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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71화 (171/649)

〈 171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35)

* * *

느닷없는 시엔의 질문에, 황후의 숨이 틀어막혔다.

그녀의 눈동자가 멍하니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시엔은 멈추지 않고 입을 열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 저를 볼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잖아요. 아들이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그게 무슨 소리니.”

얼떨떨하게 내뱉어진 그 말에는 짙은 위화감에 어려 있었지만, 시엔의 표정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얼마 전에는 저를 보면서 권좌를 생각했죠? 어떻게 하면 제5황녀에 불과한 저를 황제로 만들 수 있을까, 암살도 떠올리고 온갖 계략을 떠올렸잖아요.”

황후는 침묵했다. 마치 그대로 석상이라도 된 듯한 모습이었다.

한참이나 지난 뒤에, 그녀는 겨우겨우 한 마디를 짜냈다.

“……아니야.”

그 부정의 말에 돌아오는 것은 또 다른 부정이었다.

시엔은 거칠게 고개를 젓더니, 형형한 빛이 어린 눈동자로 황후를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그 동공이 세로로 찢어져 있었다.

파충류의 눈이었다.

“왜 흐느끼는 거죠? 제 주변에 사람이 사라져서? 아니, 사실 어마마마께서는 제가 점점 더 권좌에서 멀어지는 걸 두려워하고 계세요.”

“그만.”

툭, 하고 황후는 명령조로 말했다. 그녀의 낯빛은 어느새 새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연이어 질식할 듯한 말이 뱉어졌다.

“……그, 그만하거라.”

“저를 사랑하시나요? 도대체 무엇으로서 사랑하시나요?”

그러나 달아오른 시엔의 언어들은 더는 멈추지를 못했다. 시엔의 눈동자에 떠오른 실망과 증오가 희미한 불꽃으로 타올랐다.

황후는 헐떡이기 시작했다.

농밀한 마력이 주위로 몰려들고 있었다. 시엔이 용의 피를 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듯이.

“제 눈, 이 눈이요? 사실은 이 힘으로 황실 혈통의 정당성을 주장할 생각은 아닌가요? 제 혈통, 제 눈, 그리고 저라는 인간 모두! 어마마마의 도구로서 사랑하는…….”

“그만하라고 했잖아!”

황후의 손아귀가 시엔의 가녀린 목을 쥐어 챘다.

컥, 컥, 끊어진 숨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황후의 눈은 벌개진 지 오래였다.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었다. 차라리 악마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 얼굴을 바라보는 시엔의 얼굴은 절망으로 가득 찼다.

그래,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아 아니… 아니라고 했잖아! 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어! 너를 사랑하는 어머니란 말이야!”

비명처럼 내질러지는 그 목소리는 차라리 발악에 가까웠다.

황녀의 충혈된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간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정신이 그녀를 제정신이 아니게 만들었다.

손아귀에 힘이 점점 더 들어갈수록 황녀의 의식은 멀어졌다.

그녀는 그제야 진심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 이 세상에 나를 순수하게 걱정하는 존재 따위는 없다.

다들 내 황녀라는 신분에 관심이 있는 거야.

나를 도구처럼 생각하는 거지, 그걸 왜 그동안 몰랐을까.

왜 모르고 갈구했을까.

그 진심이라는 이름의 허울을, 사랑과 걱정을, 그 모든 것이 한심하게 느껴져서 황녀의 눈꺼풀이 후회로 젖어 스르르 감겼다.

이후 소란을 듣고 도착한 시녀장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그대로 죽어버렸을 터였다.

대사건이었다.

이 소식은 황제의 귀까지 닿았고, 이내 당대의 가장 뛰어난 마법사라 불리는 노인이 황궁에 급히 도착했다.

‘대현자’라 불리는 이였다.

**

“저주로군요.”

새하얀 수염을 기른 노인은, 망설임 없이 그렇게 말했다.

그의 눈앞에는 눈을 감은 채 잠든 자그마한 소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주위를 둘러싼 기기묘묘한 도형들이 끊임없이 점멸했다.

노인의 뒤에 선 사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직 정정한 기색이 남아있는 그는 제국의 황제이자, 그 소녀의 아버지였다. 그가 처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참으로 말에 거리낌이 없구려.”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폐하. 용혈 문자의 계승자시니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노인의 목소리는 평탄하기 그지없었다. 그 푸른 눈동자가 어둑한 주위에서도 유독 형형했다.

‘마스터’에 이르렀다는 증거였다.

이미 수백 년을 살아온 그는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천명이 다하기 단 몇 년 전에 이처럼 기묘한 인연을 만나게 되었음을, 노인은 인연이라 여겼다.

아무리 제국의 황제라 해도 진리의 끝자락에 이른 노인을 홀대할 수는 없었다.

