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81화 (181/649)

〈 181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45)

* * *

시녀장이 한 걸음을 내딛자, 황녀는 비명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오지 마!”

그렇게 외치는 시엔의 손에 고차원적인 술식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1학년이더라도 마법학부 수석이었다. 당연히 전투능력은 출중했다.

하지만 시녀장은 아직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우뚝 멈춰 선 시녀장이, 흐릿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더듬거리며 흘러나오는 그 음성은, 차차 기묘하게 비틀려 나갔다.

“다, 다들 왜? 왜? 어, 어째서… 이, 이, 이, 으, 아… 으으으으으, 흐으으으으, 꺄아아아아아아아악!”

곧 시녀장은 경기를 일으키듯 제 손으로 목을 쥐었다.

부르르 떨리는 경련이 한동안 이어졌다. 우득, 으드득,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그녀의 팔과 다리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이처럼 괴기스러운 광경을 처음 마주한 황녀의 눈동자에 흐릿한 물기가 맺혔다. 그녀는 이제야 갓 성인이 된 차였다.

신변의 위기를 앞두고 침착함을 유지할 정신력까지는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삐걱거리며 꿈틀거리던 시녀장의 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안정세를 되찾았다.

기세가 일변했다.

방금 전까지는 나긋한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다면, 지금의 시녀장은 어딘지 모르게 음산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뒤로 젖혀졌던 시녀장의 고개가 다시금 정면을 향했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에 희미한 핏빛 광채가 머무르고 있었다. 과장되었다는 생각이 들 만큼 활짝 핀 웃음으로, 그녀는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녀 전하.”

폐부에서 끓어 넘치는 목소리였다.

그 희미한 광증이 느껴지는 음색에, 황녀는 말없이 몸을 떨었다.

시녀장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황녀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다르다.

언제나 자애롭던 시녀장의 음색이 아니었다.도리어 거칠고 울퉁불퉁하다는 느낌마저 주는 음성이었다.

눈앞의 인간은,시녀장의 몸을 빌려 말하고 있지만 시녀장이 아니었다.

시엔은 덜덜 떨리는 손을 차마 숨길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며 물었다.

“……누구야,당신.”

푸흐흐,하고 시녀장은 경박한 웃음을 터트렸다.그 눈동자에서는 희열마저 얼핏 스치고 있었다.

그녀의 고개가 풀썩 꺾였다.예를 갖추는 듯 보였지만,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과례(??)였다.

그 일련의 동작에서는 존중의 편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차라리 조롱에 가까운 인사였다.

“이것 참,용의 후예께서 이처럼 아리따운 옥음(?音)으로 여쭈어 주시다니…어찌 이 미천한 것이 대답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비록 진정한 신분을 숨기고 산 지 수십 년,암요! 하오나 오늘의 특별한 인연을 기념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황녀 전하.”

그렇게 비꼬기를 마친 시녀장의 몸이 정자세를 되찾았다.

그리고 한 걸음,시엔과 거리를 좁혔다.

그것만으로도 황녀가 두려움에 젖을 이유는 충분했다.그녀의 입에서 발작적인 비명이 토해졌다.

“오,오지 마!더 가까이 오면 대응…으,꺄아아아아아악!”

그러나 황녀의 최선을 다한 경고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벼락같이 뽑혀 나온 시녀장의 손에서 독침 두 개가 쏘아졌기 때문이었다.

파박,하고 양어깨를 독침에 관통당한 황녀는 새된 소리를 내지르며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그녀의 손에 맺혀 있던 마력의 파동이 흩어졌다. 그 모습을 본 시녀장은 조소를 담아 조언했다.

“전하,경고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해야 합니다…어느 자애로운 적이 덜덜 떨고만 있는 계집아이의 애원을 들어주겠습니까?”

여인의 느긋한 목소리를 들은 황녀의 눈빛이 일순 매서워졌다.

울컥,하는 감정이 그녀의 목젖을 치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사실, 이는 분노라기보다 발악에 가까웠다.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인간이 내지르는 마지막 자존심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시엔에게는 두 감정을 구분해낼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황녀의 노호성이 곧 토굴을 쩌렁쩌렁 울렸다.

“나,나는 한낱 계집아이가 아니야!나는 위대한 제국 황실의 다섯 번째…….”

“계집아이죠.”

아니,울릴 뻔했다.

그러나 마치 진리를 말한다는 듯 태연하기만 한 여인의 목소리에,황녀의 입이 단번에 다물어졌다.

“아니면,증명해 보시겠습니까? 간단하지 않습니까. 그 잘난 제국 황실의 힘으로 절 쓰러트리시면 됩니다.”

그러면서 시녀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태도,시엔은 이를 보며 멍하니 과거의 기억을 되짚었다.

생각해 보면,얼마 전에도 들은 적이 있는 경고였다.

