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72화 (172/649)

〈 172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36)

* * *

캉, 하고 허공에 불꽃이 튀었다.

맞부딪힌 두 검격이 미끄러지듯 서로의 검신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물 흐르듯 이어지는 연격이 다시금 날카로운 충격파를 흩뿌렸다.

단 몇 초, 그 짧은 시간 내에 그려진 검로가 몇 개인지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뭉친 공기가 터져 나오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어지러웠다. 칼날이 그 틈새를 부표처럼 노녔다.

처음에 나는 매 일격마다 기민한 대응에 나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가까스로 검이 따라붙게 되었고, 종래에는 결국 명치에 발차기를 허용한 채 나가떨어져야 했다.

컥, 하고 숨 막히는 신음과 함께 내 몸이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쳤다.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넘어지고 쓰러지는 일 따위는 질릴 대로 질린 뒤였다.

상대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던 듯했다. 그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우락부락한 몸에 붉은 수염이 인상적인 중년의 사내였다.

그의 손에는 들기에도 버거워 보이는 대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 거대한 금속덩어리를 마치 쇠꼬챙이를 다루듯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모습에서는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이 사내의 이름은 데렉, 전설적인 마수사냥꾼이자 아카데미 검술학부의 전임교수였다.

그동안 내 실력도 많이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데렉 교수님은 아직 어림도 없는 상대였다.

그야 수십 년을 오지에서 수많은 마수를 사냥한 인물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동안 나와 비교할 수도 없이 많은 실전 경험을 쌓았을 테니까.

물론 나도 간단히 이길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설마 이빨조차 박히지 않을 줄이야,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입맛이 썼다.

명치를 몇 차례 팍팍 두드리며 호흡을 진정시킨 나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노골적으로 실망한 기색이었다.

이에 데렉 교수님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칠 따름이었다.

“이안, 아무리 네가 사선을 몇 번 넘었다지만 나와 맞붙기엔 아직 이르다. 검술이나 임기응변은 인정해도, 오러의 응집도가 너무 낮아.”

“……그 이상으로 가는 건 노력이 아니라 재능의 영역이잖습니까. 하고 싶다고 익스퍼트가 될 수 있다면, 벌써 아카데미의 반절은 익스퍼트게요.”

못내 서운한 마음이 남아, 내 입에서는 절로 투덜거림이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데렉 교수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뿐이었다.

하기야 데렉 교수님은 소드 익스퍼트 중에서도 완숙한 경지에 오른 검사였다. 그의 앞에서 재능을 운운해 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으리라.

전문적인 검술 훈련조차 받지 않고 누구나 꿈꾸는 경지에 오른 사내였다. 그 재능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그만한 재능이 없었다면 진작 죽음을 맞이했을 만큼, 마수 사냥꾼의 삶이란 만만치가 못했다.

살아서 이 자리에 서 있단 것만으로도 데렉 교수님의 재능은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그는 평민 신분으로 아카데미의 교수 자리에 오르지 않았는가.

그 출중한 재능 탓인지 데렉 교수님은 딱히 내 말에 공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재능을 탓하는 건 간단하다, 이안. 너야 절대적인 마력의 양이 부족하기도 하니 더욱 그렇겠지… 하지만 익스퍼트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재능이 아니라, 심상이다.”

내 시선이 물끄러미 데렉 교수님을 향했다. 명치를 가격당해 구부정한 자세였다. 그는 내 미심쩍다는 눈빛을 보고 쓴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지금만 해도, 봐라. 네 검술이나 실전 경험은 이미 어지간한 익스퍼트를 뛰어넘었어. 하지만 유독 오러만 발전이 없는 까닭이 뭐라고 생각하냐.”

“……마력이 딸려서?”

재차 내뱉어진 내 주장은 마찬가지로 재차 부정당했다.

데렉 교수님은 고개를 한 번 더 내저으며 말했다.

“아직 심상이 정돈되지 않아서 그렇다. 오러란 심상의 구현이고, 네 심상이 단단할수록 더욱 강해지지. 그런데 요즘 네 오러에서는 균열이 느껴지는구나.”

