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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87화 (187/649)

〈 187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51)

* * *

울먹이는 황녀는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황녀’라는 거창한 호칭으로 불리고 있지만, 그녀의 본질은 고작해야 갓 성인이 된 여인이나 다름없었다.

만 나이로 따지자면 스물조차 되지 못한 소녀였다.

느닷없이 행렬을 습격하는 마수 군단에, 호위기사들은 생체폭탄으로 전락했고 믿고 있던 시녀장은 정체불명의 암흑사제에게 조종당하고 있었다.

누구라도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일행의 최고책임자가 아닌가.

도리어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기에 더욱 괴로울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녀 탓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자괴감과 자책감이 기생충처럼 그 심장을 파먹고 있겠지.

황녀를 노리는 세력에 의해 수십이 죽고 다쳤다.

그중 몇몇은 함께 웃고 떠들던 사이였다. ‘호위기사’와 ‘시녀장’, 그 직위명만 보더라도 필연적으로 황녀의 측근으로 분류되어야 할 인물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정신력에 치명타였다.

지금처럼 울음을 터트리며 사죄의 말만 읊더라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황녀는 지금 마취 기운에 취해 더욱이 취약해진 상태였다.

“미, 미, 미안해요… 미안해요, 이안 경…….”

맑은 눈물이 또르륵 떨어져 내린다.

암청빛 머리카락을 가진 고귀한 외모의 여인이 우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과도 같은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내게는 그 광경을 느긋하게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내 눈이 흘깃 등 뒤를 향했다.

미트람의 몸뚱아리가 활활 타고 있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조종하는 시녀장의 몸이었다.

통상적으로 불에 탄 시체가 재생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위대한 사령술사라도 불에 탄 시체에서 혼령을 뽑아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니 이제 미트람은 전투불능이라 생각해야 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까닭 모를 조급증이 일었다.

어서 대피시켜야 했다.

그러한 생각이 발작처럼 뇌리를 파고들고 있었다.

해독제를 마셨지만 황녀와 여기사는 전투 속행이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다고 무작정 쓰러져 있는 호위기사들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그들 중 일부가 생체폭탄으로 개조되었기 때문이었다.

여러모로 까다로운 선택지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내 고민에 잠긴 시선이 다시금 황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아직도 망가진 축음기처럼 용서를 구하고 있을 뿐이었다.

“자, 잘못… 잘못했어요, 경. 모, 모두… 흐윽, 모두 내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때로는 복잡한 계산이 오히려 문제를 난해하게 꼬아 버리기도 했다.

단순히 생각하기로 했다, 단순히.

내 손이 비틀거리는 황녀의 어깨를 들쳐멨다. 소녀는 몸을 일으킨 뒤에도 끅끅거리며 넘쳐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는 데 급급했다.

내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은 그때였다.

“……황녀 전하.”

황녀의 연회색 눈동자가 흘깃 나를 향했다. 어리둥절한 눈빛을 한 채, 그녀는 의문을 가득 담아 내게 물었다.

물기에 젖은 그 눈망울이 퍽 아름다워 보이기는 했다.

물론 그러한 감상을 곧이곧대로 드러낼 만큼 나는 어리석지 않았다.

다소 불안한 듯 황녀는 더듬거리며, 내게 물어왔다.

“네, 네?”

그리고 그 얼떨떨한 목소리가 끝맺어지는 그 찰나.

콱, 하는 소리와 함께 황녀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내 주먹이 황녀의 뺨에 틀어박힌 것이다.

얻어맞는 그 순간까지도 황녀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지 못한 듯했다. 멍하니 벌려진 입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붕 떠오른 황녀의 몸이 땅바닥을 몇 차례 굴렀다. 그만큼이나 진심을 담은 일격이었다.

연약한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조금 힘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황녀는 물리적 충격보다는 정신적 충격이 더 큰 모양이었다. 흐으, 흐으, 하고 멈추었던 숨을 들이키는 황녀의 눈동자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 연회색 눈동자가 채 나를 향하기 전, 나는 그녀의 멱살을 쥐었다.

“그만 좀 징징대십시오, 황녀 전하.”

이글거리며 내뱉어진 내 목소리에 황녀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지금 그녀에게 내가 어떤 모습으로 비칠지는 알 수 없었다. 핏물에 젖은 머리카락에, 살의로 타오르는 흉흉한 눈빛을 한 괴물로 보이고 있을지도 몰랐다.

“미안하다고요? 그 모든 사람들이 당신 잘못으로 다치고 죽었다, 그 말입니까? 미트람이 한 말대로라면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황녀의 잘못은 많지 않았다.

아카데미 내에서 나는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존재로 통했다.

황녀에게 느닷없이 물을 끼얹어도 내가 저지른 기행의 목록이 하나 더 늘어날 뿐이지, 무언가 까닭이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황족이라면 마땅히 모욕을 되갚아 주어야 한다.