이안 페르쿠스,그 얄밉고 두려운 사내에게.

“물론,그럴 수는 없겠죠…하하,농담이었습니다.어쩌다 보니 제 소개가 늦어지고 말았군요.”

그러나 여인은 황녀가 입술을 짓씹든 말든 딱히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마치 시엔이 무얼 어떻게 하든 이 함정에서 빠져나갈 수 없으리라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그럴 만도 했다.

이곳은 황족만이 알고 있는 비밀 통로였고,그녀를 지켜줄 인원은 방금 전 눈앞에서 전멸하고 말았다.

심지어 황녀 일행은 행선지를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니, 외통수나 다름없었다.

'시녀장'의 확신이 넘치는 태도는 허세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러한 자신감을 담아, 비로소 스스로를 소개했다.

“제 이름은,미트람.”

광대처럼 유쾌함을 가장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녀는 실제로 유쾌해 보이기도 했다. '미트람'이라 스스로를 소개한 이는 키득거리는 웃음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을 섬기는 종입니다.그러니까,조금 더 알기 쉽게 말하자면…….”

비틀,하고 황녀의 무릎이 푹 꺾였다.

독침의 독이 돌기 시작한 탓이었다.그녀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파르르 떨리는 연회색 눈동자가 킬킬거리고 있는 '시녀장'을 향했다.

“……암흑사제죠.”

그 비틀린 미소를 마주한 시엔의 눈빛이 멍청해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암흑사제',말로만 듣던 존재였다.

악신 오메로스와 그 지상대리인인 델피렘을 섬기는 수족들.

신마대전 이후 급속히 세력이 위축되어,이제는 잔당들만 남아있다고 들었는데.

설마 아직도 이만한 힘이 남아있었단 말인가?

쉽사리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제국 황실의 눈은 제국 곳곳에 뻗어있었다.아무리 비밀스러운 조직이라도 그 드넓은 시야를 벗어나기는 힘들었다.

특히나 수백에 이르는 마수를 동원할 저력이 있다면 더더욱.

하지만 지금 시엔의 눈앞에 닥친 현실은, 미트람의 말이 사실이라고 강변하고 있었다.

암흑교단이 아니고서야 수백의 마수를 동원할 수는 없었다.

황족의 최측근을 조장하고,기기괴괴한 마수들을 창조해낼 수도 없었다.

상식에 어긋나는 그 모든 이야기들이'암흑교단'이라는 조직을 배후로 두고 있다면 납득이 가능했다.

지금은 몰락했지만, 한때 이 세계를 멸망시킬 뻔했던 존재들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아직 잔류하는 의혹이 남아있었다. 황녀는 흐릿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은 채, 떨리는 음색으로 물었다.

“……무,무슨 짓을 한 거야?”

미트람의 시선이 물끄러미 황녀를 향했다.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그러나 그 의문이 해소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시녀장 말이야, 무슨 짓을한 거냐고……!”

아,하고 미트람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본인이 입은 육신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리고 음음,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새파란 광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아,제가 무척 아끼는 소재죠.예전에 첩보원으로 활약하던 시절 납치한 뒤 개조를 조금 거쳤습니다.사실은,그런 소재가 좀 더 있었는데…….”

미트람의 미간이 깊게 패인 것은 그때였다.

좀처럼 보이지 않던 불쾌하다는 반응이었다.무언가 제대로 풀리지 않았을 때 보이는 반응이었다.

“……하필 우리 제로스 경이 웬 미치광이 귀족한테 팔이 잘려버려서.”

그 말을 들은 시엔의 사고가 움푹 깊이를 더했다.

'제로스'라는 이름이 너무나 귀에 익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는 황녀의 호위기사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얼마 전 요양을 이유로 낙향하고 말았다.

이안 페르쿠스, 하필 그 사내에게 팔이 잘려버린 탓이었다.

우연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지금껏 내심 품고 있던 의심과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어우러지자, 황녀의 사고가 뒤죽박죽 얽히기 시작했다.

호위를 증강하라던 조언과 제로스 경의 낙향.

그 의심에 확신을 더해줄 만한 정보는 얼마 가지 않아 더 나타났다.

미트람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온 것은,황녀가 한창 고민의 잠겼을 때의 일이었다.

시녀장의 몸을 입은 그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뒤이어 의혹에 잠긴 목소리가 뱉어졌다.

“그러고 보니,왜 마수들이 반응을 하지 않은 걸까요?종일 붙어다니며 감시했는데 말이죠.저주를 풀 틈새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저주라니?“

처음 듣는 정보에 황녀의 반문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자 미트람은 곧 아차, 하는 얼굴이 되었다.

황녀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정보가 그동안 풀지 못했던 모든 수수께끼의 실마리가 될 수 있으리라고.

시엔의 목에서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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