그 말을 들은 내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심상이 정돈되지 않았다니, 듣자마자 단번에 돌부리처럼 걸리는 지점이 있었다.

요즘의 나는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기억은 뒤죽박죽이고, 느닷없이 배운 적도 없는 기술이 늘었으며,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내 주변은 피로 흥건했다.

아마도 그 혼란이 오러에 영향을 미치고 있을지도 몰랐다.

내가 한동안 말없이 눈동자를 내리깔고 있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데렉 교수님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천천히 다가와 내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워낙 커다란 손이라 살짝만 힘을 주었을 텐데도 통증이 느껴졌다. 자연스레 내 미간이 찌푸려지자, 데렉 교수님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라, 이안. 아직 흔들리고 있지만 너는 이미 익스퍼트의 문턱 앞에 있으니까… 다만 한 가지만 기억하면 돼.”

내 눈이 다시금 데렉 교수님을 향했다. 그는 어느덧 진중해진 어조로 내게 조언했다.

“일념(一?)!”

그 한 마디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되묻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뭔데요?”

“싸우다 보면 모든 것이 흐려지고, 잊혀지고, 몽롱해지고… 그 무의식의 틈새에서, 불현듯 장막을 가르듯 튀어나오는 의지가 하나 있지.”

그렇게 말하는 데렉 교수님의 얼굴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마치 아들에게 첫 심부름을 시킨 아버지와 같은 표정이었다.

“잘 찾아봐라,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그 응원의 말을 끝으로 데렉 교수님은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는 손을 두어 번 흔드는 것으로 작별인사를 마쳤다.

잠깐이나마 데렉 교수님을 등지고 서 있던 내 입이 열린 건 그때였다.

“……데렉 교수님.”

데렉 교수님의 눈동자가 흘깃 나를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날카로운 시선은 아직 그에게서 야성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증언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내 눈도 등 뒤를 향했다.

중년의 검수와 내 눈이 허공에서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자꾸 도와주셔도 되겠습니까? 저, 제국 황실이랑 한창 마찰을 빚고 있는데요.”

“흥,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내 조심스러운 질문에도 불구하고, 데렉 교수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삼킬 뿐이었다.

그가 쯧,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평민으로 태어나 귀족까지 가르치고 있는데, 그 정도가 뭐가 대수겠냐? 귀족도 황족한테 물 좀 끼얹을 수 있지.”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귀족 사회의 생리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다면 나와서는 안 되는 소리였다. 문제만 삼자면 황족 모독죄로 잡혀갈 수도 있었다.

그만큼이나 위험천만한 발언.

그러나 데렉 교수님의 입에서 내뱉어지니, 아무렇지도 않은 이야기처럼 느껴져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수없이 많은 사선을 넘은 스승의 충고였다.

나는 ‘일념’이라는 낱말을 제 가슴 속에 새기기로 하면서, 충격의 잔향으로 떨리는 손을 진정시켰다.

검 손잡이를 그러쥔 내 눈이 저물어 내리는 황혼을 향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델핀 선배와 엘시 선배에게 행렬의 사주경계를 맡겼고, 성녀와 엠마를 비롯한 비전투 인원에게는 귀향제에 참가하지 않기를 권했다.

물론 오늘 만나뵌 데렉 교수님께도 특별히 경계에 신경 써 주시기를 부탁드렸다. 교수님쯤 되는 실력자라면 수많은 희생을 줄일 수 있을 터였다.

그 모든 길들이 이어져서, 결국은맞닿아 갈라지는 길목.

‘귀향제’는 이제 내일이었다.

**

귀향제 당일, 황녀는 초조한 기색으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리저리 공회전을 반복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누가 봐도 불안정해 보였다. 늘 여유가 넘치던 시엔의 변모에 지나가던 행인 몇몇이 관심을 기울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황녀도 남의 눈을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준비는 끝났다.

도화선에 불만 붙이면 끝이었다. 유르디나 가문의 군대가 도착하려면 시간이 남아있지만, 그 이전에도 페르쿠스 영지를 파멸시킬 계획은 가동시킬 수 있었다.

