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88화 (188/649)

〈 188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52)

* * *

어느덧 땅거미처럼 드리운 토굴의 울부짖음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흙먼지가 떨어져 내렸고, 견고해 보이던 토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머금는 수밖에 없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내 성대를 긁고 으르렁거리는 물음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그 위협적인 어조에도 미트람은 즐겁다는 듯 홍소를 터트릴 뿐이었다.

“훌륭한 사냥꾼은 덫을 두 개씩 준비해 두는 법이죠. 만약 일이 틀어진다면, 모든 것을 초기화할 수단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면서 미트람의 손에 들린 마력의 끈이 꿈틀거리며 일어섰다.

그것이 노리는 상대는, 황녀였다.

나는 곧장 검으로 마력의 끈을 내리쳤다. 카각, 하는 소음과 함께 궤도가 뒤틀린 끈이 역으로 내 팔을 휘감고 타올랐다.

아직까지도 넋을 놓고 있는 여기사와 황녀에게, 나는 다급히 고함을 내질렀다.

“당장 도망치랬잖아!”

“맞습니다, 얼른 도망치는 편이 좋을 텐데요…….”

그렇게 말하는 미트람의 음색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 깔린 흐릿한 희열과 광증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여인의 입이 기묘할 정도로 길쭉이 찢어졌다.

“이 토굴,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질 예정이거든요.”

그 말을 듣자마자 여기사의 낯빛이 핼쑥해졌다. 토굴이 무너진다면 그 안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맞이할 결말은 뻔했다.

죽음뿐이었다.

여기사는 곧바로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뒤돌아 도망치기 직전, 그녀는 망설임이 어린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던지려고 했던 질문은, 황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 이안 경은…….”

헐떡이는 목소리, 아직도 물기가 가시지 않은 그 한 마디에 내 몸이 멈칫했다.

“어, 어떻게 하려고… 위험해요, 얼른 피해야…….”

“황녀 전하.”

그제야 처음으로 내 눈이 황녀의 연회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나는 흐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살아계셔서 다행입니다.”

세로로 찢어진 황녀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그녀는 얼음 동상이라도 된 것 마냥 미동조차 없었다. 다만 왈칵 차오르는 눈물이, 소녀가 감정을 가진 인간임을 입증하고 있을 뿐이었다.

황녀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나는 단호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떠나.”

물론 황녀에게 던진 말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애초에 명령조로 말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여기사는 조금 슬픈 낯빛으로 고개를 한 번 숙였다. 그리고 곧장 입구를 향해 땅을 박차고 떠나갔다.

발걸음 소리가 점점 더 멀어졌다.

그때까지도 미트람은 아무런 제지가 없었다. 오히려 여인은 휘유, 하고 휘파람을 불며 여기사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여유마저 보여주었다.

내 의아한 기색에 미트람이 웃었다.

“어차피 어긋난 판 아닙니까? 황녀의 눈을 무사히 확보하기는 어렵겠고, 그렇다면 차선책을 골라야지요.”

“차선책이라고?”

“바로 당신.”

미트람의 눈동자가 은은한 열기를 품고 나를 노려보았다. 그대로 두면 눈빛으로 내 몸을 꿰뚫기라도 할 기세였다.

그녀의 입꼬리가 비틀려 말아 올려졌다.

“당신은, 걸림돌입니다. 비단 오늘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그렇겠죠… 그러니까, 오늘은 당신을 제거하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쓴웃음을 머금는 수밖에 없었다.

과분한 평가였다. 아무리 그래도 황족의 곁에 실험체를 심어두는 암흑사제에게 들을 만한 칭찬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는 아무래도 좋았다.

최소한 미트람이 나를 무시하고 황녀를 뒤쫓을 가능성은 현저히 작아진 셈이었다. 우선적으로 황녀를 보호해야 할 내게는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만 그 당당한 태도에 조금 분한 마음이 들어서, 나는 마지막까지 허세를 부렸다.

“죽일 수는 있고?”

다시 한 번 우르릉, 하고 토굴을 진동이 휩쓸고 지나간 것은 그때였다.

두 번째로 겪는 흔들림이었기에 내가 또 균형을 잃는 일은 없었다. 다만 입술을 짓씹으며 매서운 시선을 미트람에게로 보냈을 따름이었다.

미트람은 멍하니, 그리고 몽롱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군요.”

“토굴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여인은 대답 대신 흐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입을 가린 채 쿡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왜 하필 아카데미 지하에는 토굴이 있는 걸까요? 보다 본격적인 공사를 해도 됐을 텐데…….”

그 말과 함께 새파란 마력의 실이 수십 가닥이나 흩어져 내렸다.

명확한 적의의 표현이었다. 나는 신음을 흘리면서도 검을 쥔 자세를 고쳐 잡았다.

팔은 완치되지 않았고, 폭발로 누적된 부상에, 발목의 관절까지 어긋났다.

모로 보나 긍정적인 신호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맞서지 않는다는 선택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발목까지 망가진 주제에 저 괴물에게서 제대로 도망칠 수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 황녀가 도망칠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것뿐이었다.

미트람은 희끄무레한 광증이 묻어나오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 그런데 참. 혹시 춤 좋아하시나요?”

그리고 여인이 빙글 회전하며 수십 가닥의 끈이 살아있는 뱀처럼 일어섰다.

오늘의 춤 상대는, 재가 돼도 죽지 않는 불사의 괴물이었다.

**

수십 가닥의 끈들이 송곳처럼 쏘아진다.

이미 검 한 자루로 대응할 수 있는 수는 초과한 지 오래였다. 어쩔 수 없이 검을 한 손으로 쥐고, 나머지 한 손에는 도끼를 쥐는 수밖에 없었다.

