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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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혈 문자의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주변에 널브러진 기사들과 황녀를 고려해 화력을 일부러 낮추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단숨에 터져 나온 불길은 곧 대기와 지반을 동시에 달구었다.
미트람의 몸뚱아리가 나동그라진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여인은 비명조차 토해내지 못했다. 단지 본능의 명령대로 폐부에서 쥐어짜낸, ‘컥’하고 토막난 숨소리와 함께 땅바닥 위를 뒹굴었을 뿐.
불꽃이 미트람의 몸을 휘감았다. 이글거리는 불꽃이 아지랑이를 만들고 있었다.
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토굴이 잠시 진동했다.
강렬한 폭발의 여파에 토굴이 위험 신호를 보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워낙 견고한 공사를 거친 덕인지 아직까지는 괜찮아 보였다.
미트람이 불구덩이에서 몸부림치는 사이, 이안은 몽롱한 정신으로 비틀비틀 걸었다.
팔부터 가슴 부근까지 찢겨나간 기사의 시체가 보였다. 미트람이 폭발시킨 생체 폭탄의 범위 내에 있던 이였다.
품위 있는 가문의 촉망받는 기사였을 텐데, 그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토굴에서 이처럼 죽음을 맞이하게 되다니.
허무한 인생이었다.
그러나 죽은 자가 남긴 유산은, 누군가에게 삶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안은 더듬거리며 기사의 허리춤을 뒤적였다. 그곳에 매달린 주머니에서, 그는 연녹빛 물약을 찾아내 꿀꺽꿀꺽 들이켰다.
까닭은 알 수 없었지만 그 물약이 ‘해독제’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토굴에 들어서기 전부터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뒤였다.
엠마가 준 물약이란 물약은 전부 다 식도에 퍼부은 뒤에야, 이안은 비로소 토굴 안으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얼마나 많은 물약을 들이켰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우선 엠마가 준비해준 보급형 해독제나 기척을 숨기는 물약, 그리고 자연치유력을 증강시키는 약과 고통을 둔감하게 만들어주는 각성제까지는 생각이 났다.
그 외에도 두어 개의 물약병을 더 털어넣었던 것 같은데, 만약 이를 엠마가 보았다면 기겁을 했을지도 몰랐다.
연금술에서 물약이란 각 원소에 해당하는 마력의 호응에 중점을 둔다.
그에 따라 동일한 효과의 물약이더라도 각각 다른 재료를 써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동시에 복용했을 때 문제가 발생할 위험이 있었던 탓이었다.
이는 굳이 연금학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당연히 이안도 이를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묘한 불안감이 그를 충동질했고, 결국 사내는 도박에서 승리했다.
미트람의 독에 당하고서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 덕분이었으니까.
물론 그에 따르는 마땅한 대가 또한 치러야 했지만 말이다.
“크, 커억……!”
해독제를 들이키던 이안은, 이내 울컥 차오르는 핏물을 토해내야 했다.
누적된 부상에 이어 과도한 약효가 돌자 몸이 거부 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그의 내장은 지금쯤 약기운으로 뭉근히 녹아내리고 있을 터였다.
참으로 끔찍한 전망이었지만 이안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는 미트람을 쓰러트리는 쪽이 더 중요했다. 그는 암흑사제였고, 고아원의 고아들을 재료로 삼아 제 목표를 이루려는 파렴치한이었으며, 인류의 멸망을 앞당길 존재였으니까.
핏물을 한 웅큼 토해낸 이안의 손이 텅 빈 약병을 내던졌다. 데구르르 땅 위를 구르는 유리병이 내는 소리가 처량했다.
그제야 시야가 맑아지며 체내의 마력이 혈도를 질주했다.
몸에 활력이 되돌아오고, 거칠어져 있던 호흡도 안정된다. 이안은 몇 번 더 뒷걸음질을 치고 난 뒤에야 온전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가 손바닥으로 제 눈동자를 꾸욱, 하고 눌러댔다.
망막의 미세혈관들이 타버릴 듯 고통스러웠던 탓이었다. 용혈 문자를 단 한 번 사용했음에도 그랬다.
아무래도 용혈 문자 또한 사용하다 보면 한계가 찾아오는 모양이었다.
후우, 하고 숨을 내쉬던 사내의 황금빛 눈동자가 흘깃 뒤편을 향했다.
그곳에는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눈을 부릅뜬 채 그를 바라보고 있는 두 여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암청빛 머리카락을 가진 고귀한 외모의 황녀, 시엔.
그리고 푸른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미모의 여기사 아이린이었다.
두 사람의 벌려진 입에서는 정제된 언어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단지 망가진 것처럼 흐릿한 음성만이 흘러나오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 으, 아…….”
그것만으로도 두 여인이 받았을 충격이 능히 짐작이 갔다.
이안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고는, 서슴없이 걸어 아이린에게로 다가섰다. 그녀는 어안이 벙벙한 기색이었다.
마취액이 돌아 감각이 둔해진 혓바닥으로, 그녀는 어떻게든 말을 만들어냈다.
“어, 어, 으… 어, 어떻게… 아, 아니지. 루페미온의 아이린이… 화, 황제 폐하의 대, 대리인을…….”
그러든 말든 이안은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
단지 그는 무심한 눈길로 아이린을 훑을 뿐이었다.
