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65화 (165/649)

〈 165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29)

* * *

최근의 나는 신전을 방문하는 일이 잦았다.

예전에는 부상을 입을 때가 많았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그러나 요즘의 나는 마땅한 부상을 얻은 적이 없었다.

지난 두 달간 실력이 일취월장한 덕에, 다치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던 것이다.

일단 지금으로서 아카데미 내에서 나를 위협할 수 있는 실력자가 많지 않기도 했다.

교수들이나 각 학년의 수석 혹은 차석들이라면 또 모르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외에몇 번이나 사선을 넘은 나를 실전에서 압도할 만한 인재는, 온 대륙의 수재들을 긁어모았다는 아카데미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만큼이나 실전 경험이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신전을 찾아오는 빈도는 이전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아직도 대략 이틀에 한 번씩은 찾아오는 뜻했다.

그 원인은 간단했다.

성녀가 자꾸 나를 호출했기 때문이었다.

때때로 중요한 정보를 전해 주기도 했지만, 정작 찾아가 보면 시답잖은 잡담을 나눌 때도 많았다. 굳이 신전으로 걸음을 옮긴 보람이 없는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잡담을 나눌 생각이라면 어디든 가도 상관없었다. 내가 일부러 신전까지 찾아올 수고를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성녀에게 대놓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차라리 찻집이나 다른 곳에서 약속을 잡으면 어떻겠냐고, 그럴 때마다 성녀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그, 그러면 당신이 오지 않잖아요.”

얼굴을 살짝 붉힌 채, 서운하다는 듯 새침한 목소리로 내놓는 대답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성녀가 은근슬쩍 내가 가는 곳마다 나타났던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일이 바빠 몇 번 무시했었는데, 그때 서운했던 감정이 시간이 지나며 복수심으로 화한 모양이었다.

찻집이라면 몰라, 신전이라면 성녀의 개인실이 존재하는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당연히 시답잖은 이야기뿐만 아니라 중요한 정보가 오고가기도 했다. 무작정 성녀의 요청을 무시할 수만은 없는 이유였다.

물론 이 추론을 유렌에게 하소연하듯 떠들면, 그는 무척이나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억울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유렌은 성녀에 대한 신뢰가 너무 깊어서, 설마 그녀가 그렇게 치졸한 보복에 나설 줄은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깊고도 넓은 오해를 설명하자면 너무나 많은 노고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유렌이 믿고 싶은 대로 믿도록 놔두기로 했다.

어차피 진실은 진흙에 가려져도 언젠가 밝혀지기 마련이니까.

이처럼 두 번 찾아오면 한 번쯤은 헛걸음을 했다는 생각이 드는 신전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일부러 성녀를 찾아온 보람이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는 꽤 중요한 정보로 보였다.

“루페시아 영애가 징계위원회 소집을 요청했어요, 황녀가 충동질을 했으니 후속 조치도 당연히 뒤따를 테고요.”

흐음,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팔짱을 낀 채 침음을 흘렸다.

신전의 진료실이었다.

본래라면 이곳에서 환자들을 진료해야 할 성녀는, 최근 시간이 남을 때마다 나를 이곳으로 불러내곤 했다.

나를 심심풀이 땅콩쯤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내게도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지금만 하더라도 성녀는 제 젖가슴을 팔 하나로 받치고 있었다. 그 덕에 그러지 않아도 존재감 넘치던 흉부 굴곡이 더욱 강조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어깨가 뻐근한 듯했는데, 성국의 비전 유술로 단련된 몸으로도 저 무게를 이겨내기는 힘든 모양이었다.

눈요기로는 훌륭했다. 심지어 성녀는 이조차도 일상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남은 한 손으로 옆머리를 빙빙 돌리며 꼬고 있는 성녀는 다소 시큰둥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권태로운 눈빛에서는 다소의 불량함마저 느껴졌다.

자애와 성실의 상징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성녀를 보고도 단지 고개를 몇 번 내저을 뿐이었다. 어차피 그녀와는 서로의 밑바닥까지 탐독한 사이였다.

차라리 가식을 부리는 것보단 이쪽이 내게도 더 나았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나는, 그제야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큰일이네요.”

“큰일이죠, 퇴학은 반쯤 확정인데.”

성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머리카락을 배배 꼬던 손이 툭 떨어져 내렸다.

“진짜 무슨 생각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뺨 한 대 때렸다고 사지를 날릴 것까진 없었잖아요.”

“사지라니, 그래도 다리 하나는 남겨놨……”

“……어쨌든!”

