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46)
* * *
시엔의 즉각적인 반문에 미트람이 잠시 멈칫했다.
상상 이상으로 반응이 적극적인 듯했다. 이에 미트람은 조금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것까지 말해줘야 하나,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미트람은 곧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래, 어차피 이미 끝난 판이었다.
앞으로 황녀가 당해야 할 고통을 생각해 보면 선물 하나쯤은 주어도 나쁘지 않았다. 고별인사 삼아 진실 정도는 알려줄 수 있었다.
“사실, 당신에게 마수들이 좋아하는 냄새를 묻혀놨거든요.교묘하지만 강력한 저주입니다…어차피 최종적인 목표는 당신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마수들이 당신을 덮치지 않더라, 이 말입니다.”
이어지는 말을 차곡차곡 수납하는 황녀의 사고회로가 고속으로 회전했다.
'저주'와 '마수', 수수께끼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단어들이었다.
그 새로운 단서들이 어떠한 해답을 향하고 있을지, 시엔은 더욱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동안 쭉 감시해도 저주를 해제할 기회는 없었는데 말이죠. 적어도,성수에 준하는 물건이 아니라면…오호라.”
그렇게 주저리주저리 말을 이어가던 미트람의 입에서 느닷없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흐음,흐음 하고 콧소리를 흘리던 그는, 다시금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안 페르쿠스.”
불현듯 황녀의 뇌리 속을 스치는 장면이 있었다.
사내가 느닷없이 그녀에게 물을 뿌렸다.
시엔은 얼이 빠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분개한 호위기사들이 달려들었고,제로스 경은 그날 팔이 잘렸다.
그제야 이해할 수 없었던 사건들이 조각조각 맞춰진다.
마치 정교하게 나누어진 퍼즐처럼.
물론 이를 눈치 챈 것은 황녀뿐만이 아니었다. 진작 이를 깨달은 티를 내던 미트람 또한 큭큭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 절묘하군요.이안 페르쿠스,이안 페르쿠스라…….”
미트람은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이내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당신을 처리한 다음에는 그 사내부터 파봐야겠군요.”
그러면서 미트람은 걸음을 내딛었다.
점차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지만,시엔은 차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다만 스스로 되물었다.
어째서?
그 추론대로라면 사내는 암흑교단이 황녀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소리가 된다. 설령 알지는 못했더라도, 적어도 의심은 하고 있었단 뜻이었다.
그러니까 아무도 눈치 챌 수 없는 방식으로 황녀의 저주를 해주한 것이다.
그 귀중한 성수가 수통에 담겨 있으리라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은 없었다.
하물며 그 이후 이어지는 충격적인 광경의 연속은,그 내용물의 정체를 잊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만약 그 액체가 성수라는 사실을 고백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으리라.
시녀장이든,제로스 경이든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황녀를 수행하곤 했다.저주가 해주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미트람은 또 다른 계략을 꾸몄을 터였다.
하지만 이안 페르쿠스는 단 한 번의 충돌로 저주를 해주하고, 미트람의 손에 조종당하는 제로스마저 배제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 대가로 스스로의 평판과,미래와,소중한 사람들을 희생했다.
시엔은 그 사실을 도무지 견뎌낼 수가 없었다.
마치 강박증 환자처럼 그녀는 스스로를 세뇌하듯 되뇌일 뿐이었다.
그래, 거짓말이다.
그딴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하다.
이안 페르쿠스는,인간이었다. 이는 결단코 달라지지 않을 사실이었다.
그리고 인간은 모두 이기적인 욕심쟁이었다.
황녀가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라면 그랬다. 그토록 타인을 위해 아무런 욕심도 없이 헌신할 수 있는 인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어린 시절부터 끝없이 증명해 온 신념이었다.
그런데 왜, 시엔의 뇌리는 이처럼 점차 달구어지고 있는가.
으,하는 신음과 함께 시엔이 제 머리를 움켜쥐었다.
사고가 파열한다. 폭죽의 도화선철 불꽃이 시엔의 기억을 갈아먹고 있었다.
노골적인 위험신호였다.
하지만 미트람은 그 몰골을 보면서도 다시금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황녀의 고통이 더없이 즐거운 눈치였다.
한동안 즐거운 기색으로 황녀를 지켜보고 있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자,그럼 슬슬 일을 시작해 볼까요.저항하지만 않는다면,아프지 않게 눈만…….”
그때였다.
푹,하고 날붙이가 미트람의 몸을 관통했다.
여인의 눈이 다급히 뒤를 향했다.그곳에는, 거친 경련을 일으키는 팔로 검을 억지로 찔러 넣은 아이린이 서 있었다.
미트람은 순간적으로 눈앞에 닥친 현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수림의 독충에게서 얻어낸 독이었다.
