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67화 (167/649)

〈 167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31)

* * *

루핀 라이넬라는 이안 페르쿠스가 싫었다.

우선 이안은 하급 귀족 주제에 루핀을 팬 적이 있었다. 그것만 하더라도 루핀이 이안을 싫어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물론 루핀이 그럴 만한 계기를 제공하기는 했다.

아무리 유르디나 가문의 핏줄이라 한들, 설마 서녀 따위에게 그토록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인간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탓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상황이 조금 다르긴 했다.

설령 관심을 기울이고 있더라도 감히 그에게 도전할 줄 몰랐다는 표현이 더 알맞았다.

세리아를 향한 괴롭힘에는 하급 귀족뿐만 아니라 고위 귀족도 다수 가담하고 있었다.

당장 루핀만 하더라도 제국의 5대 명문가에 미치지 못하지만, 마도명문 라이넬라 백작가의 일원이 아닌가.

평민은 말할 것도 없고, 하급 귀족들이 고위 귀족들의 행사에 참견하기는 힘들었다. 원칙적으로 불가능하진 않지만 가문 간의 마찰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루핀은 그 지위를 잘만 누려왔다.

누구를 괴롭혀도 보복이 돌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그의 누나는 그 유명한 ‘엘시 라이넬라’였기 때문에, 비슷한 수준의 고위 귀족들조차도 루핀을 건드리기를 꺼려했다.

그래서 안일하게 생각했다.

이안의 주먹에 코뼈를 얻어맞고, 그대로 허공에 붕 떠오를 때까지 루핀은 마치 꿈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그러나 그에게 닥친 현실은 엄중했고, 루핀은 이안에게 대들기를 포기했다. 다만 속으로 몇 번이고 그날의 굴욕을 곱씹었을 뿐이었다.

이안은 진짜배기 미친놈이었다.

언제 터질 줄 모르는 폭탄을 굳이 건드리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최소한 그 위험부담에 걸맞은 이익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랬다.

루핀이 볼 때, 이안은 얽혀 봐야 좋을 것 하나 없는 존재였다. 하물며 그 폭력을 제어할 수단도 없으니 무시하는 편이 맞았다.

그때 나선 것이 그의 누나인 엘시 라이넬라였다.

언제나 강하고 당차며, 그 독기 하나로 라이넬라 가문의 형제자매들을 공포에 떨게 한 인물이었다. 루핀은 그녀라면 이안을 쓰러트릴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엘시는 그에게 처참히 패배했고, 그 결과는 더더욱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얼마 전 보았던 엘시는 이안의 충성스러운 애완견이나 다름없었다.

그토록 당당했던 엘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사내를 ‘주인님’이라 부르며 아양을 떠는 그 모습을 보고 루핀은 그대로 혼절할 뻔했다. 심지어 ‘주인님’의 화를 풀기 위해 아끼던 남동생에게 버럭 화를 내는 꼴이라니.

루핀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더욱 루핀을 고통스럽게 만든 사실은, 사내를 대할 때 엘시에게서 드러나는 감정이 단지 복종심만은 아니라는 점에 있었다.

은근슬쩍 내보이는 몽롱하고 달콤한 눈빛.

루핀도 몇 번이고 봐온 적이 있었다.

오로지 사랑에 빠진 여인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그의 누나를 대하는 이안의 태도는 시큰둥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도리어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엘시를 밀어내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루핀의 눈은 부릅떠지다 못해 툭 튀어나와, 실핏줄이 투둑 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을 정도였다.

루핀이 복수를 결심한 것은 그때였다.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누나는 그깟 남자에게 매달릴 만큼 구차한 여자가 아니었다. 이안이 매달리면 매달렸지, 그렇게 비참한 관계를 이어나가서는 안 됐다.

연애를 해본 적은 많이 없었지만, 루핀도 들어들어 알고 있었다.

결국 연애도 정치의 연장선에 지나지 않았다.

일단 권력의 우열관계가 설정되면, 연애 도중은 물론이고 결혼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됐다.

엘시와 이안이 결혼한 뒤에도 그 눈치나 살펴야 하는 삶이라니, 루핀은 사양이었다.

지금 루핀이 엘시에게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있는 이유였다.

“……그러니까 누나, 애초에 숙이고 들어가면 안 된다니깐? 그래봐야 남자는 잡은 물고기라 생각하고 무관심해질 뿐이라고.”

중앙대로의 찻집, 조곤조곤 이어지는 루핀의 설명을 듣고도 엘시에게서는 마땅한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힌 채,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주위를 살피고 있을 따름이었다.

사랑스러운 외모의 소녀는 잠시 시선을 피하고 있다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아, 아무리 그래도 벌써 결혼까지는…….”

“아니, 해야 돼.”

쾅, 하고 루핀의 손바닥이 식탁을 강타했다. 그 눈동자에서는 새파란 결기가 줄기줄기 흘러넘쳤다.

그러한 남동생의 모습은 처음이었던지라, 엘시는 조금 놀랐다는 표정으로 루핀을 바라보았다.

입술을 달싹이는 그의 낯빛은 서늘하게 굳어 있었다.

