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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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에게는 성이 없었다.
그 까닭은 단순했다. 엠마가 평민이었기 때문이었다.
명예와 권세를 상징하는 가문의 성은 오직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가난한 약초꾼의 딸인 엠마와 귀족 사회는 하늘과 땅만큼의 거리가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짝사랑하는 사내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무심코 깨닫곤 했다.
이안 페르쿠스, 사내는 그 이름이 증명하듯 페르쿠스 자작 가문의 차남이었다.
귀족 중에는 조금 급이 떨어진다는 시골의 하급 귀족이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귀족은 귀족이었다. 평민과는 그 신분부터가 달랐다.
작위를 승계 받을지는 모르겠으나, 최근의 활약으로 볼 때 그 미래는 탄탄대로였다. 고작 평민 계집애한테 연연하지 않아도, 그에게 선택지는 무궁무진했다.
그 점이 못내 아팠다.
사랑했기 때문에 엠마는 감히 그에게 마음을 고백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단지 조금쯤 떨어진 거리에서, 그에게 헌신할 수 있으면 족했다.
그러나 첫사랑의 열병은 때때로 기묘한 열기를 불어넣기도 했다.
평생 연금술 관련 서적만 읽던 엠마가 연애 소설을 읽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저잣거리에서 흔히 파는 망상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평민에 불과한 여자가, 어쩌다 능력도 출중하고 외모도 훌륭한 귀족 사내에게 구원받고 사랑을 키워가는 이야기.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나 다름없었다.
귀족은 온전한 개인으로 살아갈 수 없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가문의 부품이자 도구인 탓이었다.
결혼이란 또 다른 귀족 가문과 혈연으로 묶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당연히 혼처도 신중히 골라야 했다. 먼 옛날에는 단지 귀족과 하룻밤 잤다는 죄목으로 평민이 사형을 당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족과 평민 사이의 연애가 전무한 것은 아니었다.
자고로 사랑에는 장벽이 없었다.
신분의 벽조차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원초적인 감정을 억누를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연인을 위해 가문마저 버리고 야반도주를 하는 경우가 대표적이었다.
몇 년에 한 번씩은 ‘세기의 열애담’이라며 그러한 소문이 떠돌곤 하는데, 그 결말이 대부분 불행하다는 점만 빼면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평민 계집애들의 가슴에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불어넣어주곤 했으니까.
한때는 멍청하다고 생각했던 그 계집애들과 똑같은 망상을 하게 될 줄이야, 엠마는 연애 소설을 읽으면서도 쓴웃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실 엠마는 죄가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귀족을 사랑한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귀족과 평민 사이의 격차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단지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좋은 남자도 만나게 되리라 생각했다.
상대가 귀족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카데미를 졸업한 엠마의 출세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고, 평민끼리 맺어지더라도 생계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시간이야 많았다. 그렇게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다 결혼하는 것이, 얼마 전까지 엠마가 꿈꾸었던 미래 구상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안 페르쿠스’라는 사내가 그녀의 인생에 툭 튀어나와 버린 것이다.
그것도 평민 하나의 목숨 값으로 과분하기 짝이 없는 1만 골드라는 비용을 지불하면서.
그날의 추억을 떠올리던 엠마의 눈빛이 잠시 몽롱해졌다. 그녀의 가녀린 손이 탁, 하고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그래, 엠마는 이안에게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다.
그러니 엠마가 이안에게 헌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하는 것뿐이라고,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걸음을 옮겼다.
신전에서 조금 떨어진 산책로였다.
그곳에는 익숙해진 뒷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아직 파르르 떨리는 팔다리가 안타까운, 금발 벽안을 지닌 귀족 여인이었다.
루페시아 영애.
한때 엠마의 뺨을 때렸다 이안에게 두 팔과 다리 한 짝을 잃어버린 여인이었다. 그 이후 엠마는 그녀를 꾸준히 찾아가고 있었다.
그 까닭은 단순했다.
그러면 루페시아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어질까 싶어서였다.
최근 아카데미의 대부분이 이안을 적대하고 있다는 사실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엠마는 그 적이 단 한 명이라도 줄어들길 바랐다.
의외로 루페시아 영애는 엠마를 강하게 뿌리치지는 못했다.
이안의 존재가 엠마의 뒤에 버티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안이 무서워서라도 차마 엠마에게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다.
처음에는 껄끄러운 사이였던 둘이었으나, 몇 번이고 얼굴을 마주치다 보니 조금이나마 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루페시아 영애가 엠마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것이 그 증거였다.
비록 한숨 섞인 불퉁한 목소리긴 했으나, 그래도 ‘평민 계집애’라고 비웃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최소한 엠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너, 바보구나.”
“응, 왜?”
툭, 하고 던져진 그 한 마디에 엠마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는 수밖에 없었다.
본래라면 ‘아가씨’라 부르며 깍듯하게 대해야 하는 상대였지만, 루페시아 영애는 그날의 추억이 악몽으로 남은 모양이었다.
오히려 엠마가 동등한 존재를 대하듯 굴어야 루페시아 영애는 안정을 되찾곤 했다.
그 덕에 엠마와 루페시아 영애는 영락없이 사이좋은 친구처럼 보일 뿐이었다.
물론 이는 엠마가 귀족 못지않은 화사한 외모의 소유자라는 점도 한몫했다.
“네가 그런다고 그 남자가 널 돌아보기나 할까? 귀족에게는 귀족의 사회가 있어. 평민 계집애 따위는 눈길조차 주지 않을 거야… 장난감으로 삼는다면 몰라.”