내 가족과 지인들을 건드린 것이 선을 넘었을지언정, 나는 황녀가 처음부터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잘잘못을 따지자면 모든 죄는 암흑교단에게 있었다.

그들이 황녀를 노리지만 않았다면,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마수를 동원하고 황녀를 습격하지만 않았다면 아무도 희생될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굳이 그 점을 짚어주지는 않았다.

이미 미트람에 의해 모든 것이 그녀의 잘못이라는 인식이 덧씌워진 뒤였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기존의 믿음을 일일이 파괴하는 것은 비효율적이었다.

그 대신 내 입은 숨김없는 진심을 토해냈다.

“그렇다고 징징대고 눈물만 짜고 있으면, 누가 대신 해결이라도 해준답니까? 무섭고 힘드니까? 그래서 이제는 제가 뒷수습까지 해드려야겠습니까, 황녀 전하?”

“아, 으, 그, 그게 아니라…….”

황녀는 갑작스러운 책망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한 대 얻어맞은 효과가 크긴 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내 시선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다.

황녀의 눈동자에 다시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동안 워낙 강한 척을 해서 몰랐는데, 사실 그녀는 눈물이 많았다. 아니, 많다 못해 ‘울보’라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것이 죄는 아니었다.

누구나 약해질 권리쯤은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내가 그녀에게 고함을 내지르는 까닭은, 눈물에도 적합한 때와 장소가 따로 있기 때문이었다.

황녀는 드높은 자리에 있는 인간이었다.

제국의 귀족은 권리만큼이나 무거운 짐을 짊어진다. 이는 설령 황족이라 하더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이안 경… 제,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알아들으셨으면, 그만 우십시오.”

내 싸늘한 경고에 황녀는 히끅, 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꾹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정신을 차리게 할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연회색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 눈을 보니 또 나는 마음이 약해져서,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사실 내가 전하고 싶은 진심은 하나가 더 남아있었다.

나는 더듬거리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리고 말입니다…….”

“이안 경!”

여기사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본능적으로 황녀를 껴안고 몸을 던졌다. 쐐애액, 하는 파공성과 함께 내 발목을 무언가가 휘감는 감각이 느껴졌다.

내 손이 곧장 손도끼를 들었다. 그리고 상반신을 일으켜 내 발목에 감긴 마력의 끈을 몇 차례 내리쳤다.

캉, 캉, 캉!

손도끼와 마력의 끈이 마주칠 때마다 마치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꽃이 튀기며 시야를 물들였고, 내 이가 절로 악물어졌다.

칵, 하는 소리와 함께 비로소 마력의 끈이 잘려나갔다. 그러나 내 발목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끈이 끊기기 직전에는 무시무시한 압력이 가해진 뒤였다.

얼핏 발목 관절이 어긋나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내 잇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끄으, 크…….”

황녀는 너무나 놀란 탓인지 딸꾹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든 말든 나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는 내 등 뒤에서, 불에 탄 시체가 땅을 짚은 채 엎드려 있었다.

아니, 그것을 시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수없이 뻗친 마력의 끈들이 주위에 흩어진 호위기사들의 신체 파편들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 조각난 팔다리들이 하나둘씩 이끌려 시체에게 달라붙고 있었다.

으드득, 까드득, 빠드득.

기괴한 소음과 함께 흩어진 신체 부위가 뼈째로 으스러졌다. 그럴수록 여인의 몸뚱아리를 휘감고 있던 탄화된 껍데기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다.

곧 새빨간 근육이 드러나고, 뒤이어 새하얀 살갗이 재생되었다.

그르륵, 하고 텅 빈 굴곡을 통과하던 바람 소리가 그제야 언어를 되찾았다.

그 입술 사이로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괴물이 제대로 된 모습을 되찾기 전에, 얼른 황녀를 등에 들쳐멘 뒤 여기사에게로 던져 버렸다.

“당장 도망쳐요, 당장!”

우당탕, 하고 황녀의 몸이 또 다시 땅바닥을 굴렀지만 이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은 남아있지 않았다.

여기사는 주춤거리면서도 곧장 황녀를 품에 안았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허리춤에 다시 손도끼를 매달고,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사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토굴이 지진이라도 난 듯 거친 울음을 토해냈다.

흙더미가 천장에서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일순 나조차도 휘청거렸을 정도의 진동이었다. 여기사와 그 품에 안긴 황녀의 눈동자에 공포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 유력한 원인은 하나뿐이었다.

어느덧 육체를 되찾은 미트람은, 내 시선에 맞서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감이 예리하군요, 이안 페르쿠스? 설마 불에 태운 시체까지 경계하고 있을 줄이야.”

떨어져 내리는 흙더미 사이로 나와 괴물이 마주섰다.

황녀와 여기사를 등 뒤에 두고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숨을 골랐다.

이 기나긴 하루도 비로소 마지막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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