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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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숲을 조금만 들어가면 곳곳에 숨은 공터들이 많았다.
선배들에게 듣기로는 오래 전부터 이어진 수렵제의 흔적이라고 했다. 본래 빽빽이 자라있던 숲의 나무들은 수렵제 때마다 곤혹을 치르곤 했다.
팔 한 번 휘두르면 나무를 통째로 으스러트리는 마수들과, 검 한 자루로 그 괴물에 대적하는 실력자들의 승부였다.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나무라고 해서 무사할 턱이 없었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올해 수렵제에서 나무를 몇 그루나 쓰러트린 전적이 있지 않은가. 주로 ‘창자 수집가’에게 얻어맞고 날아간 결과물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겨난 공터 중 몇몇 곳은, 쓰러진 나무 둥치를 다듬기만 하면 멋진 회담장이 되곤 했다. 그루터기를 가다듬는 일쯤이야 오러만 다룰 수 있으면 간단했다.
나와 델핀 선배, 엘시 선배가 자리한 장소도 그러한 공터 중 하나였다.
여름의 절정이 다가오고 있는지 햇살이 뜨거웠다. 드리운 나무 그늘 아래로 도피하고 나서야 조금나마 산뜻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마저도 지팡이의 달이 지나고 나면 어딜 가든 텁텁한 공기뿐이리라.
나는 더위로 슬쩍 달아오른 낯짝에 손부채질을 했다. 그럼에도 이마에 맺히기 시작한 땀방울은 증발하지 않았다.
그나마 피부에 마력을 돌려 더위를 덜 타고 있는데도 이 꼴이었다. ‘용의 정혈’을 섭취해서 마력량이 꽤 늘긴 했지만, 아직 부족했다.
실제로 델핀 선배와 엘시 선배는 이 무더위에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마력량 자체가 나보다 월등한 덕이었다.
여전히 내가 갈 길이 멀다는 증거기도 했다.
두 여인은 손부채질을 하는 내 앞에서 우물쭈물하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화가 났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물론 오해였다. 지금 내 심정은 잔잔히 가라앉아 있었다.
단지 나는 무어라 입을 열어야 할지 애매해서 말을 아끼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델핀 선배와 엘시 선배의 그 괴상한 경쟁 심리를 어떻게 위축시켜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어차피 생각해 본다고 해서 답이 나올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착잡한 마음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이대로 가면 잘못된 평판이 퍼지게 될지도 몰랐다.
제국의 귀족들은 명예를 중시한다. 하급귀족인 페르쿠스 가문조차 그럴진대, 고위 귀족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명예’란 목숨보다도 귀중한 것에 속했다.
가문의 위신과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명문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와 라이넬라 가문의 여식이, 고작 시골 자작가의 차남에 불과한 사내에게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꼴이라니.
유서 깊은 제국의 두 귀족 가문이 오명을 뒤집어쓰는 수준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내게 불똥이 튈지도 모를 판이었다.
먼 옛날에 정조관념이 지금보다 공고했던 시절에는, 귀족 여인이 평민과 관계를 맺으면 평민을 사형시켰다고 한다.
화간이든 강간이든 상관없었다. 무조건 강간죄를 뒤집어씌워 평민을 죽여 왔던 것이다.
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평민들의 모습에 내가 겹쳐 보이는 까닭은 어째서일까.
나는 섬뜩한 기분에 식은땀을 흘렸다. 황실을 건드리고 할 만한 걱정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러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시 선배는 주춤주춤 내게 다가와 그 자그마한 손으로 부채질을 시작했다.
당연히 손이 작았던 탓에 이는 바람도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내 의문 어린 눈빛이 그녀를 향하자, 엘시 선배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살짝 시선을 피했다.
그 보드라운 볼에 옅은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더, 더워 보이시길래…….”
허, 하고 내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이가 없긴 했지만 또 그 마음이 고맙기도 해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흘러나오는 말은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델핀 선배, 그래서 그 ‘토굴’에 대한 정보는 어떻게 됐어요?”
“그, 사실은… 아카데미부터 시내 밖까지 이어지는 토굴이 존재하거든요.”
델핀 선배는 슬쩍 내 눈치를 살피면서, 그렇게 침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카데미가 제국 황실의 산하에 놓이면서 만들어진 토굴입니다. 그래봐야 토굴이지만, 당시 황족들의 비상대피로로 만들어진 곳이니 아직 남아있을 거예요. 마법적인 가공을 거쳤다고 들었거든요.”
제국 황실의 대피로라.
아카데미가 제국 황실의 산하에 놓였다면, 지금으로부터 수백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토굴이 남아있을 수 있다니 놀라웠다.
