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75화 (175/649)

〈 175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39)

* * *

쿨럭이는 소리와 함께 핏물이 뱉어졌다.

느닷없는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탓이었다. 이를 본 성녀의 낯빛이 단숨에 창백해졌다.

이보다 더한 부상도 수도 없이 보아왔을 그녀였다. 이토록 당황할 까닭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더듬거리는 어조로 볼 때 나를 걱정하는 마음은 분명해 보였다.

“괘, 괘, 괜찮아요?! 여, 역시 당장 치료해야만…….”

아니, 당신이 쳐서 이러는 거잖아.

그러한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나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냈다. 나를 위하는 마음에 그랬다는 사실쯤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런다고 해서 내 고집이 꺾이는 일도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나는 피비린내 나는 숨결을 가다듬었다.

내 입에서 또 한 번의 허세가 흘러나왔다.

“주위에 더 심각한 사람이 많고, 이만하면 버틸 만합니다. 워낙 많이 부상을 당해봐서…….”

그리고 팔로 땅을 짚은 채로, 나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는 몸짓이었다.

입에서 절로 쓰디쓴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견딜 만은 했다.

최소한 당장 전투가 불가능한 수준의 부상은 아니었다.

나는 스러지지 않은 전의를 드러내듯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성녀는 이제 황당하기까지 하다는 눈빛이었다.

그마저도 찰나에 불과했다. 덜덜 떨리고 있던 연분홍색 눈동자에 분기가 차올랐다.

치료조차 받지 않고 또 다시 전장을 향하려는 내게 화가 난 모양이었다.

울컥, 하고 성녀가 노호성을 터트리려던 그때.

“이안!”

후웅, 하는 묵직한 인기척과 함께 거구의 사내가 내 지척에 섰다. 날듯이 내 옆으로 착지한 그는 곧장 내 어깨를 들쳐멨다.

데렉 교수님이었다. 그는 이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나?”

본래 그는 한창 최전방에서 마수들을 견제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방진의 중앙에서 폭음이 들려오니 이상사태를 감지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 길로 중앙부로 날아와 내 곁에 선 것이다.

기민한 대응이었다. 과연 수많은 사선을 넘은 역전의 용사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데렉 교수님께 무슨 대답을 내놓을까 고민하던 나는, 어쩔 수 없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요.”

“견딜 만하구만!”

내 솔직한 고백에 데렉 교수님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기야 그에게 있어 이만한 상처는 버틸 만한 수준에 불과할 터였다.

수십 년 동안 목숨을 걸고 마수를 사냥하러 다닌 사람이었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죽을 위기도 수없이 겪어봤으리라.

다만 데렉 교수님이 나를 찾아온 것은 단지 내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곧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본론을 알렸다.

“이안, 애송이 몇 명이 무작정 아카데미 쪽으로 도망쳤다. 지금까지는 고양이들만 있는 줄 알고 신경 쓰지 않았지만, 공중으로 이동이 가능한 마수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혹시 마수들이 따라붙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내 조심스러운 예측에 데렉 교수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기묘한 조화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 행렬을 습격하는 고양이 마수는 총 두 종류였다.

자폭하는 개체와, 느닷없이 커져서 전투를 하는 개체.

이 두 종류의 고양이 마수가 지닌 공통점은 하나뿐이었다. 바로 변이를 일으키기 전까지 자그마한 체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까마귀 마수의 발톱에 붙들려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지상과 공중을 모두 경계해야 할 판이었다. 심지어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은 새떼들이 아카데미 방향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단순한 우연이라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애초에 종이 다른 두 마수가 협력하고 있다는 점만 보더라도, 지금의 습격이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은 명확했다.

배후가 있다.

이미 몇 번이고 편지에서 확인한 내용이었지만, 실제로 습격을 당하고 보니 그 징후가 명확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나는 잠시 입술을 짓씹었다.

조종당하는 마수들이라면 보다 지능적인 움직임을 보일 터였다.

방금 전처럼 자폭 고양이 마수를 공중에서 투하하는 것이 하나의 예였다. 무작정 도망치느라 오합지졸이 된 저학년들을 뒤쫓아 각개격파를 시도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위험했다.

도망친 이들 중에 비전투인원이 있다면 더더욱 그럴 터였다. 실력 있는 누군가가 아카데미 쪽으로 향해야만 했다.

부상자와 민간인들을 보호해야 하는 전장에서 많은 사람이 이탈할 수는 없었다. 이탈해야 한다면 믿을 만한 소수 정예가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데렉 교수님은 그 적임자로 나를 고른 셈이었다.

“이안, 너는 실전 경험이 풍부한 데다 발재간 하나는 늘 훌륭했잖냐. 어서 뒤쫓아서 안전을 확보해라.”

