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84화 (184/649)

〈 184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48)

* * *

미트람의 말은 잔인할 만치 명료했다.

“이제 곧 여동생의 상단에 온갖 긴급 채권 추심이 쏟아지겠죠! 페르쿠스 영지는 무사할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당신의 가족들, 그리고 절친한 친구들의 영지까지도 전부 다 피해를 입고 있을 텐데!”

그리면서 미트람은 팍팍, 하고 답답한 심정을 대변하듯 제 가슴을 두드렸다. 분노를 이기지 못한 그녀의 발길질이 몇 번 더 황녀를 강타했다.

황녀는 쿨럭이며 몸을 움츠릴 뿐이었다. 미트람의 말이 길어질 때마다 그 연회색 눈동자에는 절망이 차올랐다.

“……그런데도 구하시겠습니까? 마지막 기회를 드리죠. 지금 당장 눈 감고, 되돌아가세요. 그럼 없던 일로 해드리겠습니다.”

황녀의 눈가에서 물방울이 두어 방울 더 떨어져 내렸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내가 그녀를 구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토록 희생했음에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황녀를 구해봐야 이미 늦었을지도 몰랐다. 미트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내린 듯했으니까.

그동안 황녀에게 당한 것도 많았다.

마주치는 모든 인간들이 적의를 표출하지 않았나.

심지어 그 악의는 내게만 향하지 않았다. 나의 소중한 사람들 또한 아프고 다칠 뻔했고, 이를 막아내기 위해 내 손에는 몇 줌의 핏물이 더 부어져야 했다.

되짚어 보니, 황녀와 내가 주고받은 것은 원한밖에 없었다.

내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검 손잡이를 쥐고 있던 내 팔에 힘이 빠져나갔다.

내 기색을 유심히 살피고 있던 여기사의 눈이 암담해졌다. 황녀는 아예 기대조차 하지 않는지 눈물만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네.”

고작해야 한 마디에 불과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미트람은 그 한 마디만을 기다렸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한숨과 함께 검 손잡이를 쥐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서서히 두 손을 들기 시작했다. 마치 저항의 의사가 없다는 것처럼.

가까스로 고개를 들고 있던 여기사의 고개가 푹 꺾였다.

황녀는 흐릿한 숨결을 내뱉고 있었고, 미트람의 징그러운 미소를 더더욱 짙어졌다.

여인은 유혹하듯 입을 열었다.

“당신이라면 이해할 줄 알았습니다. 자, 이제 그만…….”

그리고 그 다음 순간.

팍, 하고 미트람의 팔 하나가 또 다시 절단되었다.

미트람은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여인의 눈동자가 멍하니 제 어깻죽지를 훑었다.

은빛의 궤적이, 그 자리를 통과하고 있었다.

울컥, 하고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지반에 틀어박혀 있던 손도끼가 되돌아오며 미트람의 팔 하나를 절단한 것이다.

그 갑작스러운 일격에 미트람의 잇새로 토막난 의문이 새어나왔다.

“……무, 슨?”

그 틈새를 놓칠 만큼 나는 어리숙하지 못했다.

손도끼를 낚아챈 내 몸이, 단숨에 땅을 박차고 쏘아졌다.

파공성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손도끼는 미트람에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고속의 쇄도였다. 미트람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눈치였다.

그러나 그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여인은 곧바로 몸을 억지로나마 비틀어 냈다. 인체 구조상 불가능한 각도로 팔이 회전하며 제 품을 더듬었다.

뽑혀 나온 단검과 도끼가 마주쳤다.

쾅, 하는 충격파와 함께 흙먼지가 주위로 일었다. 미트람은 주춤주춤 물러나며 연거푸 퍼부어지는 손도끼의 일격을 막아내는 데 급급했다.

그러나 내 무장은 손도끼만이 아니었다.

남은 한 손이 허리춤을 더듬는 순간, 또 하나의 빛살이 솟구쳤다.

그러지 않아도 겨우겨우 내게 대응해 오던 미트람이었다. 팔 하나를 잃은 채 또 하나의 검로를 감당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핏물과 함께, 미트람의 남은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미트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날려 땅바닥을 굴렀다.

그제야 미트람과 황녀, 그리고 여기사의 사이에 거리가 생겨났다.

미트람의 팔 하나가 부글거리며 끓어올랐다. 회복하는 속도가 무시무시했다.

그 기포덩어리처럼 형체를 갖추고 있는 그 손에는, 이미 마력의 끈이 들려 있었다.

이제는 기습의 이점을 살릴 수 없다는 뜻이었다.

괜찮았다. 어차피 내 목적은 미트람과 황녀, 그리고 여기사를 떨어트려 놓은 것이었으니까.

나는 슬그머니 손도끼를 다시 허리춤에 매달았다.

미트람은 그러는 나를 보며 발악처럼 울부짖었다.

“미쳤습니까, 이안 페르쿠스?! 그딴 취급을 받고도 저 꼬맹이를 구하겠다고?!”

그 말에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머금었다.

굳이 황녀가 아니라도 구했겠지만, 미트람은 결정적인 착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푸대접을 받았다고 해서, 당신이 개새끼가 아닌 건 아니잖아.”

내 머릿속에는 아직도 고아원에서 보았던 광경이 각인되어 있었다.

살점 씨앗 속에서, 제발 죽여 달라고 울부짖던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아직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생명에 대한 존중의 조금도 보이지 않는 인간이었다. 생명체를 마수로 개조해서 폭탄으로 쓰질 않나, 지금 보이는 비정상적인 회복력 또한 그처럼 개조를 거친 결과겠지.

