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30)
* * *
“……만지고 싶어요?”
“네.”
내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남자라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니, 성별을 떠나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저토록 탄력 있는 부피감을 지닌 살덩이라면 순수한 호기심으로라도 만져볼 만했다. 그러니 나쁜 것은 내가 아니라 성녀 쪽이었다.
유혹하듯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면, 그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너무나 음란한 육체를 지닌 성녀의 죄가 컸다. 굳이 목덜미에서 가슴으로 떨어지는 굴곡뿐만 아니라, 허리부터 둔부를 거쳐 허벅지로 떨어져 내리는 곡선마저도 완벽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성호를 그리며 천신 아루스께 속죄의 기도를 올렸다.
저 죄 많은 육체를 용서하소서, 임마누엘.
그러나 성녀는 내 번민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지, 키득거리며 맑은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뭐, 특별히 만지게 해주지 못할 것도 없긴 한데…….”
은근한 목소리였다.
나는 이것이 함정일 줄을 알면서도, 마치 척수반사처럼 되묻고 말았다.
“……진짜요?”
“아무한테나 만지게 해주진 않아요, 오직 당신한테만.”
그렇게 말하는 성녀의 음색은 뜨겁고 축축해서,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말았다.
가늘게 뜨인 연분홍빛 눈동자가 유독 매력적이었다. 여인은 계속해서 내 귓가에 속삭였다.
“대, 대신… 방학 동안 서, 성국에 오는 편이 어때요? 그, 성도 관광도 하고… 여, 여러 가지 볼 것도 많은데!”
유려하게 이어지던 성녀의 언어가 툭툭 끊긴 것은, 그러한 제안을 건넸을 때였다.
내 시선이 멍하니 성녀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볼에는 어느덧 홍조가 머물러 있었는데, 달콤한 체향과 어우러지니 참 매력적이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의 초대다.
그리고 그 대가로 ‘신성력 주머니’도 만질 수 있다.
사내라면 누구나 꿈에 그릴 기회였다. 나는 세차게 고동치는 심장 소리를 느꼈다.
내 대답은 사고보다도 빨랐다.
“……안 됩니다.”
이제는 성녀의 표정이 멍청해질 차례였다.
혹시 잘못 들었나 싶은 얼굴이었다. 마치 어망에 넣어둔 물고기를 실수로 놓친 어부 같은 눈빛이었다.
그러나 내 태도는 단호했다.
“방학 때 바로 돌아오지 않으면, 여동생이 화내거든요.”
화목한 가정의 유지는 중대사안이었으므로.
성녀의 입은 한동안 뻐끔거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명치를 검집으로 얻어맞은 남학생 하나가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쳤다. 자존심 때문이라도 어떻게든 버텨 보려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실수였다.
팍, 하고 좀 더 날카로운 타격음과 함께 사내의 옆머리에 검집이 내리꽂혔다.
얻어맞은 사람에게는 일순 세상이 흔들리는 듯한 충격이었다.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그렇게 남학생은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이것으로 마지막, 이제 달밤의 검무를 끝마칠 시간이었다.
인적이 드문 공터였다. 벌써 네댓 명의 사람들이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피를 흘리지는 않았지만 하나같이 끙끙거리는 몰골이 심상치 않았다. 최소한 한두 곳에 골절상을 입은 모습이었다.
이 대지 위에 오롯이 서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뿐.
달밤의 어둠을 타고 회색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아쿠아마린을 닮은 푸른 눈동자가 허공 위로 둥실 떠올랐다.
여인은 늘 그렇듯 무심하고 냉담한 표정이었다.
마치 기계처럼 후려치고, 쓰러트리고, 제압하는 그 행동에는 감정 따위는 없어 보였다. 그래서 습격을 당한 이들은 더더욱 두려움에 잠겼다.
때때로 도를 넘은 공포는 발악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쓰러져 있던 이들 중 하나가 소리를 높인 것은, 그러한 현상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너, 너!”
여인의 차가운 눈동자가 고함을 친 사내를 향했다.
그의 낯빛이 잠시 창백해졌지만, 이미 내친김이었다. 그는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아, 아무리 유르디나라고 해도 우리를 건드리고 무사할 것 같아! 심지어 우리는 황녀 전하를 위해서…….”
“이안 선배의 우편함에 음식물 쓰레기 넣으셨죠.”