“이곳은요?”

데렉 교수님은 대답 대신 대검을 한 번 휘둘러 보였다.

내 어깨를 들쳐메고 있었기에 오직 한 팔로만 만들어진 기예였다. 그것만으로 허공에 빛의 실선이 무수히 새겨졌다.

그리고 솟구치는 핏빛 광망(光?).

까마귀 마수들은 예상치 못한 일격에 급격히 고도를 높였다. 하지만 그보다 오러의 검망이 그들을 분쇄하는 속도가 빨랐다.

비명, 그리고 후두둑 떨어져 내리는 핏물과 살점.

최소한 또 다시 까마귀 마수에게 불의의 일격을 허용할 걱정은 없어 보였다. 아무리 데렉 교수님이라도 이만한 기술을 무한정 쓸 수는 없을 테지만 말이다.

나는 조금 지친 기색의 데렉 교수님께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곧장 몸을 돌렸다.

그렇게 막 내달리려던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은 성녀였다.

나와 데렉 교수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그녀는, 내가 떠날 채비를 하자마자 다급히 몸을 일으켜 내 진로를 틀어막았다.

그녀가 결연한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아, 안 돼요… 부상당했잖아요! 또 혼수상태로 돌아오려고요?! 그, 그것만큼은 안 돼요…….”

묘하게 필사적인 만류에 나와 데렉 교수님의 표정이 난감해졌다.

떠나긴 떠나야 할 것 같은데, 실질적으로 나를 전담하고 있는 사제인 성녀가 애원하다시피 말하니 발걸음을 떼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아닌 누군가를 파견하기도 애매한 것이 현실이었다.

소수의 전력이 충돌하는 기동전에 마법사인 엘시 선배를 파견하기는 힘들었고, 무리를 통솔하고 있는 델핀 선배는 더더욱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물론 세리아도 익스퍼트에 이른 실력자긴 했지만, 아무래도 저학년이라 무게감이 떨어졌다.

그렇다고 성녀의 치료를 받아들일 시간도 마땅히 없었다.

신성력을 마냥 쏟아붓는다고 해서 완치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별다른 문제 없이 쾌차하기 위해서는 반복적이고 섬세한 치료가 필수적이었다.

부작용만 각오한다면 응급처치로나마 치료를 받고 나설 수는 있었다. 단지 지금 성녀의 태도로 볼 때 이를 허가해 줄 것 같지는 않았을 뿐이지.

결국 나는 한숨과 함께 물약 주머니에서 힐링 포션을 꺼냈다.

그리고 단숨에 들이켰다. 은은한 쓴맛이 혀에서 느껴지더니, 이내 욱신거리던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이조차도 임시 조치에 불과하긴 했다. 하지만 최소한 내 의지를 보여주기엔 충분할 터였다.

터벅터벅 내가 걸음을 옮겨도 성녀는 요지부동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공포였다.

무엇이 두려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하나, 지금 성녀가 나를 많이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오늘 나는 성녀를 두 번이나 감쌌다.

첫 번째 폭발로부터 한 번, 그리고 까마귀 마수가 투하한 폭발로부터 또 한 번.

그래서 더욱이 내 상태가 신경 쓰이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성녀는 상상 이상으로 여리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두어 걸음 옮겼을 뿐인데, 성녀와 나 사이의 거리는 어느덧 지척이었다.

성녀는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전쟁터로 떠나는 남편을 붙잡는 아내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 애절한 광경에 데렉 교수님조차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슬쩍 시선을 피했을 정도였다.

나머지야 팔다리가 하나씩 아작난 채로 땅바닥을 구르고 있거나, 몰려드는 마수를 처리해야 했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다행이었다. 아무도 나와 성녀님을 보고 있지 않아서.

잠시 애틋한 눈빛으로 성녀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구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성녀님.”

“아, 안 돼요!”

강한 의지를 담아 내저어지는 성녀의 고개, 이를 예상하고 있던 내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성녀의 눈꼬리에는 흐릿한 이슬마저 맺혀 있었다.

당연히 어지간한 수단으로는 설득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해 보기로 했다.

쿡, 하는 감촉이 손가락 뼈를 타고 전해졌다.

내 검지가 탄력 있는 살덩어리를 파고들고 있었다.성녀의 ‘신성력 주머니’였다.

일전에도 몇 번 느낀 적이 있긴 했지만, 손가락으로 눌러보니 더욱 명확히 느껴졌다.

너무나 훌륭한 촉감이었다.

가능하다면 계속 이러고 싶을 만큼.

하지만 내가 그 감촉을 충분히 만끽하기도 전에, 즉각적인 성녀의 반응이 이어졌다.

“히, 히야아아앗?!”

