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53)
* * *
승리하고 싶냐고?
당연히 그랬다.
어떻게든 승리하고, 짓밟고, 다시는 반항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가슴 속에 박혀 버린 절절한 감정이었다.
그래야만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있다.
그 조급증이, 나로 하여금 일순 호흡을 정지하도록 만들었다.
미트람은 더욱 달콤한 속삭임으로 내 귀를 적셨다.
“그 감정에 몸을 맡기세요. 분노, 증오… 도덕이나 윤리? 그까짓 게 세상을 바꿔 주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헛소리 하지 말라고, 그렇게 외치며 몸을 일으키려던 내 어깨를 여인의 손이 꾹 눌러 앉혔다.
한계에 이른 내 시야가 점차 좁아졌다. 미트람의 미소가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차피 늘 하던 일 아닙니까?”
그 말에 울컥, 하고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오던 분노가 잠시 가라앉았다.
늘 하던 일?
그래, 늘 하던 일이었다.
“분노에 몸을 맡기고, 죽여 버리면 됩니다. 자… 제게 그 분노를 풀어헤치시지요.”
미트람의 웃음소리가 점점 더 흐릿해진다.
정신이 몽롱해지고, 긴장했던 근육이 이완되며 내 머리는 풀썩 땅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면 너무 멀리 오지 않았던가.
시골 자작가의 차남 주제에, 너무나 많은 일을 해냈고 이제는 지쳤다.
아닌 척했지만 황녀와의 갈등은 내게 많은 상처를 남겼다.
내 소중한 사람들이 다쳤고, 지금도 다치고 있을지 모를 상황이었다. 그 실감도 나지 않는 ‘세계 멸망’을 막기 위해 견뎌내야 할 희생치고는 지나치게 컸다.
그에 반해 증오와 살의란 얼마나 명확한 감정인가.
단지 죽이고 싶다면 일념이면 됐다.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내 가슴도 시원해진다. 검을 움켜쥔 내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력이 휘몰아친다.
고원에 한파가 휘몰아치듯, 토굴에 수수께끼의 바람이 거칠게 모여들었다. 미트람은 황홀한 눈빛으로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쳤다.
검에 오러가 맺히고 있었다.
그 색조는 찬란한 은빛이 아니었다. 점점 더 탁해지는 빛무리가 이내 회색의 채도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 밀도와 예기만큼은 이전과 비할 바 없을 정도였다.
죽여야 한다.
수없이 되뇌이던 그 의지가 칼날을 이루었다.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증오와 살의가 가슴을 달군다. 망막의 미세혈관이 충혈되고, 내 숨결이 더욱더 거칠어졌다.
우르릉, 하고 다시금 토굴을 진동이 휩쓸고 지나갔다.
그야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검을 지팡이 삼아, 후들거리는 다리를 강제로 진정시키며 뭄을 일으켰다.
푹, 하고 검이 멋대로 지반을 파고들어 몇 번을 주춤거렸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 섰다.
미트람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오, 무척이나 멋진 모습입니다… 이안 페르쿠스. 이제야 그 마음을 이해하셨습니까?”
“……오냐.”
어디 한 번 죽이고 죽여보자.
미트람은 기쁨을 담아 춤추며 마력의 끈을 일으켰다.
내 눈이 공간을 도해하며 그 모든 궤적을 눈에 담았다.
그 이전까지는 회피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궤적이 비틀리고 뒤틀려 하나의 점으로 수렴한다.
내 칼날이 그 지점을 망설임 없이 내리찍었다.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단숨에 수십 가닥의 끈들이 힘을 잃고 흩어졌다.
몇 가닥이 남아 쏘아졌으나 내가 땅을 박차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쿵, 하고 지축을 뒤흔드는 충격파와 함께 공간이 단번에 압축된다.
어느덧 나와 미트람은 지척.
여인은 웃었고 내 검은 허공에 빛을 흩뿌렸다. 이대로 힘만 준다면 저 자는 끝이었다.
그러나 그 찰나, 내 뇌리를 뒤흔드는 한 마디가 있었다.
“……이안 페르쿠스.”
시간이 정지한 듯한 착각이 일었다.
새하얗게 공간이 허물어진다. 수없이 많은 기억들이 중첩되며 수십의 목소리를 내게 재생하고 있었다.
나는 마치 판관 앞의 죄인이 된 심정으로, 허망하게 주위를 훑었다.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이들이 저마다의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세상을 구해라.”
낯설지는 않았다.
지금껏 몇 번이고 경험한 적이 있었다. 이 기억은 ‘나’의 기억이었다. 잘못된 선택을 한 누군가가 남긴, 후회의 궤적들.
나는 그 점이 못내 억울했다.
“……내가 왜?”
도대체 내가 뭐라고, 그토록 무겁고 고통스러운 짐을 짊어져야 한단 말인가.
편지를 받기 전까지 그까짓 위대한 사명 따위는 꿈도 꾸지 않고 살아왔다.
시골 자작가의 차남에 불과한 내게는 애초에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최선을 다했고, 그러다 보니 닿은 길이 이곳이었을 따름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프고 다쳤다.
그리고 내 몸뚱아리는 만신창이가 돼서, 보라. 지금도 가까스로 서 있는 것이 고작이 아닌가.