그는 다소 건방진 태도를 보이는 대현자에게 한 마디도 지적하지 못하고, 단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뿐이었다.

“……내 잘못이로군.”

“어찌 핏줄에 선과 악이 있겠습니까? 단지 타고나길 그랬을 뿐이지. 용의 힘은 평범한 인간에게 그저 저주에 불과합니다. 특히나 모든 이들의 감정을 간파할 수 있는 눈이라, 허허허…….”

노인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더니, 연민과 동정을 담아 황녀를 내려다보았다.

제 어머니에게마저 버림받은 소녀였다.

이제 평생토록 인간을 믿지 못할 것이다. 저 ‘눈’을 봉인해 두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대현자의 위로에도 황제의 표정은 펴질 기미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괴로운 한숨 소리를 흘렸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아비고, 저 애는 내 딸이오. 무언가 방도가 없겠소?”

“눈을 임시로나마 봉인해 둘 수는 있습니다. 그런다고 해도 온전히 가라앉히지는 못하겠죠, 여전히 타인이 가진 가장 강렬한 감정의 편린을 느낄 겁니다.”

황녀를 내려다보는 황제의 눈동자가 우묵히 가라앉았다.

그는 잠자코 이어지는 대현자의 말을 경청했다.

“아마도 인간에 대한 불신은 날이 갈수록 심해질 겁니다. 인간이 가진 가장 강렬한 감정이란 대개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제가 그 ‘눈’을 온전히 봉인해 두었다고 일러둔다면, 정상적인 생활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저 아이는 평생 인간을 믿지 못한단 말이오?”

그 목소리만 들어도 황제가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는 알 수 있었지만, 대현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겠죠. 믿는 것은, 오직 자신의 눈으로 본 욕망과 그에 수반하는 행동뿐이겠지요.”

하아, 하고 황제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비틀거리며 심적 충격을 완화하고 싶은 듯 보였지만, 그는 황제였다.

아버지이기 이전에 황제.

설령 혼자 있더라도 무너져 내릴 기미를 보여서는 안 됐다. 그의 눈동자는 다만 절망으로 물들어 갈 따름이었다.

그 모습을 보기 안쓰러웠던지, 대현자는 제 로브를 가다듬으며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조용히 가라앉은 시선이 대현자를 향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권력자의 눈동자에서 감정을 읽어낼 수는 없었다.

다만 그 눈빛에는 희미한 기대가 어려 있으리라고, 대현자는 지레짐작해 볼 뿐이었다.

“누군가… 누군가 진심을 보여준다면 이 불쌍한 아이도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본래 저주는 축복을 반전시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본심을 마주한다면, 이 아이의 눈도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될 겁니다.”

“……그게 가능하오?”

회의감이 가득 담긴 황제의 말에, 대현자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니까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그날 밤, 황궁에서는 대현자가 주도하는 의식이 치러졌다.

그후 제5황녀 시엔은 일상으로 복귀했으며, 도리어 붙임성 있는 행동으로 예전과 같이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황제와 대현자를 제외하고는, 그녀의 본심을 아무도 몰랐다.

어차피 진정한 호의를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엔의 절망감을.

스스로가 누군가에게 도구에 불과하듯, 황녀 또한 사람들을 도구로 보게 되었음을.

그녀는 매일 아침마다 속으로 다짐했다.

다시는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거야.

다시는.

**

네리스 선배의 기나긴 이야기를 듣고, 내가 내뱉은 감상은 담백했다.

“……온실 속 화초께서 혼자 땅을 파셨군.”

‘대현자’가 방문한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이후 그녀가 달라졌다는 말을 들어보면, 아마도 그 이전에 있었던 일들이 황녀의 정신에 상흔으로 남은 모양이었다.

어머니에게도 죽을 뻔했다니 그 불신이 오죽 클 것인가.

그러니 차라리 얕보이기보다 공포의 존재로 남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 전까지 적의와 경멸을 감내해야 했던 소녀로서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그렇게 툭, 하고 내뱉어진 내 말에 네리스 선배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황족에 대해 논평하는 것은 금기에 가까웠다.

단지 나는 용혈 문자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네리스 선배도 별 말을 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황제의 대리인이 황족을 평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제야 네리스 선배를 대하는 내 태도에서 경어가 되돌아왔다.

“수고했어요, 네리스 선배. 이제 돌아가서 쉬세요… 참, 그리고 귀향제 때 비전투 인원들은 최대한 빠질 수 있도록 수 좀 쓰고.”

그러나 내 축객령에도 네리스 선배는 머뭇거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내 의아한 시선이 그녀를 향하자, 잠시 내 눈치를 살피던 네리스 선배는 조심스레 내게 물어왔다.

