배의 몸이 무너지듯 흩어졌다.
마치 그림자와 동화되는 듯한 기묘한 은신술이었다. 그렇게 내 허가 하에 네리스 선배는 이만 자리를 피했다.
어차피 들어야 할 정보는 대부분 들었다.
물론 ‘용의 눈’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하긴 했다. 그러나 해당 내용은 ‘토굴’에 대한 추가적인 조사 결과와 함께 들어도 무방했다.
중요한 정보는 도대체 언제쯤 사건이 터지냐는 점이었으니까.
‘귀향제’라고 한다면 이제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행사였다. 다시 말해,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만큼 시일이 특정됐다면 슬슬 준비에 나서야 했다.
귀향제의 행진은 대규모 행렬을 이룬다. 그에 맞서는 암흑교단의 마수들 또한 그만한 전력이 투입된다고 봐야 합리적이었다.
맞붙는 두 세력의 규모가 클수록 사상자도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시점에서 귀향제를 취소시키거나 습격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전력을 최대한 총원하고 행렬의 호위도 보충해야 했다.
문제가 있다면 내겐 그럴 만한 권한도, 또 아카데미 측이 내 제안을 받아들이게끔 할 합리적인 근거도 없다는 점이었다.
곤란했다.
내 입에서 끄응, 하는 신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어차피 늘 답을 가지고 움직이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처럼 눈 뜨고 당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올 때마다 참 답답하긴 했다.
그럼에도 나는 일단 그러한 고민들을 뇌 한 구석에 치워두기로 했다.
지금 고민해 봐야 해답이 나올 문제도 아니었을뿐더러, 내게는 당면한 숙제가 하나 더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내 눈이 흘깃 측면을 향했다.
그곳에는 두 여인이 서 있었다.
밤하늘과 같은 암청빛 머리카락에 연한 회색의 눈동자를 가진 소녀, 제5황녀 시엔.
그리고 황녀의 호위기사로 보이는 여기사였다. 그녀 또한 신비로운 푸른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시엔은 흠칫 몸을 굳히더니, 이내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반면 여기사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입술만 짓씹고 있었다. 아마도 미래의 ‘나’한테 패배한 기억이 좋지 않은 추억으로 남은 모양이었다.
하기야 제국 황실의 근위기사단 중 하나가 일개 아카데미 재학생에게 제압당하다니.
비웃음거리로 전락했더라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얼핏 보기에도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 모습이었다.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나는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나는 미래의 ‘나’와 구분되는 존재라 생각하고 있지만, 상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시큰둥한 질문뿐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시엔은 내 목소리를 듣고 내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조금 놀랐다는 듯 살짝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서늘한 음색으로 반문했다.
“가냘픈 여인의 어깨를 찍어놓고도 아무렇지도 않아?”
그 말에 나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하고 웃고 말았다.
제국 첩보부는 그 자체로 기밀 덩어리나 다름없었다. 하물며 은신이나 잠입 임무 또한 그들에게는 일상에 속했다.
고문을 당하거나,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고문 내성 훈련을 받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물론 지난 신문부 습격 때를 떠올리면 조금 불안하긴 했다. 관절이 으깨질 때마다 신문부원들은 하나같이 비명을 내지르지 않았던가.
정상적인 첩보부 요원이 보일 만한 몰골은 아니었다.
다만 살갗을 찢는 정도라면 아무리 실습생들이라도 내성이 있을 터였다.
만약 네리스 선배의 입에서 터져 나온 비명이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었다면, 이는 제국 첩보부에서 고문 내성 훈련을 전혀 이수하지 않았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잠입할 때 가시에 찔렸다고 비명을 내지르다 들키는 제국 첩보부 요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섬뜩한 위화감에 잠시 미소를 지웠다.
고문과 비명이라.
무언가 뇌에서 툭, 하고 걸리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마치 사고의 물길이 돌덩이 하나에 갈라지는 듯한 그 불쾌한 감각.
그러나 멍하니 생각에 잠기기엔 나를 응시하는 황녀의 시선이 너무 차가웠다.
나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입을 열었다.
“일개 시골 자작가의 차남을 괴롭히는 황족도 있는데, 뭐 어떻습니까.”
“당신이 먼저 날 모욕했잖아……!”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황녀의 분노를 증언하고 있었다.
과연 황실이 숨겨두었다던 꽃답게 그 모습조차 아름다웠지만, 내게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최근 내 주위에는 워낙 미인들이 많았던 탓이었다.
셀린부터 시작해서, 세리아나 성녀, 엘시 선배와 델핀 선배에 엠마까지.
하나같이 보기 드문 미모를 자랑하는 여인들이었다.
그렇다고 황녀의 미모가 빛이 바래지는 않겠지만, 내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기엔 이미 내 심장의 단련이 끝난 뒤였다.