사내의 발악은 단숨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여인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한 걸음을 내딛었기 때문이었다.
절제된 걸음걸이였다. 정석적인 검술을 익힌 자들만이 보일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유령과 같이, 어느덧 눈치 채면 거리가 좁혀져 있는 그 걸음.
옷깃이 사각거리며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게다가 이안 선배 보고 들으라는 듯 욕을 하지 않나… 이안 선배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가 위협하지 않나. 그 외에도 너무 많은 짓을 해버렸어요. 당신 같은 사람들은, 어쩜 하는 짓이 하나같이 비겁할까요?”
“……그, 그걸 다 보고 있었던 거야?”
남학생은 이제 황당하다는 기색이었지만, 소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미끄러지듯 걸음을 옮겨 그의 지척에 섰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끄, 끄아아아아아아악!”
지긋이, 소녀의 발이 땅을 짚고 있던 사내의 손목을 짓밟았다. 가냘파 보이는 몸이었지만 마력으로 강화된 육체는 겉보기만으로 판단할 수 없었다.
그 증거로 으드득, 하고 관절이 으깨지는 소리와 함께 근육과 살갗이 찢어져 피가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단 몇 초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잔혹한 광경이었다. 짓이겨지듯 바스라지는 인체의 모습은, 선연한 공포를 야기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러나 소녀는 단지 한탄하듯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지금껏 많이 참았잖아요. ‘유르디나의 싸가지’라 불러도, 심지어는 어머니를 가지고 욕해도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는데.”
탁, 하고 차내듯이 사내의 손목이 풀려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사내는 핏물이 줄줄 흐르는 제 손목을 꽉 쥔 채로, 고통을 감내하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핏발 선 눈동자가 회색 머리카락의 소녀를 향했다.
“끄, 크흐흑… 미, 미친년…….”
고통과 공포로 덜덜 떨리는 턱 근육으로, 사내는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비난을 내뱉었다.
그보다 더 심한 말을 하고 싶기는 했지만 차마 용기는 나지 않았다.
소녀는 그 비난을 듣고도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단지 싸늘히 내려앉은 표정 그대로, 살짝 무릎을 굽혀 사내와 눈높이를 마주했을 뿐.
그녀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사내는 더욱 공포스러운 기색으로 몸을 벌벌 떨었다.
눈동자에 음영이 없었다.
그림자조차 지지 않은 채로, 그 깊이를 알 수 없도록 빛을 잃은 눈망울이 그녀가 정상이 아니라는 점을 증언하고 있었다.
건드려서는 안 될 상대라는 뜻이었다.
“맞아요, 미친년이에요… 그러니까, 이안 선배는 건드리지 마세요. 저, 미친년이라서 종일 쫓아다니면서 감시하거든요.”
남학생의 뇌리에 방금 전 여인이 말했던 이야기들이 스쳐 지나갔다.
말 그대로 한나절을 쫓아다니며 감시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이야기들, 상대는 진심이었다.
“누가 감히 이안 선배를 괴롭히나, 불쌍한 이안 선배를 괜히 욕하는 사람이 어디 없나,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안 선배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내뱉어지는 한 마디, 한 마디는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조금도 흥분하거나 화가 난 기색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더욱 무서웠다.
눈앞에 있는 소녀는 마치 공예품처럼 아름다웠다. 새하얀 피부를 도화지 삼아, 아쿠아마린빛 눈동자와 은은한 빛이 감도는 회색 머리카락이 그려져 있었다.
누구나 코앞에서 마주한다면 가슴이 두근거릴 만한 미모였다.
사실 지금도 남학생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긴 했다.
다만 그 원인이 되는 감정이 달랐을 뿐이었다.
허억, 허억, 하고 거친 숨을 들이마시는 사내의 눈가에 물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저를 건드리는 건 상관없어요. 저야 천출이고, 검밖에 모르는 못난 여자고, 그 외에도 비난받을 만한 부분은 많으니까. 그런데…….”
소녀의 얼굴이 슬그머니 사내의 귓가로 다가섰다.
그 차가우면서도 청명한 속삭임.
“……이안 선배만큼은 건드리지 마요, 죽고 싶지 않으면.”
그리고 빛살 같은 검격이 사내의 허벅지를 찌르고 들어갔다.