억울함을 호소하는 내 목소리를 묵살하며, 성녀는 제 앞의 탁자를 쾅쾅 내리쳤다.

그녀의 손바닥이 맞닿을 때마다 찻물이 고르게 튀어 올랐다. 그러면서도 한 방울도 찻잔 밖을 벗어나지 않으니 신기에 오른 솜씨였다.

과연 성국의 비전 유술 숙련자다운 실력이었다.

그러나 내 감탄에도 불구하고 성녀의 타박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러다가 나중에는 황녀의 어깨에 도끼라도 박겠어요? 그, 그러면 아무리 용혈문자 소유자라도 큰일 나는 거 알죠?!”

나를 책망하는 성녀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걱정이 섞여들고 있었던지라, 나는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막 나갈 생각은 없었다.

물을 끼얹은 것도 중죄였지만, 황족의 몸에서 피를 흘리게 만드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황족 시해’로까지 연결될 수 있는 사안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황권 다툼 속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픽픽 죽어나가는 것이 황족들이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권력에 눈 먼 이들이라도 공개적으로 황족 시해를 일삼지는 않았다.

황족들은 황제의 피를 이은 존재들이며, 따라서 그들의 생명 하나하나가 황실의 권위와 직결되어 있었다.

물을 끼얹는다고 사람은 죽지 않는다. 하지만 피를 흘리기 시작한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피를 흘린다는 것은, 상대가 마음먹기에 따라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무리 아카데미에 관대한 제국 황실이라도 그마저 용납할 리는 없었다.

얼마 전 황녀의 이어지는 도발에도 어깨를 찍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내키지 않아서’로 정리될 수 있지만 말이다.

무리수까지 두며 내게 공포를 심어주려는 황녀의 모습은, 짜증이 난다기보다 애잔했다.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어떻게든 자신을 두려워 해주기를 바라는 듯했다.

내게는 철없는 어린아이가 칭얼대는 모습으로 보일 뿐이었다.

만약 황녀가 그 계획은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어차피 일주일 이내에 해결될 문제였다.

굳이 그녀의 도발에 엮여들 까닭은 전무했다.

그렇게 생각을 되짚어가던 내 눈길이 흘깃 성녀를 향했다. 그녀의 연분홍빛 눈동자에는 못내 지우지 못한 걱정이 떠올라 있었다.

내 입에 절로 쓴웃음이 떠올랐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미운 정이 많이 든 모양이었다. 고작 눈 한 번 마주쳤을 뿐인데, 마음이 따스해졌다.

“그럴 일은 없으니 걱정 마시죠. 그리고 징계위원회 건은,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일주일 후에 생각해 보죠. 루페시아 영애께는 미안했다고 전해주시고요.”

“사과하면 더 무서워 할 것 같은데…….”

성녀는 내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러던 그녀는 이내 아차, 하는 얼굴이 되었다. 무언가 떠올랐다는 기색이었다.

곧 성녀의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나를 향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에도 애들 패고 다녀요? 요즘 학생들이 뼈 한두 개씩 부러져 오던데, 영 가해자에 대해 입을 열지 않네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내 원칙은 굳이 덤벼오는 놈들만 팬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최근 들어 내게 덤벼드는 사람은 전무했다.

사실 그렇게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는데, 또 나를 건드린다면 그것대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 용기의 대가가 사지절단이 될지 목숨이 될지 아무도 모르지 않겠는가.

처음에는 불신으로 가득 찬 시선을 보내던 성녀도 납득할 수밖에 없는 설명이었다. 그녀는 과연 그렇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기야, 그 소문을 듣고도 또 건드리면 그거야말로 치료가 필요하죠. 주로 정신적인 문제로.”

아무리 그래도 과장된 평가가 아닌가, 그러한 생각이 들어 내 눈길이 떨떠름해졌다. 그러든 말든 성녀는 안심했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녀의 어깨가 들뜬 기분을 반영해 쫙 펴졌다. 그 젖가슴이 더욱 매력적인 자태를 드러냈으나, 성녀는 여전히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결국 먼저 민망해진 쪽은 나였다.

나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살짝 시선을 피했다. 성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내 시선이 향하던 방향을 눈치 챈 듯했다.

흐응, 하고 성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성녀는 슬쩍 몸을 일으켜 상반신을 탁자 위로 밀착시키더니, 내 귓가에 속삭였다.

“……만지고 싶어요?”

“네.”

당연하게도, 내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 *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