“그, 시험은 합격입니까……?”

나는 잠시 네리스 선배를 아무 말도 없이 노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용혈 문자는 황제의 측근들만이 소유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네리스 선배가 말하는 황실의 비사쯤은 내가 이미 알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네리스 선배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그녀를 시험한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굳이 착각을 고쳐 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퉁명스레 한 마디를 내뱉었다.

“……좀 더 지켜보고.”

아무리 생각해도 제국 첩보부의 아카데미 지부는 이상했다.

실습생이라 하더라도 기본적인 수칙마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하물며 인재의 산실이라 불리는 아카데미의 재학생들을 고르고 고른 조직임에도 그랬다.

이에 대해서도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할 듯 싶었다.

부정적인 느낌이 강한 평가였으나, 네리스 선배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는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직후 떠나가려던 네리스 선배는,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잠시 머뭇거렸다.

그 의문을 들을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저, 이안 님?”

말해보라는 듯 내 금빛 눈동자가 흘깃 그녀를 향했다.

네리스 선배는 언제나 그렇듯 조심스럽게 내게 물어왔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황제의 대리인인 내게 감히 도전한 제5황녀를 어떻게 처분할 것이냔 질문이었다.

그야 말할 것도 없는 대답이라,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구해야지.”

황녀를, 귀향제에 참여한 재학생들과 시내의 시민들을, 그리고 세상을.

단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진심이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

그날 밤 황녀는 헐떡이며 눈을 떴다.

켁, 켁, 거리는 목 졸리는 소리가 정적에 잠긴 방 안을 울렸다. 그녀는 헐떡이면서, 다급히 물을 찾아 마셨다.

악몽이었다.

어마마마가 그녀의 목을 쥐어짜는 꿈, 그 악귀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눈동자가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했다.

누구나 그랬다.

황녀를 향하는 감정들은, 한결같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성욕이든, 권력욕이든, 금전욕이든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 욕망들.

심지어 최측근인 아이린이나 시녀장조차도 그랬다. 그들에게서도 황녀를 모신다는 명예욕과 권력욕이 어느 정도 묻어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예외라고 한다면, 단 하나.

단지 동정과 연민만이 느껴지던 그 금빛 눈동자를 떠올리자, 황녀는 곧바로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얕보여선 안 됐다.

오로지 강한 자만이 호의를 살 수 있었다. 약자는 비웃음거리가 되거나, 혹여 조금이라도 틀에서 벗어났다간 배제의 대상이 되기 일쑤였다.

괴로운 나날들이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적대했다. 그날의 기억만 떠올리면 시엔은 머리가 새하얘졌고 그날 이후 그녀는 감정을 잃어버렸다.

인간 따위는 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던 황녀의 눈동자가 닿은 곳은, 머리맡 옆 책상에 두었던 자그마한 묘안석이었다.

연회색의 그 묘안석은, 그녀의 어머니였던 제4황후가 떠나면서 남기고 간 물건이었다.

황후에게 목이 졸린 이후 황녀는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다만 감히 황제의 딸에게 손을 댄 혐의로, 그녀의 어머니가 불명예스럽게 낙향했다는 소식만 전해들었을 뿐이었다.

구구절절한 사정을 적은 편지조차 없었다.

단지 그녀의 어머니는 저 묘안석 하나만을 두고 갔다. 아직도 그 심리를 황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언제든 돌아와서 내 권력에 끈을 대보겠단 뜻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저 묘안석을 끝끝내 버리지 못한 것을 보면, 그녀도 아직은 어린애였다. 시엔은 그렇게 생각하며 무심코 묘안석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허공으로 던졌다 받으며 생각했다.

그 사내는 어떻게 그렇게 강할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적대한다는 그 기분, 황녀도 절절이 알고 있었다. 그것이 가장 무서운 보복이라 생각했기에 고심에 고심을 거친 끝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판을 뒤집었고, 당연하다는 듯 황녀를 동정했다.

건방지게도.

황녀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절박하다고까지 느껴지는 적의였다.

더는 얕보여서는 안 된다.

곧 그 사내에게는 지옥이 당도하리라.

여동생의 상단은 패망할 것이고, 페르쿠스 영지는 엉망진창이 되겠지. 그리고 그의 소중한 이들마저 하나둘씩 그 곁을 떠나갈 것이다.

이미 판은 모두 깔린 지 오래였다. 이제 곧 아카데미의 방학이 시작되면, 본격적인 움직임이 속속들이 나타나겠지.

그 신호가 되는 날은, 그래.

황녀의 시선이 말없이 달력 위를 훑었다. 그곳에 붉은색으로 표시된 날을 떠올리며.

‘귀향제’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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