언제 검집에서 뽑혀 나왔는지도 알 수 없는 속도였다. 단지 눈을 한 번 깜짝 했을 뿐인데, 허공에서 빛무리가 터져 나오더니 어느덧 검극이 허벅지를 파고들고 있었다.
사내는 갑작스러운 통증에 또 다시 비명을 내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크으, 끄, 끄아아아악!”
엎어진 채로, 바둥거리며 몸부림치는 사내를 보며 소녀는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남학생이 허벅지를 찔리는 모습을 보며, 아직도 정신을 차리고 있던 몇몇 학생들은 그대로 눈을 감는 편을 택했다.
옅게 경련하는 그들의 몸이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회색 머리카락의 여인, 그러니까 세리아는 무감정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목격자, 없고.
정당방위, 일부러 몇 대 맞아주기도 했으니 우기면 가능할 터였다.
마지막에 진검을 쓴 것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정 안 되면 언니에게 부탁을 드려도 됐다.
사소한 시비가 있어 진검을 뽑고 말았다고.
그만하면 언니가 알아서 손을 써줄 터였다. 가문 사이의 교섭으로 들어가든, 금전으로 보상하든 어쩌든.
세리아는 소리조차 없이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엘시 선배한테 혹시나 싶어 배워둔 보람이 있었다고 말이다.
**
세리아가 이안과 마주친 것은 그 다음날 아침의 일이었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이안을 발견한 세리아의 몸이 우뚝 얼어붙었다.
그리고 이내 안절부절 하지 못하더니, 다급히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혹시 모자라 보일까 싶어 옷매무새도 가다듬었다.
다소 긴장한 낯빛으로 크흠, 크흠, 하고 귀여운 헛기침을 하기를 몇 번.
이안이 세리아를 발견한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안녕, 세리아. 오랜만이네?”
“네, 네헵! 으으… 네, 요즘 일이 조금 많아서…….”
언제나 그렇듯 혀를 씹으며 대답한 세리아는, 다소곳한 자세로 이안의 시선을 피했다. 왜 그만 마주치면 얼굴이 이토록 달아오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안은 잠시 동안 유심히 세리아의 낯빛을 살피더니, 이내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보이네, 많이 피곤해 보인다. 요즘 잠들기가 힘들지?”
“아, 네… 넷!”
정확히는 감히 이안 선배를 건드리는 이들을 밤새 응징하고 다니느라 그런 것이었지만, 차마 그 말을 꺼낼 수는 없어 세리아는 그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이안은 그 말뜻을 조금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었다.
그는 쓴웃음을 더욱 짙게 띠우며 세리아의 어깨를 토닥였다.
“……걱정시켜서 미안해, 세리아. 하지만 곧 해결할게.”
그러는 이안을 마주하는 세리아의 아쿠아마린빛 눈동자가 곧 몽롱해졌다.
달콤한 눈빛이었다.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소녀의 얼굴을 한 채로,세리아는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이안 선배는 너무 상냥해.
그러니까 내가 나서서, 이안 선배를 건드리는 벌레들을 쫓아낼 수밖에 없어.
지금껏 세리아가 가장 존경해 왔던 인물은 델핀이었다. 그 우러러보는 마음이 너무나 컸기에, 애증의 감정 또한 자연스레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토록 범접할 수 없어 보이던 델핀을 꺾은 사내가 바로 이안이었다.
이제 세리아의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존경하는 사람은 이안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델핀, 두 사람의 말이라면 세리아는 무슨 지시든 따를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세리아는 그때까지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설마 그녀의 존경해 마지않는 언니가, 사랑하는 선배의노예를 자처하며 벌 받기를 원하는 여인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유용한 가르침을 내려준 엘시 선배와 그녀의 언니가 다투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제 곧 이안이 가는 길목에, 그 둘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세리아는 알지 못했다.
다만 세리아는 속으로 몽롱히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역시, 이안 선배는 상냥해.
*
"주인님, 부디 이 불경한 노예에게 벌을……."
"무, 뭐라는 거야, 이 썅년아! 은근슬쩍 허벅지를 오므리면서 엉덩이까지 쳐내밀어?! 엉덩이만 쓸데없이 큰 년이 진짜… 주인님! 저, 저 변태는 놔두고 엘시만 버리지 말아주세요… 네?"
두 선배를 앞둔 채로,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둘 다 뭐라는 거야, 진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