황녀는 여전히 무심하기만 한 반응에 더욱 미간을 좁혔다. 그녀가 내게 물어왔다.
“……도대체 누구의 지원을 받은 거야? 황자, 아니면 황녀? 어느 쪽이 뒤를 봐줘서 그렇게 자신만만하지?”
“그 누구도 아닙니다… 저 혼자 저지른 짓이죠.”
그러는 내 대답에는 한 치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아서, 황녀의 눈은 더욱 깊은 의혹으로 물들었다.
그야 내 뒤를 봐주는 황자나 황녀는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용혈 문자를 전수 받았으니 황제 정도가 내 뒷배라 할 만했다. 하지만 이 또한 미래의 ‘나’에게 있던 일이었으니, 지금 시점에서 황녀에게 밝힐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는 서서히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슬슬 돌아가야 할 때였다. 황녀나 그 호위기사에게 마땅히 볼일은 없었다.
당장이라도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귀향제에서 흐를 피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라면 지금부터 움직여야 했다.
다만 아무 말도 없이 떠나기는 조금 그래서, 나는 황녀를 지나칠 무렵 걸음을 멈추었다.
“……앞으로 조심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속삭이는 말은 느닷없는 도발처럼 들리기도 했다.
차라리 그렇게 받아들여지길 원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황녀의 경계심이 짙어질수록 그녀의 호위는 더욱 두터워질 가능성이 컸으니까.
지금으로서 황녀는 최우선 보호 대상이었다.
미래의 ‘나’는 굳이 황녀에게 성수를 뿌렸다. 내 미래 인격은 성격이 더럽긴 해도, 이유 없이 누군가를 도발할 사람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의 판단을 존중하기로 했다. 내가 굳이 황녀를 한 번 더 도발한 까닭이었다.
과연 그 효과는 발군이었다.
“당신이, 뭔데?”
툭툭 끊어지는 목소리.
기묘할 만큼 흥분한 기색이었다.
황녀의 연회색 눈동자에 은은한 광채가 어리기 시작했다. 눈치 채기 힘든 변화였지만, 자세히 보니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동공이 세로로 죽 늘어나고 있었다.
“당신이 뭔데… 날 진심으로 걱정하고 진심으로 조언해? 난 제국 황실의 황녀야! 시골 자작가의 차남 따위한테 동정 받을 사람이 아니라고!”
이글거리는 눈빛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만약 감정에 물리력이 있다면 내 얼굴에는 이미 생채기가 났을 터였다.
“……당신한테는, 내가 그렇게 약해 보여?”
그렇게 부르르 몸을 떨며 뱉어낸 물음에는 절절한 감정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말이 그녀의 연약한 부분을 찌른 듯했다.
그러니까 이토록 몸을 웅크리고 가시를 세우는 것이다.
그럴수록 더더욱 연약해 보이는지도 모르는 채로.
황녀는 배가되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옅은 떨림에 불과하던 그녀의 동요는, 점점 더 정도를 더해가더니 극에 이르자 도리어 차분해졌다.
싸늘한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모든 감정이 제거된 듯한 눈빛이었다. 차라리 먼 곳을 응시한다고 느껴질 만큼, 그 망막 위에는 아무것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다만 황녀는 온기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내게 한 방 먹이니까, 이제아카데미가 당신 세상 같지? 틀렸어… 진짜 세상은 바깥에 있는 거야.”
한 걸음, 그녀는 내게 달라붙듯 다가왔다.
달콤한 체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윽한 만큼 독기가 어린 눈빛으로, 황녀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매력적이면서도 치명적이었다.
“당신 여동생, 예쁘더라. 미래가 창창해 보이던데?”
조소 어린 속삭임이었다.
흐릿한 미소를 지으면서, 황녀는 계속해서 입술을 달싹였다.
“여동생뿐만이 아니야. 당신과 끈이 있던 그 모든 사람들… 아카데미 바깥에서 어떤 꼴을 당할지 두고 봐. 감히 날 얕본 대가를 치르게 해줄 테니까…그래도 뭐, 여동생한테는 나쁘지 않을지 모르겠네?”
소녀의 입에서는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얼굴만 반반하다면야, 먹고 살 걱정은 없잖아. 심지어 귀족 출신이라면 창녀촌에서도 환영…….”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황녀님.”
내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에, 도리어 당황한 쪽은 황녀였다.
그녀는 곤혹스러운 기색으로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황녀를 응시했다.
안타깝다고 해야 할지, 슬프다고 해야 할지 모를 눈빛이었다.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 말을 꺼내려던 나는, 결국 대화를 포기했다.
황녀의 눈동자에 더욱 거센 적의가 맺힌 그 순간.
내 손이 허리춤을 향했고, 황녀의 옆에 서 있던 여기사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리고 빛살이 떨어져 내린다.
황녀의 어깨를 향해, 도끼날이.
시엔의 눈빛이 멍청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