우선 리아 페르쿠스의 상단부터 돈줄을 옭아매면 그만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거래처가 계약 파기를 통보했음에도 상단이 버틸 수 있었던 까닭은, 그동안 확보해 둔 현금 자산 덕분이었다.

하지만 상단의 채무 상환 능력이 의심되면 종래의 채권자들은 임의로 긴급 상환을 신청할 수 있었다. 본래는 제국 황실의 지엄한 감독 하에 이루어지는 일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시엔이 곧 제국 황실의 일원이 아닌가.

주변 영지와 교류가 끊기기 시작한 페르쿠스 영지에는 치명타였다.

얼마 가지 않아 영지 내의 물자가 부족해질 테고, 그럴 때를 대비한 제국 황실의 지원은 도착하지 않을 터였다.

뿐만 아니라 아인스턴 영지와 하스터 영지에 대해서도 몇 가지 계책이 준비되어 있었다. 물 샐 틈 없이 완벽한 계획이다.

그럼에도 시엔이 지금처럼 초조해 하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돌이킬 수 없다.

일단 한 번 시작되면, 그 피해를 돌이키기 위해서는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하물며 채무 상환 능력이 불분명한 상단이라는 꼬리표는 상계에서 치명적이었다.

그 불신을 다시 신뢰로 뒤바꾸기 위해서는, 몇 년은커녕 수십 년이 더 필요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힌다는 뜻은, 곧 누군가와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된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사실 시엔은 겁이 많았다.

어린 시절 모든 사람의 공포와 경멸을 홀로 감내해야 했던 그녀였다. 그것은 그녀의 정신세계 깊숙한 곳에 지워지지 않는 상흔을 남겼다.

그래서 지금껏 단 한 사람도 그녀를 미워하지 않도록 갖은 애를 써 왔다.

단 한 사람의 적의라도 얼마나 아플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시엔이 결단을 내리면, 최소한 이 세상의 한 사람은 그녀를 평생토록 미워하게 될 터였다.

그것이 못내 무서웠다.

특히 도끼를 들고 그녀를 노려보던 금빛 눈동자를 떠올릴 때면, 시엔은 절로 오금이 저렸다. 하필 적으로 돌려도 그토록 무시무시한 인간을 돌리다니.

하지만 얕보일 바에는 공포의 대상이 되는 편이 나았다.

수없이 많은 증오를 딛고 시엔이 깨달은 결론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안 페르쿠스가 아니던가.

그를 적대하는 이는 많아도, 정작 그를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다.

이안 페르쿠스는 공포스러운 존재였으니까.

황녀도 그대로 행할 뿐이었다.

다만 아무리 다짐을 반복해도 망설임이 사라지지 않아, 그는 사내 하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초조해하는 이는 비단 시엔뿐만이 아니었다.

황녀가 강제로 대동하고 나선 아이린 또한 우물쭈물하는 기색이었다. 지난 이안의 위협 이후 호위를 강화하긴 했지만, 워낙 당한 게 많다 보니 아이린은 의기소침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제국 황실에서 새로 파견된 근위 기사 몇몇 정도만이 태연해 보일 따름이었다. 그 외에는 비전투원이라 할 수 있는 시녀장만이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처럼 두 여인의 애를 닳게 만든 사내는, 아침이 되자마자 곧 모습을 드러냈다.

허리춤에 보이지 않던 주머니가 보였다. 안이 두둑한 것으로 보아 물약을 넣은 주머니인 듯했다. 그리고 날카롭게 벼려진 손도끼의 날까지.

만반의 준비를 마친 기색이었다. 도대체 귀향제의 행렬 따위에 그토록 공을 들여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시엔은 잠시 흐릿한 의혹을 느꼈으나, 그보다는 비로소 사내를 마주했다는 안도감이 컸다.

그녀는 무심코 사내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이안 페르쿠스!”

아무 말도 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던 사내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흘깃 황녀를 향했다. 그 타오르는 눈빛을 볼 때마다 황녀는 조마조마해지는 느낌이었지만,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녀가 성큼성큼 걸어 사내의 지척에 섰다.

두 남녀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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