그의 손이 거칠게 아이린의 몸을 더듬거리자, 단 한 번도 외간남자에게 제 몸을 허락한 적이 없던 숫처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물론 아이린이 걱정할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사내는 아이린의 품속에서 해독제를 찾아냈다. 제국의 근위기사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고성능의 물약이었다.
이안은 곧장 아이린의 머리를 젖힌 채, 벌컥벌컥 물약을 강제로 식도로 쏟아 부었다. 웁, 웁, 하는 소리를 내며 저항하던 아이린은 곧 이안의 뜻을 알아채고 얌전히 물약을 삼켰다.
다만 아직 아이린의 시선에는 옅은 의문이 배어 있었다.
이 사내는 어째서 이토록 서두른단 말인가?
이안이 사용한 용혈 문자는 그 명성을 증명하듯 강력한 화력을 선보였다. 지금까지도 활활 타오르고 있는 미트람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이따끔씩 꿈틀거리며 온몸을 비틀고 있긴 했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전신의 세포가 불타는데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체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조종당했을 뿐인 시녀장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으나, 차라리 이러는 편이 시녀장에게는 더 행복한 결말일지도 몰랐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 온갖 개조를 당해 소중한 이들을 습격하는 삶은 죽음만도 못했으니까.
그러나 사내는 아이린의 의문을 해소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다음을 기약했을 따름이었다.
“오늘 일은… 후, 아니다. 일단 다음에 이야기합시다.”
흠칫, 하고 점차 풀려가던 아이린의 긴장이 되돌아왔다.
그녀의 눈동자에 다시금 공포가 어리기 시작했다.
지금껏 그의 앞에서 보인 추태가 너무나도 많았다.
우선 주군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적만 두 번이었다. 한 번은 이안에게 손조차 쓰지 못하고 당해 버렸고, 또 한 번은 너무 긴장한 탓에 주군의 어깨에 도끼가 박힐 뻔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안이 그토록 암묵적인 경고를 남겼는데도 아이린은 시엔을 지켜내지 못했다.
명명백백한 실패였다.
용혈 문자의 소유자는 황제의 대리인으로, 5대 귀족 가문의 가주라 하더라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하물며 루페미온 가문의 일개 여식에 불과한 아이린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아이린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린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동안 품고 있었던 이안에 대한 두려움과, 임무를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했다는 낯부끄러움, 그리고 자책과 자조가 그녀를 감정의 불구덩이에 파묻고 있었다.
그러한 아이린의 속마음도 모른 채로, 이안은 지친 표정으로 시엔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이안을 바라보고 있던 시엔은 그제야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던 제 몰골이 너무나 추레해 보였다. 그녀는 제대로 독이 돌아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손으로, 허우적거리듯 제 얼굴을 가렸다.
실은, 무엇보다도 두려웠다.
누구보다도 헌신적으로 자신을 구하려 했던 인간의 감정을 읽는 것이.
미트람이 수도 없이 지적했듯이 시엔은 이기적으로 굴었다.
제 자존심을 우선했고, 이안이 수상한 행동을 보이더라도 단순히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했을 뿐이었다. 그가 아무리 당당히 굴었더라도 시엔은 알았다.
마주치는 모든 인간이 적의와 혐오를 드러낼 때 얼마나 비참한지를.
어린 시절에 시엔은 이미 그것이 얼마나 지독한 일인지 겪지 않았던가. 심지어 시엔은 이안뿐만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까지 괴롭혔다.
그럼에도 사내는 시엔을 구하러 달려왔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보다 편한 길은 얼마든지 존재했다.
당장 용혈 문자만 하더라도 그랬다. 그가 용혈 문자를 보여주었더라면, 황녀는 감히 이안을 건들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터다.
이안이 그러지 않은 까닭은, 오직 하나.
시엔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그 외의 이유는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미트람이 보다 교묘하고 위협적인 계책을 짜낼 수 없도록, 이안은 마지막 순간까지 인내했던 것이다.
황녀의 연회색 눈동자에서 다시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미, 미, 미안해요… 미안해요, 이안 경…….”
진심을 담은 사죄였다.
시엔은 돌이킬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돌이키고 싶었다.
그만큼이나 두려웠으니까.
모든 것을 희생하고 구하려 했던 인간인데, 감사는커녕 도리어 증오를 돌려주었다.
그 실망과 분노가 어떨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시엔은 눈을 가렸다. 감정을 볼 수 있었기에, 더더욱 보기가 두려웠다.
증오와 적의로 점철된 그 내심을 보면 견딜 수가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시엔은 단지 고장난 시계처럼 사죄의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자, 잘못… 잘못했어요, 경. 모, 모두… 흐윽, 모두 내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사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없이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는 황녀를 바라보다가, 그 어깨를 들쳐 일으켰다. 그때까지도 시엔은 울고만 있었다.
이안은 침묵 끝에 한 마디를 내뱉었다.
“……황녀 전하.”
“네, 네?”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는 소녀의 목소리에, 이안은 단 한 가지 행동으로 응수해 주었다.
콱, 하고 주먹이 소녀의 뺨 위로 내리꽂힌다.
아이린조차 아무런 말조차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얼얼하다. 아니, 어금니가 빠져나간 것만 같았다.
당연히 황녀로서는 처음 겪어보는 굴욕이었다.
시엔은 몇 번 땅을 구르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 지금 얻어맞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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