단단한 암반이 아니라 부드러운 흙으로 이루어진 토굴은 붕괴에 취약했다. 그래서 길이가 짧고 그 위치도 얕은 곳에 존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무려 아카데미에서 시내 밖까지 이어지는 대규모의 토굴이었다. 황족의 비상대피로라니 당연히 탐지가 불가능한 깊은 지하에 만들어졌을 테고.
그럼에도 아직까지 무너져 내리지 않았다면, 그 당시 어마어마한 마력을 투자해야 했다고 봐야 했다. 당대의 기술력은 지금보다 뒤떨어지는 수준이었을 테니 더더욱.
조금 의문이었던 점은, 그만한 비용을 수반하는 공사라면 굳이 토굴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내구성을 고려하면 차라리 정식으로 지하대피로를 만드는 것이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토굴을 고집했을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문제라, 나는 그 의문점을 마음속에 고이 접어두기로 했다.
“……그 위치는요?”
“황족이 입학하면 늘 머무는 곳이 어디겠어요?”
내 물음에 돌아오는 반문은 명쾌했다.
황자와 황녀는 하나하나가 일궁의 주인이었다. 경호 문제를 비롯한 여러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아카데미에서도 황족은 특별 취급을 받는다.
그들이 배정받는 숙소가 바로 ‘베르라타 궁’이었다.
정복황제 아이달로스의 아내 이름을 딴 건물이었다. 공식 이름은 ‘베르라타 관’이었지만, 그 자그마한 궁전을 황족이 홀로 쓰니 ‘궁’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델핀 선배는 그 지하에 토굴의 입구가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문을 갈음하려다가, 또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겨 물었다.
“그런데 제가 ‘토굴’에 대한 정보를 찾는다는 건 어디서 들었어요?”
“유르디나 가문은 황실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고, 그러다 보니 들려오는 이야기도 많은 편입니다.”
나는 쯧, 하고 혀를 찼다.
두루뭉술한 말이었지만, 제국 황실을 운운하는 걸 보면 대체적으로 신문부 쪽에서 새어나갔다고 봐야 할 듯 싶었다.
그야 애초에 정식으로 위장한 집단은 아니라지만 내부 정보 유출이 너무 간단했다. 아무리 상대가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날을 잡고 교육을 시켜놔야 할 텐데.
무심코 그러한 생각을 떠올리던 나는, 곧 고개를 저으며 허튼 생각을 털어냈다.
첩보 업무에 대해 무지한 인간이 떠올리기엔 너무 건방진 생각이었다. 어째서 그러한 생각을 떠올렸는지조차 모를 일이었다.
나와 델핀 선배의 대화를 지켜보는 엘시 선배는 무언가 초조한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델핀 선배만 도움이 돼서 불안한 듯했다. 그녀는 한동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고민에 잠겨 있다가, 이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 그러고 보니!”
내 눈이 엘시 선배를 향했다. 델핀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모두의 이목을 끄는 데 성공한 엘시 선배는, 머뭇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저, 우리가 수렵제 때 잡았던 마수 있잖아요… 그거, 결국 원인 불명으로 처리됐다던데요.”
“원인 불명이라고요?”
그 말을 들은 내 인상이 찌푸려졌다.
우리가 잡은 마수라 한다면 ‘창자 수집가’밖에 없었다. 엘시 선배와 조를 이룬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으니까.
이름을 받을 수준의 마수는 간단히 발생하지 않는다.
일단 강대한 마력원이 필요했고, 그로부터 오랜 시간 영향을 받아야만 했다. 평화롭던 남쪽 숲에 그러한 존재가 출몰했다는 건 무언가가 마력을 응집시키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제국의 조사단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원인 불명’으로 처리됐다는 건, 결국 그 마력의 응집점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만한 마력원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여러모로 수상한 점이 많았지만, 나는 일단 한숨을 푹 내쉬며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당장 풀어내야 할 숙제가 수두룩했다.
나는 그러기 위한 힘을 빌리기 위해 델핀 선배와 엘시 선배를 불러낸 차였다.
“아무튼 그 문제는 나중에 이야기하고… 델핀 선배, 엘시 선배.”
두 여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둘 다 무슨 말이든 해보라는 눈빛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무엇이든 이유라도 말해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의 정보는 오직 나만이 알 수 있었다.
발설하는 순간 별개의 내용으로 발화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말할 수 있는 최선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이유는 말해줄 수 없지만, 그… 곧 귀향제에서 행진을 하잖아요?”
델핀 선배와 엘시 선배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야 아카데미 학생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큰 행사였으니까.
나는 조심스레 두 사람에게 부탁을 남겼다.
“혹시, 델핀 선배가 조를 이끌고 전위에 설 수 있어요? 엘시 선배는 혹시 모르니 마법도 미리 준비해 두고… 또, 물약들도 많이 챙겨두고.”
마지막 말은 못내 두 사람이 걱정돼서 덧붙인 말이었다.
사실 말하고 나서도 어이가 없긴 했다.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습격에 대비하라니.