그러한 인물이, 황녀의 눈을 가지고 무언가를 저지르려고 한다.

최소한 세상에 도움이 될 일은 아닐 것이 뻔했다. 그까짓 사탕발림에 넘어갈 만큼 내가 걸어온 길은 호락호락하지 못했다.

나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지만, 미트람의 표정은 더욱 험악해졌다.

잠시 이를 으득으득 갈고 있던 그녀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아무래도 벌이 필요하겠군요.”

“마침 위에서 네 부하들한테 벌 많이 받고 왔거든… 그러니까, 이제는 네가 좀 맞자.”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다시 한 번 땅을 박찼고, 미트람의 몸이 빙글 회전하자 마력의 끈들이 일어섰다.

꿈틀거리며 나를 후려치듯 새파란 실들이 요동쳤다. 난생 처음 보는 기술이라 나는 잠시 고민했다.

답은 결국 하나였다.

어떻게든 빈틈을 만들어내면 그만이었다.

판단을 내린 직후, 내 팔이 곧바로 손도끼를 내던졌다.

대기를 찢어발기며 날아가는 손도끼의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미트람은 곧장 몸을 기울여 손도끼를 피해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또 한 번 궤적을 틀며 틀어박히려는 도끼날.

미트람은 욕지거리라도 내뱉을 것 같은 표정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 그무리한 동작에 나를 덮쳐들던 마력의 끈에 가해지던 힘이 약해졌다.

그것이 기회였다.

나는 덩굴을 쳐내듯 검으로 마력의 끈을 절단했다.

미트람과 내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내가 그의 코앞까지 따라붙자, 여인의 팔이 기괴한 각도로 꺾였다.

번뜩이는 날붙이가 시야에 잡혔다.

독침이었다.

네리스 선배와의 일전 이후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독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무척 실전적인 교훈이었다.

심지어 전력을 다해 맞서는 상대였다. 상대의 경지를 오판할 확률은 지극히 낮었고, 그럼에도 적극적인 활용을 보이는 독이라면 더더욱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스치기라도 하면 좆된다.

그러한 판단을 내린 내 무릎이 곧바로 꺾였다. 미끄러지듯 내 검이 미트람의 허벅지를 베고 지나갔다.

근섬유가 끊긴 여인의 무릎이 풀썩 꿇렸다.

주르륵 흙 알갱이 위를 흐르며, 나와 미트람의 얼굴이 마주쳤다. 나는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안녕.”

즉시 콰득,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주먹이 미트람의 안면을 측면에서 강타했다.

온전한 자세에서 나온 일격이 아닌 탓에 힘이 조금 부족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가녀린 여인의 몸이 철푸덕 쓰러지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그 위로 올라타려다가, 움찔거리는 손끝에 쥐어진 독침을 보고 생각을 수정했다.

자칫하다 스치기라도 하면 내 손해였다.

주먹질을 위해 잠시 비워두었던 검 손잡이위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느닷없이 쏘아지는 새하얀 손길이 보였다. 나는이에 대한 보답으로 칼날을 돌려주었다.

핏물이 터져 나오며, 미트람의 입에서 안타까움을 가득 담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후우.”

아프다기보단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짜증난다는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미트람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혹은 무척 둔감하던가.

나는 그 정보를 머릿속에 새기며, 튕겨오르듯 몸을 일으켜 지반에 꽂혀 있던 손도끼를 쥐었다.

그와 동시에 미트람 또한 푹, 하고 제 두 다리를 지반에 박아 넣더니 아무런 반탄력도 없이 몸을 일으켰다.

마치 물 먹은 솜이 부풀며 꼿꼿해지듯이.

여인은 마력의 끈을 치렁치렁 늘어뜨리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끝이 났군요.”

그 말을 듣자마자 내 눈이 순간적으로 주위를 훑었다.

주변에는 쓰러진 기사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뿐이었고, 그 외에 거슬리는 부분은 마력의 끈이 묘하게 내 쪽으로 퍼져 있다는 점뿐이었다.

허세인가, 그처럼 안일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미트람을 바라보려던 나는 곧 생각을 정정해야 했다.

여인의 희열에 잠긴 시선을 따라, 그 도화선이 되는 마력의 끈을 따라가다 보니 한 사내의 몸뚱아리가 보였다.

울퉁불퉁 부풀어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위치는 바로 내 옆이었다.

“이런 씹…….”

욕지거리를 내뱉기도 전에. 세상이 새하얗게 반전됐다.

번쩍이며 시야가 물들었다.

뒤이어 청각이 차단되고, 촉각마저 두루뭉술했다. 이미 부상이 누적된 몸이 한계를 호소했다.

그럼에도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때 파박, 하고 내 양 어깨를 관통하는 독침만 없었다면 나는 일어났을 터였다.

미트람은 웃었다. 그제야 승리를 확신한다는 듯이.

질 수는 없어서, 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마주 웃어 보였다.

속으로 생각했다.

미친년, 당연히 믿고 있는 구석 하나는 남겨놨었지.

내 눈이 흘깃 물약 주머니를 향했다. 반쯤 비어있는 그 물약 주머니는, 이미 내 몸에 돌고 있는 약효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도 죽을 것만 같았다. 폭발에 두 번, 팔에도 한 번, 상처가 너무 깊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또 한 번의 치명타를 허용한 상황이었다.

절로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토록 흐릿한 정신 사이로, 기억이 잠시나마 새하얀 파도 속에 잠긴다.

그래, 이 꿈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꿈이다.

세계가 일변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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