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68화 (168/649)

〈 168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32)

* * *

엘시는 며칠만에 이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은 강행군이었다. 지난날을 떠올리는 엘시의 눈빛이 절로 피로해졌다.

본래부터 꾸미는 데 관심을 두지 않던 그녀였지만, 지난 며칠간 루핀의 손에 이끌려 온갖 곳을 다녀야 했다.

난생 처음 보는 가게들이었다.

어차피 아카데미 내규상 제복을 제외한 복장은 착장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루핀은 조금 더 다른 방향에 힘을 쏟아 부었다.

화장품이라든지, 향수라든지, 머리카락이라든지.

솔직히 말해 그 며칠 사이 스스로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엘시조차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무심코 제 머리카락을 코로 가져가 킁킁, 하고 냄새를 맡았다.

싱그러운 향기가 났다.

그것만큼은 엘시도 눈치 챌 수 있을 만큼 명료한 변화였다. 엘시는 부디 이 변화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만을 바랐다.

주인님이 마음에 들어 하셔야 할 텐데, 엘시는 저도 모르게 조금 시무룩해져 생각했다.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엘시는 동년배에 비해 유독 자그마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성장이 멈춘 지금까지 이어져, 그녀의 몸은 소녀 시절 이후로 더 자라날 기미가 없었다.

듬직한 체형이 많은 라이넬라 가문에서 엘시가 유독 괴롭힘을 받았던 까닭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법사에게 중요한 것은 체구가 아니라 마력이었다. 그래서 아카데미에 입학한 후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던 문제였다.

‘꼬마’라고 그녀를 얕보는 이들만 응징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키가 크든 작든, 엘시 라이넬라는 엘시 라이넬라였으니까.

하지만 첫사랑은 모든 것을 바꾼다. 이는 소녀의 세계관 또한 마찬가지였다.

엘시는 실로 오랜만에 제 자그마한 체형이 원망스러웠다.

그녀도 여성인 만큼 몸의 굴곡이 존재했다. 오히려 체구에 비하자면 꽤나 발달한 곡선을 지니고 있었다.

체구에 비해서는 말이다.

사실 이안의 곁에 머무르는 성녀나 델핀 같은 굴곡을 가질 수는 없었다. 애초에 그러한 몸매는 체형을 떠나 유전자 조작을 의심해 봐야 할 판이었다.

그러한 생각을 하자 엘시는 괜히 초조해지고 말았다. 입술을 짓씹으며, 죄 없는 땅을 팍팍 차도 그녀의 마음은 영 가라앉지가 않았다.

그러기를 한참, 엘시는 어느덧 느껴지는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안이 저 멀리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늘 가던 대로의 길이었다. 그는 이 무렵 인적이 드문 숲의 공터에서 수련을 하러 가곤 했다. 루핀이 사람까지 풀어 얻어낸 정보였다.

고작 며칠밖에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엘시는 마치 수년만에 주인을 만난 강아지처럼 못내 반가운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처럼 그녀의 들뜬 마음이 사라질 때까지는 채 몇 초도 필요하지 않았다.

툭, 하고 이안의 팔에 매달리듯 다가오는 여인이 하나 있었다.

찬란한 금발을 가진 미인이었다. 그 핏빛 눈동자는 고혹적이다 못해 요사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새하얀 피부를 가진 매력적인 그 여인이, 어느덧 제 가슴팍으로 이안의 팔을 꾹꾹 눌러대고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접근이었다. 물 흐르듯 이어진 접근에, 이안은 차마 그 팔을 뿌리치지도 못했다.

그의 놀란 눈동자가 여인을 향했다. 그러자 여인, 델핀 유르디나는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인사를 건넸다.

“주인님, 잠시 단 둘이서 이야기 좀 할까?”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는 투였다. 잠시 몸을 움찔 굳히던 이안은, 그 말에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엘시는 그 두 남녀가 함께하는 그림이 유독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미 잘 알려진 바대로, 엘시와 델핀의 사이는 유독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자타공인 아카데미의 대표적인 앙숙 관계가 아닌가.

이는 엘시와 델핀도 서로 인정하는 사실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엘시는 제 소중한 주인님을 그 원수에게 빼앗기기 직전이었다. 울컥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지, 지금 누구한테 달라붙는 거야?! 걸레년이 보자보자 하니까 진짜……!”

버럭 내질러진 엘시의 고성에 돌아오는 반응은 빨랐다.

