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49)
* * *
타닥거리는 모닥불 소리가 의식을 일깨웠다.
멍하다. 몽롱한 정신이 멋대로 사고를 침전시켰다.
나는 뿌연 시야를 정리하기 위해 몇 번 눈을 비비적거렸다. 그제야 주위의 풍경이 보다 선명히 부상하기 시작했다.
고풍스러운 천막 안이었다.
그래봐야 임시 숙소에 불과했지만, 제국 황실의 위엄을 상징하듯 순백의 천막 안으로는 한 줌의 바람조차 새어들지 못했다. 따스하고 아늑한 곳이었다.
메마른 사막은 낮과 밤의 차이가 극심하다.
태양 아래 달구어진 모래는 해질녘까지 아지랑이를 피워 올린다. 하지만 해가 지고, 시린 달빛이 내려앉기 시작하면 사막은 견디기 힘든 한기를 품곤 했다.
따라서 천막 안에서 불이 타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이 늦은 오후나 새벽 사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었다.
무더위 속에서는 열원을 더 만들어야 할 필요가 하등 없기 때문이었다.
쪼르륵, 하고 따라지는 술 한 잔에서 은은한 김이 피어올랐다.
서부의 전통주였다.
차가운 밤이 찾아오면 뜨끈하도록 데워 내오는 발효주라고 들었다. 서부에서는 그날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했다.
나는 말없이 술 한 잔을 받아 쭉 들이켰다.
노고라, 지금 이 진지에 머무르고 있는 수많은 이들이 마찬가지로 고생하고 있었다. 몰려드는 마수를 쓰러트린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물며 저 지평선을 가득 채운 뱀의 숨소리를 듣는 것은 어떤가.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저 괴물이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 꿈틀거리기 시작하면, 인류가 자랑하던 군세는 곧장 한 줌의 핏물이 되리라.
그 실체화된 위협이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암울한 미래를 떠올린 사내의 눈이 슬프게 가라앉았다.
그 건너편에 앉은 여인은 눈을 감고 있어 시선을 읽을 수 없었지만, 그녀 또한 씁쓸해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여인은 손가락을 퉁기자 술잔 하나가 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금 쪼르륵, 하고 그 잔에 담기는 술이 한 잔.
침묵을 깨트린 쪽은 그녀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래보다는 과거를 떠올리게 되네요.”
“아직 서른도 되지 않으셨잖습니까.”
단 둘이 대작을 시작하자 사내의 태도는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낮에는 잘 벼려진 칼날처럼 예법에 충실하던 그였다. 그러나 지금은 농을 던질 수 있을 만큼은 친밀해 보였다.
여인은 쿡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옛말에 봄은 찾아온 줄도 모르고 지나간다 하던가요?”
“봄에도 겨울을 생각하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옅은 술 냄새가 풍기는 목소리로, 사내는 그렇게 읊조렸다.
여인은 술을 홀짝이며 슬쩍 눈웃음을 지었다.
어디 한 번 말해보라는 듯한 태도였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점점 더 지금을 즐기지 못하고 미래를 떠올리며 전전긍긍하게 되더군요.”
“그러다 봄이 지나가고?”
“……이제는 겨울밖에 남지 않았네요.”
탁자 위로 떨어진 빈 잔에 다시금 술이 차올랐다.
눈조차 뜨지 않은 여인이 사물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기묘한 광경이었으나, 사내는 그다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이미 수없이 봐온 광경인 듯했다.
잠시 아무런 말도 없이 술잔을 쓰다듬던 여인은, 어렴풋한 음색으로 사내에게 물었다.
“그럼 경의 봄은 언제였나요? 대수림에서 대마녀의 제자로 지냈을 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땐 여름이었죠.”
그러면서 사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손이 술잔을 받쳤다.
두 술잔이 허공에서 마주치며 쨍, 하는 소리를 울렸다. 단숨에 또 한 잔을 식도에 퍼부은 사내는 흐릿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이제 막 싹을 틔우기엔 나이가 너무 많았잖습니까? 스승님이랑 사매는 여전히 풋내기 취급했지만.”
“많이 들었어요… 두 분에 대한 이야기.”
“제겐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었죠.”
탁, 하고 술잔이 탁자를 두드렸다. 자연스레 가라앉은 사내의 표정을 보고, 여인은 이어질 말은 짐작했는지 고개를 돌렸다.
괴로움에 잠긴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죽었고.”
그 말을 끝으로 사내의 목소리가 툭 끊겼다.
이해한다는 듯, 여인은 또 한 잔의 술을 권했다. 그렇게 몇 차례 술잔이 오고간 뒤에야 그녀는 조심스레 물었다.
“사랑했나요?”
‘가족’이라는 의미는 아닐 터였다.