“지난번에 그 새끼한테 당한 뒤로, 누나를 두고 어떤 소문이 퍼졌는지 기억 안 나?! 본가에서는 더 늦기 전에 약혼자를 찾고 있다고! 왜 누나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데……?”

부르르 몸을 떨며 내뱉어지는 루핀의 말소리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원독에 절여져 있었다. 그날의 기억이 그만큼이나 뼈 아팠던 탓이었다.

엘시가 ‘오줌싸개’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게 된 날의 일이기도 했다.

처음엔 ‘오줌’이라는 말만 들어도 길길이 날뛰던 엘시였다. 하지만 지금 보여주는 그녀의 반응은 싱거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빨대로 음료를 쪽쪽 빨더니, 당연한 걸 묻는다는 투로 말했다.

“그야, 감히 주제도 모르고 주인님께 대든 대가지. 지금 생각하면 주인님께서도 참 자비로우신…….”

쾅, 하고 다시 루핀의 손바닥이 식탁 위를 내리쳤다.

잠시 몽롱한 표정으로 이안을 떠올리던 엘시는, 이제 조금 짜증난다는 눈빛으로 루핀을 흘겨보았다.

그러나 이미 루핀은 흥분할 대로 흥분한 뒤였다.

그의 입이 곧 열변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누나의 인생은 그 새끼 때문에 망가진 거야! 그걸 보상받을 수 있는 방법? 오직 하나뿐이야! 누나도 그 자식의 인생을 가져가는 거지… 어때, 논리적이지 않아?!”

“……어, 응. 그래.”

속으로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엘시였지만, 일부러 그 점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지금 루핀은 말을 들어먹을 상태가 아닌 듯 보였다. 그리고 또, 내심으로는 소리 높여 제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루핀이 대견스럽기도 했다.

누나를 존경하는 만큼, 엘시 앞에서는 늘 기가 죽어있던 루핀이었다.

엘시는 그것이 허약하던 시절의 후유증인 것만 같아 늘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루핀이 지금 보여주는 모습은 의욕적이다 못해 정력적이기까지 했다.

무엇보다도, 루핀이 말하는 내용이 딱히 싫지는 않기도 했고.

엘시는 빨대에 기대듯 입술을 꾹 누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주인님’과의 결혼 생활이라.

아침에는 남편보다 일찍 일어나고 싶었다. 그래야 옅은 화장을 끝마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혼을 했다고 해서 못나 보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게 준비가 끝나면 볼에 입을 맞추며 이안을 깨워야지. 어쩌다 이불 속을 파고들어 칭얼거리면, 사내는 쓴웃음을 지으며 엘시를 품에 안아줄 터였다.

그 든든하고 따스한 품속에 있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인님’께서는 엘시가 그토록 바라는 포상도 얼마든지 내려줄 터였다.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아이도 낳게 되겠지.

몇 명이나 낳을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안이 바라는 만큼은 낳고 싶었다.

그리고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사랑으로 길러내리라.

엘시는 어린 시절에 좋지 않은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 반동 심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엘시는 늘 아이를 낳으면 사랑을 듬뿍 퍼주어야겠다고 생각해 왔다.

다행스럽게도 페르쿠스 가문은 하급 귀족 가문이었다. 고위 귀족처럼 자식 양육에 있어 까다롭지는 않으리란 추측이 들었다.

라이넬라 가문이야 형제자매 중 아무한테나 던져주면 그만이었다. 페르쿠스 영지에서 한적한 생활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 옆에 이안만 있다면, 말이다.

“누나는 전략을 변경해야 돼! 숙이고 들어갈수록 매력만 반감될 뿐…….”

“……할래.”

망상에 잠긴 사이에도 루핀이 무어라 떠들어댔던 듯했지만, 엘시의 귓가에는 조금도 와 닿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은 이미 풀어질 대로 풀어진 지 오래였다. 무얼 상상하는지 이미 그 눈동자는 머나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때때로 흐헤, 하고 몽롱한 소리를 흘리며 엘시는 재차 확답했다.

“할래, 결혼.”

느닷없는 엘시의 답변에 잠시 몸을 흠칫 굳혔던 루핀은, 그제야 음험한 미소를 떠올렸다.

드디어 복수의 시작이었다.

이안이 누나와 결혼하는 순간, 그는 지옥을 보게 되리라.

조카라도 낳는다면 루핀은 단 한 명의 조카도 빠짐없이 귀여워해줄 예정이었다. 그리고 조카들의 말문이 트일 때가 되면, 그들에게 진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옛날에 너희 아빠가 삼촌을 심하게 때린 적이 있었단다… 그때 어찌나 세게 때렸던지, 코뼈가 무너질 정도였지.’

그러면 조카들은 충격을 받았다는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보게 되겠지. 그때 이안이 지을 표정만 상상하면 루핀은 기대가 돼서 참을 수가 없었다.

물론 유아기의 보호자를 향한 신뢰 형성은 중요했기에, 이 계획은 보다 정밀한 검토가 필요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라이넬라 남매는 꿈꾸는 바는 달랐으나 함께 미소 지었다.

엘시는 여전히 행복에 겨운 망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이었고, 루핀은 속으로 그의 잔혹한 복수가 성공할 순간만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동상이몽(???夢)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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