묘한 소리와 함께 성녀는 펄쩍 뛰더니, 그대로 두어 걸음을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연분홍빛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였다.

성녀는 그렇게 경악과 당혹으로 물든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은 한동안 뻐끔거리며 언어를 토해내지 못했다. 소리가 내질러진 것은, 성녀가 내 아쉬움에 젖은 표정을 보고도 몇 초가 지났을 무렵의 일이었다.

고래고래 울려 퍼지는 성녀의 고함 소리가 이내 내 고막을 강타했다.

“미, 미, 미쳤어요?! 이, 이거 성추행이야… 당신 종교재판에 회부할 거야!”

어찌나 수치스러웠는지, 성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내게 삿대질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의 협박 아닌 협박에도 내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우리 사이에 뭐 어떻습니까.”

“우, 우리 사이가 도대체 뭐라고……!”

“성국에 간다면, 은밀한 곳도 만지게 해주는 특별한 사이?”

느닷없이 뱉어진 내 폭로에 성녀는 곧장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슬슬 우리 둘에게 모이는 시선을 의식한 탓인지, 내 앞까지 쪼르르 달려와 속삭였다.

“……그, 그걸 남들 앞에서 말하면 어떡해요! 오, 오해하잖아요!”

“거봐요, 특별한 사이 맞잖습니까.”

내 두 손이 조용히 성녀의 어깨 위에 얹어졌다.

처음에는 흠칫 몸을 떨었던 성녀였지만, 곧 어안이 벙벙한 눈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 입에는 여전히 쓴웃음이 맺혀 있었다. 조금쯤은 장난스러운 미소였다.

“그러니까 죽지 않습니다. 언젠가 성국도 가고, 그 신성력 주머니도 만져봐야죠.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마수 좀 썰러 가는 것뿐입니다. 늘 하던 일이죠.”

“……늘 그러다 중상을 입기도 했지만요.”

부루퉁하게 흘러나온 성녀의 반박은 정론에 가까웠다.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던 나는 물 흐르듯 화제를 전환시켰다.

“우리 내기 하나만 합시다.”

무슨 뜻이냐는 듯, 성녀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걱정과 부끄러움이 반씩 묻어나오는 눈빛이었다. 그 모습이 못내 사랑스럽게 느껴졌지만, 내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다.

나는 애써 숨소리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제가, 전부 다 해결하고 올게요… 지난 몇 주 동안 빚었던 제국 황실과의 마찰, 그리고 마수들의 습격까지 전부 다.”

“……만약 실패하면요?”

그 물기에 젖은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안심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성녀님이 이기는 거죠. 그때는 소원 하나를 들어드리겠습니다. 대신, 제가 이기면 성녀님도 소원 하나만 들어주세요.”

“뭐에요, 그게…….”

성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그러다 당신이 죽기라도 하면, 나는 어쩌라고요?”

“그래도 상 하나는 있어야 살아남을 의욕이 나지 않겠습니까.”

결국 성녀는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것이 대답 대신이었다.

나는 성녀의 가녀린 어깨를 몇 번 토닥이고는,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

“성녀님, 부상자들에게는 성녀님이 필요해요. 신성력을 낭비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특히 황녀 전하를…….”

막힘없이 이어지던 내 말이 뚝 끊긴 것은 그 무렵이었다.

‘황녀 전하’라, 그 낱말을 내뱉은 직후 내 눈동자가 순식간에 사위를 훑었다.

없었다.

“황녀 전하를…….”

황녀는 몇 명의 호위기사를 대동하고 다녔다. 당연히 더욱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기억을 되짚어 봐도 방진 속에는 황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황녀도 떠났다.

높은 확률로, 아카데미 쪽으로.

“……이런 씨발.”

내 입에서 절로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성녀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으나, 더는 그녀를 신경 쓸 여력이 남아있지 못했다.

미래에서 온 ‘나’는 일부러 황녀와 접촉하고 성수까지 끼얹었다.

최소한 그녀가 이 습격의 핵심인물 중 하나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런데 어느새 자취를 감춘 뒤라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당장 부상자들이 속출하다 보니, 그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었다.

애가 닳은 나는 작별인사를 겸한 한 마디만을 남겼다.

“다음에 이야기합시다. 아무튼, 모든 일이 끝나면 베르라타 궁으로 오세요.”

그리고 나는 성녀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곧장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공간이 압축되었다. 주위의 풍경이 실선으로 죽 늘어지며, 청각이 고요해졌다.

당장 황녀를 찾아 보호해야만 했다.

그러한 사명감이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본능에 가까운 직감이 끊임없이 내게 경고를 보내왔다.

황녀가 위험하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그 결론이 내 뇌리에 쐐기처럼 틀어박혔다.

이제 황녀를 구할 시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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