이미 몇 년 전의 과거라, 사내는 조금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흐릿한 안개 속을 헤매던 그의 금빛 눈동자는, 이내 헛웃음과 함께 눈꺼풀 뒤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한 번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그 후로도 또 정적 속에서 몇 잔의 술잔이 비워지고, 어느덧 홍조를 띤 여인의 얼굴이 불쑥 사내의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유심히 사내를 바라보는 듯했다.
그래봐야 눈도 뜨지 못해 제대로 보이지 않을 텐데도,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사내의 얼굴 앞을 기웃거리다 제자리에 앉았다.
“왜 몰랐을까?”
툭, 하고 내던져진 의문에 사내는 무슨 뜻이냐는 눈빛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여인은 피식, 하고 웃으면서 술잔의 술을 홀짝였다.
“아카데미 시절 말이에요. 그때는 왜 당신 같은 사람이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을까요?”
“그때가 제 인생의 봄이었거든요.”
즉답이었다.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온 화두에, 여인은 또 다시 물끄러미 제 얼굴을 사내에게로 향했다.
“씨앗일 때는, 무슨 짓을 해도 씨앗이잖습니까. 더 자라나 봐야 남들보다 조금 커다란 떡잎을 가진 새싹일 뿐.”
“살짝 건방진 말이네요.”
“……그렇습니까?”
사내는 멋쩍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더니, 술 한 잔을 들이켰다. 그러나 여인은 이내 농담이었다는 듯 옅은 웃음을 터트릴 따름이었다.
“하지만 용서할게요, 당신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말끝을 흐리던 여인의 얼굴이 애수에 잠길 때까진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만약 당신이 조금 더 일찍 싹을 틔웠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까요?”
“고작 한 사람의 힘으로 말입니까?”
오고가는 말이 공허했다. 어차피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이라는 사실쯤은, 이미 질리도록 깨달은 바 있는 둘이었기 때문에 그랬다.
그만큼이나 후회할 일이 많았던 탓이었다.
여인은 후후, 하고 처량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명령입니까?”
담백한 반문에 여인이 서운하다는 듯 새초롬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내 그녀의 입술 사이로 부루퉁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우리 사이에 명령이라니… 부탁이라고 하죠.”
사내는 대답 대신 입을 다문 채 여인을 응시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인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그녀가 속삭였다.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아무것도 모르던 절 한 대만 때려주세요.”
피식, 하고 사내의 입에서 텅 빈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만큼이나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사내가 무어라 반박이라도 하려던 찰나, 어느덧 그의 코끝에는 달콤한 향이 스치고 있었다.
술 냄새만은 아니었다.
여체의 살갗만이 품을 수 있는, 그 은근한 향기가 덮쳐오자 사내의 눈동자가 멍해졌다.
그와 코를 맞대기라도 할 듯 다가온 여인의 얼굴이 눈에 비쳤다.
흠 잡을 데 없는 미모였다. 지금만 하더라도 숨이 막힐 듯 아름다운데, 그 눈동자마저 간직하고 있었다면 필시 수많은 사내들을 울렸으리라.
여인은 애절한 어조로 간청했다.
“그리고 저를 구해주세요.”
사내는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술기운에, 아니면 여인의 미모에, 그도 아니라면 그 달콤한 향에 취한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홀린 듯이 그는 말했다.
“……네, 그러겠습니다.”
세계가 다시금 허물어진다.
무너지는 경계의 틈새로, 뇌를 쪼아대는 듯한 두통이 찾아왔다.
이만 되돌아갈 시간이었다.
**
미트람은 후우,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상정하지 못했던 변수의 연속이었다.
우선 황녀에게 걸어두었던 저주가 해주된 것도 모자라, 목표를 달성하기 직전에는 방해까지 받고 말았다.
그 모든 것이 한 사내의 공적이었다.
‘이안 페르쿠스’, 고작해야 시골 자작가의 차남에 불과한 인간.
그래서 미트람은 사내가 더욱이 마음에 들었다.
사사건건 그의 계획에 훼방을 놓는 것은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이는 이안이 유능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고위 귀족과 달리 권위적이지도 않았다.
약자를 위한 희생정신과 더불어 불굴의 의지력도 겸비한 인재였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암흑교단에 영입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그토록 강인했던 그는, 지금 폭발에 직격당해 무릎을 꿇은 채였다.
들려오는 숨소리로 보아 아직 목숨은 부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야말로 경이로운 생명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트람은 딱히 이안을 경계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애초에 이안은 이 장소에 들어설 때부터 곳곳에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나름 태연한 척을 하긴 했지만, 온갖 생물을 개조해 본 미트람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처럼 가까스로 버티고 선 이를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아주자그마한 충격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실험체 하나를 희생한 폭발은 과분하기 그지없는 대우였다. 미트람은 최소한의 성의는 다했다고 생각하며, 그대로 몸을 돌리려 했다.
그래, 비틀거리며 사내가 몸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미트람의 눈에 일순 짙은 의혹이 차올랐다.