우선 이안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엘시를 바라보았다. 설마 그녀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던 듯했다.

델핀은 처음에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눈이 이내 가늘어지더니, 델핀의 입가에는 곧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엘시는 노기등등한 기색으로 걸어 델핀을 노려보았다.

으르릉, 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환청이 들릴 정도로 화가 난 모습이었다.

“야, 안 떨어져?! 지금 주인님이 곤란해 하시잖아!”

뻔한 핑계였지만 이만큼 효과적인 변명은 없었다.

이안은 늘 그렇듯 난감하다는 얼굴이었고, 그 모습이야말로 엘시의 말이 진실임을 입증하고 있었다.

그러자 델핀은 순순히 이안의 팔에서 떨어져 나갔다.

델핀답지 않는 태도였다. 그 승부욕의 화신이 엘시가 한 번 쏘아붙였다고 물러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당연히 엘시의 경계심 어린 눈빛이 이어졌다. 그러든 말든, 델핀은 항복이라는 듯 두 손을 살랑이며 말할 따름이었다.

“맞아, 내가 너무 무례했네. 주인님께 노예가 마땅히 갖춰야 할 예가 있거늘…….”

훗, 하는 델핀의 미소를 본 순간 엘시는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누가 봐도 음모를 품은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엘시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델핀은 이미 행동에 나선 뒤였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안의 흙 묻은 신발코에 입을 맞추면서, 여인은 순종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님, 부디 이 불경한 노예에게 벌을…….”

느닷없는 델핀의 선제공격에 엘시의 눈이 부릅떠졌다.

심지어 고개를 조아리며 델핀은 은근슬쩍 허벅지를 오므리고 있었다. 살짝 치켜들어진 엉덩이의 굴곡이 제복 치마 너머로 강조됐다.

엘시는 무심코 제 빈약한 몸뚱아리와, 꿀과 같은 매력을 품은 델핀의 굴곡진 여체를 비교하고 말았다.

처음에 루핀과 약속하기로는 오늘 엘시는 조금 더 당당히 나가야 했다. 새침하면서도 은근히 이안에게 여지를 주는 것이 오늘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델핀이 끼어든 순간부터 엘시의 머리는 새하얗게 변한 지 오래였다.

델핀한테만큼은 지고 싶지 않았다. 더 나아가, 주인님께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그 절박한 심정이 엘시로 하여금 이안에게 매달리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엘시는 곧장 그 본능에 따르기로 했다.

“무, 뭐라는 거야, 이 썅년아! 은근슬쩍 허벅지를 오므리면서 엉덩이까지 쳐내밀어?! 엉덩이만 쓸데없이 큰 년이 진짜… 주인님! 저, 저 변태는 놔두고 엘시만 버리지 말아주세요… 네?”

물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안의 눈빛은, 떨떠름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든 말든 델핀과 엘시의 말싸움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왜 그래, 라이넬라? 네 말처럼 주인님께 실례를 저질러서, 벌을 기다리는 중인데… 아직 너는 주인님의 것이라는 자각이 부족하구나?”

“……무, 뭣!”

머리를 조아린 채로 흘려낸 델핀의 도발은, 곧바로 엘시의 귓가에 닿았다.

엘시는 곧바로 허를 찔렸다는 듯 그 자리에서 펄쩍 뛰고 말았다.

사실 엘시가 이안에게 품은 감정은 친애와 동경, 그리고 사랑이었지 델핀과 같은 감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델핀이 엘시의 자리에 끼어들면서 그 감정에 굴절이 일어났다. 엘시 또한 자연스레 이안을 ‘주인님’이라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래야만 델핀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으니까.

그 ‘승리’의 기준이 기묘하긴 했으나, 엘시에겐 그 무엇보다 중요한 승부였다. 그녀의 블루사파이어를 닮은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그, 그야 나도 주인님의 것이지만! 일부러 엉덩이만 쭉 빼놓고 있는 의도를 모를 줄 알아?! 음탕한 년이, 제 욕심을 채우려고 주인님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너도 그러든가.”

그러나 엘시에 대응하는 델핀의 목소리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델핀의 핏빛 눈동자가 흘깃 엘시를 향했다.

그 입가에는 조소가 맺혀 있었다.

“나름대로 몸매에는 자신이 있거든. 특히 엉덩이 쪽은 촉감이 좋아서, 주인님께서도 만족하고 계실걸? 아아, 지난번에도 참…….”