혹여 질문이라도 돌아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게 끙끙거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럴게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조금 의외라는 눈빛으로 델핀 선배와 엘시 선배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나를 많이 따르기는 해도, 최소한 까닭 정도는 물어볼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델핀 선배나 엘시 선배나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대답할 뿐이었다.
“아무튼, 그래야 한다는 거잖아? 본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주인님. 전위는 맡겨두시길.”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답한 델핀 선배의 뒤를 이어, 엘시 선배의 충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무, 뭐… 지금껏 주인님이 틀린 말을 한 적은 없었으니까? 후후, 이 엘시 라이넬라에게 맡겨 주시길!”
도리어 엘시 선배는 내 지시를 받아 조금 기뻐 보이기도 했다. 내가 그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꽤 기꺼운 모양이었다.
그제야 나는 쓴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이유야 어찌됐건, 이 두 사람이 있다면 든든했다. 각자가 이끌고 있는 패거리들도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나는 마지막까지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이렇게 덧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그러나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점을 눈치 챘는지, 두 사람의 낯빛도 절로 가라앉았다.
그마저도 잠깐, 곧 델핀 선배의 입가에 고혹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서, ‘벌’은 어떻게 됐나요?”
슬쩍 유혹하듯 다가와, 내 귓가에 속삭이는 뜨거운 숨결.
고막이 녹아내릴 듯한 기분이었다.
“……오늘도 제 몸은 준비가 끝나 있는데.”
“야, 야!”
물론 그 전에 엘시 선배가 노호성을 터트린 것은 물론이었다.
그녀는 처량한 눈빛을 하고 내게 말했다.
“주, 주인님… 저는요? 사, 상 못 받은 지 꽤 오래 됐는데…….”
총체적 난국이었다.
결국 두 사람의 요망을 충족시킬 때까지는 몇 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리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떠나기 직전, 달뜬 숨을 내쉬고 있던 델핀 선배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황녀는 괜찮아 보이던가요?”
걸음을 옮기던 내 몸이 우뚝 멎었다.
걸리는 점은 몇 가지가 있었다. 그 비정상적으로 공격적이던 태도, 그리고 때때로 보이던 그 우울한 낯빛까지.
내 눈이 흘깃 델핀 선배를 향하자,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께서는 어린 시절에 아픈 기억이 있거든요. 죽을 뻔했으니까…….”
“……누구한테요?”
흐릿한 반문에 답하는 델핀 선배의 입가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자기 어머니.”
이제 귀향제까지는 얼마 시간이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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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의 공터는 달빛이 쏟아져 내리는데도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인적이 드문 연구동의 뒤편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주위의 바위에 멍하니 걸터앉아 있다가, 허공을 향해 물었다.
“……네리스.”
“네, 이안 님.”
느닷없이 어둠으로부터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갈색 머리카락에, 앞머리에 달린 머리핀이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그녀는 연녹색 눈동자를 고개 숙여 가렸다.
오늘은 그동안 정리한 정보를 건네받는 날이었다.
네리스 선배는 며칠 전과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긴장한 기색이었다.
그녀는 더듬거리면서, 먼저 지난번의 실패를 만회하려 들었다.
“저… 이안 님? 우, 우선 토굴에 대해서는 제국 황실의 비상대피로가 있다는 정보를…….”
“베르라타 궁 지하부터 시내 바깥까지 이어지는 토굴 말이지, 알고 있어.”
네리스 선배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누가 봐도 당황한 모습이었다.
이내 그녀의 고개가 푹 꺾였다.
내 말을 무슨 뜻으로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네리스 선배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사죄의 말을 전했다.
“……죄, 죄송합니다.”
그러든 말든 나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다만 툭 걸리듯이 계속해서 의문이 맴돌 뿐이었다.
황녀는 어린 시절에 죽을 뻔했다.
제 어머니에게, 도대체 왜?
송곳 같은 의문이 어떠한 낱말을 찌르고 들어갔다.
나는 무심코 그 말을 입에 담고 말았다.
“……‘용의 눈’.”
흠칫, 하고 네리스 선배의 몸이 굳었다. 무릎 꿇은 채 나를 올려다보는 시선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제야 내 눈이 그녀를 향했다.
달빛을 등진 내 시선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네리스 선배는, 곧장 고개를 숙여 내 시선을 피했다.
찰나에 불과한 사이 헐떡이는 숨소리가 그녀의 공포심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조차 신경 쓰지 않은 채, 나는 네리스에게 물었다.
“용의 눈, 그에 관한 정보를 말해 봐.”
네리스 선배가 준비해 온 이야기는 꽤 길어질 듯했다.
그녀는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더니, 이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국 황실에 내려오는 오랜 전설입니다…….”
그렇게 이어지는 이야기는, 예상대로였다.
황녀의 과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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