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73화 (173/649)

〈 173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37)

* * *

황녀가 사내에게 단 둘만이 들을 수 있는 속삭임을 건넬 때까지는 얼마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황녀는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이제 돌이킬 수 없어요.”

그 섬뜩한 예언에도 사내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황녀의 눈동자에 포착되는 감정도 비슷했다. 그나마 색채가 느껴지는 정서라 한다면, 얼마 전과 마찬가지로 동정과 연민뿐이었다.

시엔은 그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다.

동정과 연민은 강자의 권리였다. 따라서 그 감정이 향하는 쪽은 약자일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지금 이안은 황녀를 자신의 아래로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더욱이 분했던 것은, 시엔도 내심으로는 그 평가가 틀리지 않았다고 느끼고 있단 점이었다.

이안 페르쿠스는 강했다.

그 실력이든, 정신력이든, 모로 보나 그랬다. 그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적의 속에서도 태연했고, 제국 황실이라는 권력의 그림자 아래서도 당당했다.

만약 어린 시절의 기억만 없었다면 황녀도 깔끔히 패배를 인정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아직 황녀는 유년기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재차 돌이킬 수 없는 미래를 알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제가 말 한 마디만 하면, 당신 여동생의 상단은 망해요. 그리고 페르쿠스 영지도 마찬가지겠죠… 그러니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제게 용서를 비세요.”

그 후로도 몇 마디의 말이 이어졌지만 그 저의는 하나였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뜻이었다.

사내는 한참 동안이나 묵묵히 황녀의 계획을 들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 페르쿠스 가문을 무너트릴 것인지 열거하는 황녀의 목소리에는 절박함마저 어려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이야기를 들은 이안의 반응은,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황녀 전하.”

가라앉은 목소리, 희미한 기대를 품은 연회색 눈동자가 이안을 향했다.

그는 쓴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호위를 늘리셨군요. 잘하셨습니다.”

그 말이 끝이었다.

이안은 가타부타 덧붙이는 일도 없이, 그대로 걸음을 내딛어 황녀의 곁을 떠나갔다.

진심이었다. 이안에게서는 안도하는 심정만이 느껴졌다.

이를 확인한 황녀는 어안이 벙벙해서,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는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저토록 태연할 수 있을까.

그만큼이나 시엔을 얕보고 있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고개 숙인 황녀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분개한 시엔을 달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시녀장뿐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다가와, 머뭇거리는 어조로 황녀에게 조언했다.

“저, 황녀 전하? 무언가 수상합니다. 아무래도 계획의 실행은 조금 늦추는 편이…….”

“……당장 시작해.”

시엔을 한 번 더 만류해 볼까 생각했던 시녀장은,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열기로 달아오른 숨소리, 떨리는 주먹, 그리고 증오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까지.

도무지 결정을 번복할 기색이 아니었다.

“당장 무너트려, 당장!”

그 고함 소리와 함께 호위 기사 중 하나가 고개를 푹 숙이고 떠나갔다.

이를 바득바득 가는 시엔의 눈동자에는 새파란 원독이 줄기줄기 뻗쳐 나오고 있었다.

대가를 치르게 해줄 것이다, 반드시.

얕보여서는 안 되니까.

그러한 일념으로 가득 찬 시엔은, 차마 이안이 보였던 몇 가지 이상신호를 눈치 채지 못했다.

그래서 더더욱 알 수가 없었다.

그 결정이 시엔에게 평생의 후회로 남게 될 줄은.

귀향제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

귀향제의 행렬은 화려했다.

각 학부의 수석들이 앞장을 서고, 그 뒤를 성적순으로 따른다. 그러나 행진이 계속될수록 행렬은 점점 더 뒤섞이며 종래에는 무질서한 덩어리로 화하고 만다.

지나가는 학생들이 시내를 통과할 때면, 상인들은 그들에게 안주거리나 술을 건네기도 했다.

행렬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학생들은 이를 끝없이 행렬의 안으로 전달했다. 그러다 누군가 입이 심심하거나 술이 고프면 이를 먹고 마시는 식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아카데미를 지나, 이제 시내의 절반을 통과했을 뿐인데도 주위에는 먹고 마시는 소리로 왁자했다. 이제 성적 발표까지 끝났으니 마음 편히 즐기자는 태도였다.

심지어 재학생들이 떨어트리는 안주거리를 노리는 길고양이들과 새들까지 몰려와, 행진은 더욱더 시끌벅적했다.

그러나 그 흥겨운 소란 속에서도 예외가 되는 무리가 몇몇 있었다.

낙제를 통보받고 낙향을 해야 하는 이들이 포함된 무리였다.

그들은 귀향제에서 단연 최고의 배려를 받는 이들로, 모든 안주와 술이 그들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졌다. 그런다고 해서 그들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아카데미는 입학도 힘들지만, 졸업은 더욱 힘들었다.

그래서 세간의 기준은 늘 아카데미의 입학보다는 졸업을 향해 있었다. 중도탈락자에게 주어질 관심이나 자비 따위는 그다지 많지 못했다.

특히나 평민이라면 눈앞에서 인생 역전의 기회를 날린 셈이었다.

우울하지 않다면 이상했다. 개중에는 아예 모든 것을 놓아버렸는지 웃고 떠드는 학생도 몇몇은 존재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소란이 일지 않는 곳이 더 있었다.

바로 내 주변이었다.