고속으로 휘둘러진 날붙이들이 솜씨 좋은 직공의 베틀처럼 마력의 실들을 갈아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튕겨 나간 몇몇 실낱들이 팔다리를 파고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또 다시 종아리 부근이 관통당했다.

나는 옅은 신음과 함께 두어 걸음을 물러섰다.

익숙해진 탓인지 쓰라린 통증조차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감각이 점차 예민해졌다.

또 다시 마력의 끈이 쏘아진다. 나는 이제 막아내지 않고 차라리 그 끈을 쥐어버리는 편을 택했다.

작열하는 마력의 칼날의 내 손을 파고들었다. 이를 악문 채로, 나는 그 끈을 잡아당겨 업어메쳤다.

전력을 다한 반격이었다.

쾅, 하고 미트람의 몸이 낚싯바늘에 매달린 물고기처럼 그대로 땅바닥으로 쳐박혔다.

그럼에도 미트람은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토굴이 뒤흔들리는 간격이 점점 더 짧아지고 있었다.

천장에서 떨어진 흙들만 한무더기였다. 안정적으로 보이던 토굴의 벽면들은 이리저리 툭툭 튀어나와 내용물을 토해냈다.

본능과 이성이 동시에 경종을 울렸다.

붕괴가 눈앞이다.

그러나 미트람은 땅에 처박힌 충격을 고개를 몇 번 저어 털어내고는, 여유작작한 미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이안 페르쿠스, 어째서 부정하죠?”

“……뭐를?”

헐떡이면서, 나는 그렇게 반문했다.

사실 미트람이 무어라 말하든 딱히 관심은 없었다. 다만 조금이라도 숨을 돌릴 시간이 주어진다면 몇 마디 어울리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 속셈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미트람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당신 말입니다, 무척 화가 나 있잖아요?”

그러면서 미트람은 뚜둑, 하고 어느새 직각으로 기울어진 제 목을 억지로 고정시켰다. 그는 조금 편해졌다는 듯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붙였다.

“귀족들이란 대개 멍청하죠. 사실은 규율과 관습에 누구보다 얽매인 존재인 주제에, 낡아빠진 사고에 의지해서 세상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해설하려 듭니다… 그들은 대의를 이해하지 못해요. 이미 그렇게 뇌가 굳어버렸기 때문이죠.”

개소리, 나는 그렇게 뇌까리면서 손도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팍, 하고 충격파가 일며 손도끼가 쏘아졌다. 파공성조차 들려오지 않는 초음속의 일격이 새하얀 궤적을 그리며 쏘아졌다.

그러나 미트람은 막아내지 않았다.

그저 푸흐흐, 하고 웃으며 목이 잘려나가도록 유도했을 따름이었다.

팍, 하고 핏물이 솟구치며 미트람의 머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 목과 머리 사이를 잇는 새파란 마력의 끈이, 마치 누에의 고치를 이루는 실처럼 서로를 잡아당겼다.

두 살점이 맞붙는 동시에 미트람의 입이 다시금 언어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저 마력의 끈을 끊어내지 않으면 답이 없었다.

최소한 지금의 내 오러로는 답이 없었다. 몇 번이고 내리쳐야 겨우겨우 끊어낼 수 있는 강도의 끈이었다.

나는 헐떡이면서 손을 올려 탁, 하고 되돌아오는 손도끼를 낚아챘다.

미트람은 강자에 어울리는 여유를 보였다.

그는 키득거리면서 설득을 이어갔다.

“그래서 화가 나잖습니까.”

미트람이 한 걸음 다가온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금 손도끼를 내던졌다.

팍, 하고 핏물이 튀고 결과는 같았다.

손도끼는 되돌아오고 미트람은 다시금 한 걸음을 내딛었다.

“실력도 없는 머저리들! 주제도 파악하지 못하고 멋대로 나대니까, 당신이 매일 다치고 고생하는 겁니다. 그러지만 않았어도……!”

나는 내달려 칼날을 그 입속으로 쑤셔 박았다.

쩍 벌어진 입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만족하지 못한 내 손이 손도끼를 미친 듯이 내리찍었다.

팍, 팍, 팍!

살점에 손도끼가 내리꽂히는 소리보다 그 파편이 핏물과 뒤섞여 튀기는 소리가 더 컸다.

처음에는 피, 그 다음에는 살점, 그 후로는 골수가 터져 나오고 안구까지도 툭 튀어나왔다.

미트람의 웃음소리는 그때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큭, 크엑… 큭큭큭! 그, 그러지만… 헤엑, 않았어도! 당신이 아플 일이… 켁, 있었을까요? 푸흐, 크헉… 흐흐흐흐흐!”

미트람의 걸음걸이는 멈추지 않았다.

어느덧 내 품까지 파고든 그는, 가벼운 손짓으로 내 팔을 붙잡고 내 몸을 그대로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쿵, 하는 충격파와 함께 컥, 하고 내 입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유효타 자체는 내가 수십 배 더 많이 먹인 상황이었다.

몇 번이고 내리찍으면 제 아무리 튼튼한 마력의 끈이라도 끊어질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 판단이 오판이었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미트람의 신체 부위를 잇고 있는 마력의 끈은, 실시간으로 재생하고 있었다.

단숨에 끊어내지 않으면 저 연결을 절단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는 곧 타인의 육신을 입은 미트람이 불사신이나 다름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저만한 밀도를 가진 마력의 끈을 잘라내기 위해서는 최소한 익스퍼트에 도달해야 했으니까.

지반에 틀어박힌 내가 발작처럼 몸부림치자, 미트람은 서서히 재생하는 입으로 내 귀에 속삭였다.

“……승리하고 싶습니까?”

불현듯 뇌리에 틀어박히는 그 목소리가, 내 욕망의 심부를 파헤치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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