시큰둥한 말이었으나 나름대로 진심이 담긴 조언이었다.
루페시아 영애는 딱히 평민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이처럼 평민에게 한 마디를 던지는 일조차 드물었다.
그만큼이나 루페시아 영애는 내심 통탄스러웠다.
솔직히 말해, 이안 같은 또라이에게 엠마처럼 착한 여자가 반할 까닭이 하등 없었던 것이다.
물론 1만 골드는 평민 기준으로 볼 때 어마어마한 금액이긴 했다.
하지만 자금의 크기가 곧 사랑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엠마와 같이 선량한 성정의 여인은, 피 냄새가 풀풀 풍기는 그 사내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신분의 벽도 컸다.
이대로 가면 남는 것은 상처뿐일 테지, 엠마도 루페시아 영애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쓴웃음을 지으며 한 마디를 남겼을 뿐이었다.
“……어떡하겠어.”
그 한 토막의 말이 엠마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저벅저벅 산책로를 걷고 있던 루페시아 영애는 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 푸른 눈동자에 흐릿한 연민이 스쳤지만, 그녀는 더는 그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사랑이란 본래 그런 것이었으니까.
엠마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감정이 바로 사랑이었다.
그러한 두 여인의 침묵을 깨부순 것은, 느닷없는 비명 소리였다.
“꺄아아아아악!”
“으아, 으아아아악!”
생각에 잠겨 있던 두 여인의 의식이 단숨에 현실로 부상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하나같이 당황한 눈빛이었다.
저 멀리에서 사람들이 도망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누가 보더라도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엠마와 루페시아 영애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엠마는 애초에 비전투 인원이었으며, 루페시아 영애는 부상이 완치되지 않아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무장도 없는 상태였다.
위험에 대응할 능력은 둘 다 전무했다.
다행스럽게도 도망치던 사람 중 하나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무, 뭐하는 거야! 당장 도망쳐! 귀, 귀향제의 행렬이 마수들한테 습격당했어… 그 일부가 지금 아카데미까지… 끄아아아악!”
그러나 그의 말은 채 끝맺어지지도 못했다.
집채만한 고양이 마수 하나가 그를 물어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벼락같은 쇄도에 사내는 저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적나라한 경고가 되었다.
눈을 부릅뜬 채 아무 말도 없이 서있던 엠마와 루페시아 영애는, 곧장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이곳은 신전 근처였다.
신전에는 사제들뿐만 아니라 성기사들도 상주하고 있었다. 일단 신전까지 갈 수만 있다면 안전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루페시아 영애였다.
그러지 않아도 한창 재활을 하며 근육을 늘려가던 그녀였다. 산책조차 비틀거리는 마당에, 갑작스레 달리려고 하니 균형이 맞을 리가 없었다.
여인의 몸이 땅바닥 위를 구를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마수들은 등 뒤에서만 오고 있지 않았다.
하늘에서도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중 몇몇은 심지어 자폭까지 해서, 엠마도 루페시아 영애의 곁에서 몇 번이나 땅을 굴러야 했다.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엠마는 절망에 빠진 루페시아 영애의 얼굴을 보고,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녀마저 떠난다면 루페시아 영애는 죽을 것이 뻔했다.
물론 엠마가 있다고 하더라도 큰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루페시아 영애가 발악처럼 외쳤다.
“빠, 빨리 도움을……!”
차라리 그러는 편이 더 생존 확률이 높으리라 판단한 듯했다. 하지만 루페시아 영애가 그러한 판단을 내렸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몇 마리의 고양이 마수들이 먹잇감을 발견하고 두 여인을 포위했다.
루페시아 영애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일어서려고 몇 번을 시도했지만, 결국 비틀거리며 다시 그 자리에 엎어졌다.
지나친 두려움으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탓이었다.
루페시아 영애는 엎어진 채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엠마는 입술을 짓씹으며, 사나운 눈빛으로 다가오는 마수들을 노려보았다.
어차피 늦었다면 구해야만 했다.
엠마는 고작해야 평민 계집애에 불과했다. 반면 루페시아 영애는 고위 귀족가의 금지옥엽이었고, 엠마의 희생은 평민의 귀감으로 기록될 터였다.
그러면 이안을 향하던 루페시아 영애의 억하심정도 누그러지겠지.
어차피 죽었던 목숨이었다. 살아날 가능성이 희박하다면, 조금 더 가치 있는 일에 내던지더라도 나쁘지 않았다.
이안을 위해서.
평민 계집애 하나의 죽음쯤이야, 그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잊어버리겠지.
굳은 결심을 한 엠마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는 도약하는 두 마리의 고양이 마수 앞에, 두 팔을 벌린 채 섰다.
그럼에도 두 눈이 질끈 감아지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죽기 직전까지도 이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조금 더, 보고 싶었는데…….
사랑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나날이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멍하니 한 사람만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
그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조금 더 일찍 깨달을 수 있었을 텐데.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적어도 후두둑, 하고 비린내 나는 액체가 떨어져 내릴 때까지는 그랬다.
엠마의 눈이 멍하니 뜨였다.
그 까닭은 알 수 없었지만, 어느새 덮쳐들던 고양이 마수 두 마리의 목이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연애 소설 속 주인공이라면, 지금만큼은 그 사내가 찾아왔으리라고.
그 떨리는 시선이 마수의 뒤편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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