서로의 몸뚱아리를 부대끼며 행진하는 남들과는 달리, 내 주위로는 인적이 드물어 한적했다. 모두 몇 미터쯤은 나와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내 취급이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하기야 제국 황실에게 찍힌 내 곁을 지키려면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할 터였다.

우선 굳이 손해를 보더라도 내 옆을 지키려는 별종이고, 제국에 속하지 않는 인물이며, 설령 앞의 두 조건을 만족하더라도 제국 황실이 건드릴 수 없을 만큼 고위직에 속해야 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금 내 곁에는 그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인물이 서 있었다.

성녀였다.

일전에 위험할 수도 있으니 신전에 남아있으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고집을 부려 나를 쫓아 나온 모양이었다.

내 눈빛이 단번에 떨떠름해졌다.

“성녀님, 혹시 그동안 감을 잃으셨습니까? 지금 제 곁에 있어봐야 손해밖에 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는데요.”

물론 오늘 안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지만, 혹시 모를 가능성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국의 최고위 인사인 만큼 제국 황실이 성녀까지 건드릴 확률은 낮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교적으로 그렇다는 뜻이지, 아카데미 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제국 황실로서는 알 바 아니었다.

예를 들어 나를 향한 적의가 성녀의 대중적인 인식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

온갖 가식을 떨어가며 평판을 관리하는 성녀로서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내 곁을 떠날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태연한 목소리로 나를 놀려댈 뿐이었다.

“조금만 더 잘했으면 수석은 아니라도 차석은 됐을 텐데, 조금 슬프지 않아요?”

“……차석인 유렌한테 긴장 좀 하라고 전해 주시죠. 하는 김에 우리 3학년 수석께도.”

내 우스갯소리에 성녀는 피, 하고 김이 샌다는 듯한 소리를 낼 뿐이었다. 그녀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검술학부 3학년 수석? 듣기로는 개성이 넘친다던데,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은 사양이에요. 제 곁에는 당신 하나로 이미 충분하고 넘치거든요.”

까다롭기는 무슨, 나처럼 유순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이를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러면 성녀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나를 볼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억울한 취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잠시 황당한 눈빛으로 성녀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문득 생각이 나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왜 나왔습니까? 신전에 틀어박혀 있으라고 말했잖아요.”

“흥, 누구 좋으라고요?”

성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노려보았다. 희미한 원망마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없어 내 눈이 의혹으로 물들었다.

“또 나만 빼놓고 여자들이랑 놀러 다닐 생각이었잖아요? 난봉꾼 공자.”

“손도끼 공자입니다.”

“그리고 손도끼로 그날 꼬실 여자를 찍어버린다는데, 사실이에요?”

“당연히 헛소문입니다.”

그렇게 성녀와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와중이었다.

어느덧 행진은 반환점을 돌고 있었다. 이제 다시 아카데미로 향하는 길목, 나는 느닷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시간이 일순 정지한 듯한 착각이 일었다.

내 눈이 다급히 주위를 훑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수상한 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잘못 생각했나?

그러던 내 정신을 일깨운 것은, 성녀의 목소리였다.

“고, 고양이다…….”

어느덧 행렬의 끄트머리로 밀려난 성녀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길가에는 귀여운 외모의 길고양이 하나가 앉아 있었다.

야옹, 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밥이나 달라는 뜻이었다. 참으로 건방지기 짝이 없는 동물이었다.

그러나 이미 귀여움의 포로가 된 성녀는 자발적인 호구가 되기를 자처했다. 그녀는 어디서 받아든 새우튀김을 들고 조심스레 길고양이에게 다가갔다.

성녀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니, 그녀도 천생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여운 것에는 사족을 못 쓰니 원.

하지만 그러는 성녀를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나 또한 천생 남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으려던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나와 길고양이의 눈이 마주쳤다.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나와 성녀를 비추고 있었다.

그 직후의 일이었다.

빙글, 하고 그 동공이 한 차례 회전했다.

정상적인 생물이라면 불가능한 움직임,이를 깨달은 나는 곧장 성녀를 끌어안듯 감싼 채 몸을 내던졌다.

성녀의 입에서 토막난 의문성이 새어 나왔다.

“꺄, 꺄아아악!가, 갑자기 무슨…….”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쾅, 하는 폭음이 울려 퍼졌다. 비명과 함께 충격파가 행렬을 휩쓸었다. 조각난 석재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성녀가 먹이를 건네려던 고양이의 몸뚱아리가, 느닷없이 팽창하더니 폭발해 버린 것이다.

투두둑, 하고 조각난 살점과 핏물이 쏟아져 내렸다. 길고양이의 잔해였다.

폭음은 한 차례로 끝나지 않았다.

그 뒤로도 몇 번의 폭음이 더 터져 나왔고, 아우성이 울려 퍼지며 주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충격파가 주위를 스칠 때마다 내 등짝을 강타했다.

내가 꼭 끌어안고 있던 덕에 성녀는 멀쩡했다.

다만 어버버, 하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안심하라는 듯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신성력 주머니, 푹신해서 좋네요.”

성녀의 탄력 있는 젖가슴은 충격 흡수용으로도 제격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뭉클한 감촉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었지만, 이제시간이 없었다.

나는 곧장 몸을 일으킨 채 검을 뽑아들었다.

그제야 뒤늦게 내 말뜻을 깨달은 성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무, 무슨 소리를……!서, 성희롱이야 진짜!”

물론 성희롱이든 뭐든, 지금 내 관심사는 아니었다.

드디어 습격이 시작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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