“……지, 지난번?!”

몽롱해지는 델핀의 숨소리가 점점 축축이 젖어들어 갔다. 그 말을 들은 엘시는 경악한 목소리를 내더니,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내 엘시의 처량한 눈빛이 이안을 향했다.

거짓말이라 말해달라는 듯한 애절한 눈동자, 이안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는 잠시 고민에 빠진 듯,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엘시는 기대하던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절망에 빠진 얼굴이었다. 울먹이는 기색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델핀은 꼴좋다는 듯 키득거리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말을 이어가는 그녀는 종종 움찔, 거리며 허벅지를 오므렸다.

“……참, 좋았는데. 주인님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벌을 주셔도 돼. 아아, 아니면 발로 머리를 짓밟힌다던가?”

그 놀리듯이 흘려내는 달뜬 목소리에 엘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가 저토록 변태적인 기벽을 지닌 음탕한 년일 줄이야.

이는 제국 황실에 대한 불충이었다.

얼마 전까지 이안을 건드렸다는 이유만으로 황녀를 ‘그 년’이라고 욕했던 엘시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치 스스로가 제국의 둘도 없는 충신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저 탕녀로부터 사랑하는 사내를 지켜야 한다는 여인의 본능이 앞섰다.

파르르 속눈썹을 떨던 엘시는, 이내 결심했다는 듯 눈을 떴다.

“주, 주인님! 정벌을 주고 싶다면 저한테 주셔도 되니까……!”

“주인님, 기왕 때릴 거라면 때리는 맛이 있는 편이 좋지 않겠어요? 부디 이 노예에게 자비를…….”

한참이나 델핀과 엘시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이안은,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민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이를 모를 엘시와 델핀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긴장한 기색으로 이안의 판단을 두 여인이 기다리고 있던 찰나.

이안의 손이, 벼락같이 손도끼를 뽑아냈다.

델핀과 엘시가 채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이었다.

백열하는 손도끼가 지반에 틀어박히더니, 이내 한계까지 담고 있던 마력을 폭발시켰다.

쾅, 하는 폭음과 함께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그 충격파는 크지 않았지만, 델핀과 엘시의 공포감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꺄, 꺄아아아아아아악!”

“으, 아, 꺄아아아아!”

그토록 서로를 싫어하는 둘이었으나 내지르는 비명 소리만큼은 비슷했다.

사이좋게 땅 위로 엎어진 두 사람이 머리를 부여잡은 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덜덜 떨리는 눈동자가 아직 그들의 가슴 속 상흔이 치유되지 않았음을 증언하고 있었다.

“자, 잘못했어요… 도, 도끼만큼은 싫어요… 제, 제발 검만큼은… 제 모든 걸 드릴 테니까… 흐, 흐으윽….”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에, 엘시 오줌싸개 할 테니까… 제, 제발 버리지 말아주세요! 살려주세요…….”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이안은 하아, 하고 지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마에 손을 얹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더니, 곧장 델핀에게 물었다.

“델핀 선배, 그래서 무슨 말 하려고 했던 거예요?”

델핀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리면서 말을 짜냈다.

“그, 그러니까… 얼마 전에 듣기로 ‘토굴’을 찾고 계시다고 하셔서, 그에 대한 말씀을… 흑, 흐윽… 부, 부디 용서를…….”

이안은 과연 그럴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엘시였다.

“엘시 선배는 무슨 용건인데요?”

“요, 요즘 주인님이 보이지 않아서… 버, 버려지기 싫어서… 흐으윽, 흑…….”

그 말을 들은 이안의 표정이 조금 씁쓸하게 가라앉았다. 안쓰러움을 담은 금빛 눈동자가 엘시를 내려다보았다.

물론 그것도 잠시였다.

단숨에 용건을 전부 듣게 된 이안은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손을 치켜들자, 도끼는 다시 파공성을 내며 그의 손아귀로 들어섰다. 그는 아직도 공포로 덜덜 떠는 두 여인에게 말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셋이서 이야기하죠. 어차피 공유 드리고 싶은 내용도 있었고… ‘상’이랑 ‘벌’에 대해서는이따 이야기합시다.”

그렇게 말하며, 이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진작 손도끼 꺼낼걸.

아무래도 두 사람이 지나치게 다툴 때에 한해서는, 극약처방이 필요할 듯 싶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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