마력을 묶어둘 뿐만 아니라 마취 효과까지 있는 약이었다.아무리 익스퍼트라도 버티는 데는 한계가 존재했다.
그 증거로 아이린의 전신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이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그녀는 잔류하고 있는 모든 마력을 쏟아부은 것이다. 온힘을 소진한 아이린의 몸이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미트람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제 가슴을 관통한 칼을 천천히 뽑아냈다.
울컥, 하고 핏물이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이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드디어 지켜냈다.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그녀는 감동한 기색이었다. 너무나 오랜 시간 자책하고 힘들어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툭, 하고 미트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피 묻은 칼을 땅바닥으로 던졌다.
그 날카로운 충돌음을 들은 아이린의 시선이 멍하니 미트람을 향했다. 관통상을 입었어야 마땅한 그녀의 가슴에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살점이 들어차고 있었다.
치명상이어야 했다.
그러나 미트람은 아무런 타격도 없다는 듯 흘깃 아이린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종이에 손이 베이더라도 이보다는 격한 반응을 보일 터였다.
그 시선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노력은 가상했습니다, 아이린 경. 마음 같아서는 죽여 버리고 싶지만, 당신도 보기 드문 소재니까 살려드리도록 하지요.”
'소재'라니, 아이린도 저 시녀장처럼 정체불명의 암흑사제의 실험체가 된단 말인가.
여기사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지만 미트람은 더는 지체하지 않았다. 그녀는 서슴없이 걸어 황녀의 앞에 섰다.
이미 독의 효과로 황녀는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헐떡이는 눈빛으로, 깊고 깊은 고민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물론 미트람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미트람의 손이 우악스럽게 그 머리채를 붙잡았다.
그녀의 입가에 친절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육체의 본주인을 연기하듯이.
“지금부터 안구 적출을 시행할 겁니다. 조금 아플 수도 있으니, 얌전히 있으세요.”
'안구 적출', 그 노골적인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시엔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눈치 채지 못했는데, 어느새 미트람은 그녀의 지척까지 도달해 있었다. 더욱이 암흑사제의 손은 강제로 시엔의 눈꺼풀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그리고 점차 다가오는 손가락.
그 의도는 너무나 명백했다. 본능적인 공포가 황녀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녀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시, 싫어! 으, 아, 으… 꺄, 꺄아아아아아악!”
왈칵 눈물이 터져 나왔다.
후회스러웠다.
그 모든 결정이 그랬다.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조금 더 주변 사람들을 의심했다면 어땠을까. 온갖 가능성의 세계가 물밀듯이 황녀의 뇌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리고 또.
조금 더 이안 페르쿠스를 믿었다면 어땠을까.
전부 다 이미 늦은 이야기에 불과했다.
시간은 돌이킬 수 없었다. 황녀는 온힘을 다해 눈꺼풀을 감아보려고 했지만, 헛된 시도에 불과했다.
그렇게 미트람의 손가락이 황녀의 연회색 눈망울을 파고들려던 그 찰나.
은색의 벼락이, 하늘로부터 내리꽂혔다.
날카로운 궤적이었다. 마치 단두대의 칼날처럼 수직으로 내리그어진 날붙이는, 단숨에 미트람의 두 팔을 절단해냈다.
본체로부터 동떨어진 팔뚝 두 개가 애처롭게 땅바닥을 굴렀다.
뒤늦게 터져 나온 핏물이 흙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그 온기로 토굴에 난데없는 김이 피어올랐다.
아무리 개조된 몸뚱아리라도 절단된 신체 부위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꽤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그제야 자유를 되찾은 황녀가 헐떡이며 땅 위로 엎어졌고, 미트람은 부글거리며 팔뚝을 복원하기 시작하는 신체를 시큰둥하게 내려다보았다.
저벅거리는 걸음 소리가 적막한 토굴에 울려 퍼졌다.
황녀도, 미트람도, 심지어는 가까스로 정신줄을 붙잡고 있던 아이린조차도 등 뒤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는 한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도깨비불처럼 허공에서 타오르는 금빛 눈동자.
다소 서두른 탓인지 그 숨결은 거칠어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우선 안도한 기색으로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투였다.
그는 헐떡이며 제 허벅지를 짚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야."
미트람은 서서히 돌아섰다.
이제야 진정한 적수를 만났다는 듯, 그녀의 입가에는 흐릿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러든 말든 사내는 말을 맺었다.
“왜 벌써 끝내려 그래? 나랑은 아직 놀지도 않았잖아…서운하게.”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여인의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광증이 어린 눈빛으로, 미트람은 사내의 이름을 읊조렸다.
“……이안 페르쿠스.”
황녀의 시야를 뒤로 한 채로, 두 괴물이 서로를 마주했다.
귀향제의 끝을 알리는 전투의 시작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