단순히 폭발에 당하기만 했으면 몰라, 마비독을 바른 독침까지 어깨에 꽂아 넣었다. 꼴사납게 꿈틀거리는 호위기사들처럼 신음만 흘리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일어났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로서 미트람의 눈앞에 제시되어 있었다.
미트람은 허, 하고 헛웃음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본신이 아닌 실험체에 빙의하다 보니, 실수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여인은곧바로 품속에서 독침을 꺼내 내던졌다.
파바박, 하고 세 곳에 내리꽂힌 독침은 신체의 요소를 점했다. 굳이 독이 아니더라도 침이 꽂힌 순간 움직임이 멎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도 사내는 잠시 비틀거릴 뿐,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그럴수록 미트람의 미간이 점점 더 좁혀졌다.
이럴 리가 없었다. 서서히다가오는 현실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 그녀의 손이 다시 한 번 품속을 더듬었다.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독침이 다시금 파공성을 일으켰다.
사내의 양 무릎을 관통한 독침은 꽤 굵어 보였다. 통상적인 인간이라면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어야 정상이었다.
그럼에도 또 한 걸음.
미트람은 그제야 제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한기를 느꼈다.
무언가 이상했다. 이는 본능이 전하는 경고였다.
미트람이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던 그때, 저 너머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도, 망쳐…….”
울컥이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내뱉은 소리였다.
제국의 제5황녀, 시엔이었다.
그녀는 손가락조차 제대로 까딱이지 못했지만 최선을 다해 조언을 건넸다. 이제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황녀의 연회색 동공이 파르르 떨리는 시선을 이안에게로 보냈다.
그는 아직도 천천히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도, 도망쳐요, 이안 경… 아, 아직 폭탄이 남아있…….”
“……푸흡.”
미트람은 황녀의 경고를 듣자마자 조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꼴에 용의 후예는 후예란 말인가?
아직도 호위기사 속에 생체폭탄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가까스로 시간에 맞춰 개조해내긴 했지만, 그 수는 소수에 불과했다.
아무리 미트람이라 하더라도 멀쩡한 인간을 멋대로 터트릴 수는 없었다.
그에 준하는 과정이 필요했고, 그러한 준비가 끝마쳐진 소체는 얼마 존재하지 않았다. 워낙 비밀스러운 작업이라 들킬 가능성은 낮았으나, 지금은 전시였다.
이미 마력의 끈은 비밀리에 이어진 뒤였다.
언제라도 미트람이 툭 건들면 폭발을 일으키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황녀는 그 마력의 미세한 연결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래,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아직도 그의 손에는 쓸 수 있는 패가 잔뜩 남아있었다.
자신감을 되찾은 미트람이 우쭐거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다는군요, 이안 페르쿠스. 지금이라도 저 여자의 눈물겨운 조언을 듣는 편이 어떻겠습니까? 아, 물론 저 자애로운 황녀의 명령에 의해 당신의 여동생은 험한 꼴을 당하고 있겠지만…….”
“미트람.”
그 한 마디에는 고저가 없었다.
그래서 미트람도, 황녀도, 심지어는 엎어진 채 숨을 헐떡이던 아이린조차 사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사내는 미트람의 몇 걸음 앞에서 우뚝 멈춰 선 채였다. 그의 입에서 흐, 하고 되다 만 웃음이 흘러나왔다.
“……혹시 폭발 좋아하나?”
무슨 소리냐고, 미트람이 되물으려던 찰나.
여인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불가해한 마력의 유동이 느껴졌다.
누구보다 이를 먼저 눈치 챈 미트람이었으나, 그는도무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대수림의 독충으로부터 얻어낸 독액은 혈도를 제압해 마력마저 굳혀 버린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둘째치고, 마력을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지금 이 맹렬히 타오르는 불꽃의 마력은 무어란 말인가.
체내의 마력이 없다면, 체외의 마력도 응집시킬 수 없다. 이는 상식이었다. 그 예외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단 하나 예외가 존재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불신을 가득 담은 미트람의 눈동자가 서서히 마력의 응집점을 향했다.
시엔과 아이린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두 여인의 눈동자가 부릅떠질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화르륵 타오르며 허공에 상처자국이 새겨지고 있었다.
마치 핏물이 흘러내리는 듯했다. 그 자국이 그리고 있는 것은, 인류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문자.
비록 그 뜻을 해독할 수는 없어도, 정체만큼은 짐작할 수 있었다.
미트람의 입에서 한 마디가 멍하니 흘러나왔다.
“용,혈 문자……?”
그 짧은 읊조림을 들은 순간, 이안은 옅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사실, 나도 좋아하거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미트람의 손이 제 품을 다급히 더듬거렸다. 하지만이미 늦은 뒤였다.
타오르는 불꽃의 심지가 곧 세상을 백열시킬 불길을 토해냈다.
쾅, 하는 폭음과 함께 시야가 빛과 열의 폭풍으로 물들었다.
그 충격파에 튕겨 나가면서도, 시엔과 아이린은 떨리는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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