안타깝지만 내가 도출해낸 해답은 이뿐이었다.
이 길이야말로, 내가 걸어가야 할 유일한 선택지였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이를 악물고 검을 쥔 손에 다시금 힘을 주었다.
회색의 오러가 거친 폭풍을 일으켰다. 이제 이대로 나아가기만 한다면 끝이었다.
그때였다.
그 마지막 순간까지, 얼핏 내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만약 내가 델핀 선배를 죽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느닷없는 가정이었다. 수렵제 당시 나는 델핀 선배를 죽일 생각이 없었고, 그랬다가는 나 또한 곤혹을 면치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날 보았던 세리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겁에 질린 얼굴, 그 모습을 떠올리자검을 치켜든 내 팔의 고도가 조금 내려갔다.
성녀는 어째서 고아를 구하려 들었냐고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 혼란스러운 눈빛을 한 여인을 향해, 나는 잘난 듯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임마누엘(immanuel), 부디 신께서 함께하시기를.
하나둘씩 추억들이 내 사고와 충돌할 때마다 검을 쥔 내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내 의지로 구해낸 여인, 엠마는 나를 껴안으며 말했다.
“너는, 살리는 사람이잖아.”
그제야 나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빛으로 물들었던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 내 앞에서 기대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미트람은, 고개를 갸웃했다.
내 검에 맺힌 오러가 회색에서 점차 그 명도를 되찾고 있었다.
회색에서, 다시금 은빛으로.
내 입이 흐, 하고 되다 만 웃음을 흘렸다.
이제야 들어오는 정보들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마치 취한 듯 전투에만 몰두했던 나였다.
비로소 정신을 차리자 미트람이 보인 이상 징후가 속속들이 떠올랐다.
나는 검을 휘두르는 대신, 한 손으로 미트람의 멱살을 쥐어 올렸다.
“……도망칠 곳, 남겨놨구나.”
토굴이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 붕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우수수 떨어진 흙더미들이 어느덧 무릎까지 차올라 있었다. 특히나 천장에서 떨어지는 흙이 많았다.
다만 미트람은 무슨 소리냐는 듯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안 페르쿠스, 농담을 하시려면…….”
“자꾸 내가 살아나갈 것처럼 이야기하잖아.”
내 지적에 미트람의 조소가 뚝, 하고 그쳐버렸다. 마치 급속냉각이라도 당한 것처럼 여인은 징그러운 미소를 지은 채 움직임이 멎어버렸다.
“그러지 않으면 날 설득할 필요도 없잖아, 응? 뭘 하려고 했는진 모르겠는데… 탈출구를 하나 만들어 두긴 했구나.”
잠시간 얼어붙어 있던 미트람은, 이내 큭큭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알려드릴까요, 이안 페르쿠스? 당신도 살고 싶긴 하겠죠. 자, 다만 저와 계약만 하나 맺으면…….”
서걱, 하고 내 검이 미트람의 목을 자르고 지나간 것은 그때였다.
미트람의 눈은 부릅떠진 채였다. 마지막 순간에 대응하려고 했으나, 그보다 내 속도가 더 빨랐다.
일념(一?).
내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방향을 정한 것만으로도, 내 오러는 강고한 빛을 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굳은 의지의 구현 앞에 마력의 끈은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데구르르, 하고 여인의 머리가 땅 위를 구른다.
마력의 끈이 끊어진 미트람의 몸이 재생하는 일은 없었다. 단지 믿을 수 없다는 듯 허우적거리다가, 그대로 풀썩 쓰러졌을 뿐이었다.
나는 싸늘한 목소리로 미트람에게 답했다.
“……필요 없어.”
말싸움을 할 시간에 주변을 살펴보는 편이 더 나았다.
어차피 암흑교단과 하는 ‘계약’이란 뻔했다. 나중에 알고 보면 후회하는, 그까짓 함정에 당해줄 만큼 나는 멍청하지 않았다.
다만 내 눈이 천장을 향했다.
유독 흙더미가 많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중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를 고려하더라도 천장만 무너져 내리는 속도가 유독 빨랐다.
어차피 시간이 없었기에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떨어져 내린 흙더미 위를 올랐다.
가장 높이 쌓인 흙더미는 이미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지는 높이의 반절까지 닿아 있었다. 그때 키득거리는 소리가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안 페르쿠스.”
내 눈이 흘깃 등 뒤를 향했다. 그곳에는 이제 머리만 남은 미트람이, 슬슬 힘이 사라져 가는지 경직된 미소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본신이 아니라면 이 정도가 한계인 것 같군요… 하지만너무 외로워하지 마세요, 제가 곧 찾아갈 테니.”
그 진득한 작별인사에, 나는 대답 대신 손도끼를 내던졌다.
콰직, 하고 골통이 으껴지며 핏물과 뇌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좆까.”
그리고 손을 들고, 도끼가 내 손에 돌아오는 동시에 내 몸이 엎어졌다.
흙더미가 육중한 무게로 내 등 위를 덮쳐든다.
마지막 순간에 얼핏 빛을 본 것만 같았는데, 한계에 달했던 내 의식은 그만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다만 다급한 목소리만이 귓가에 잔향처럼 남았을 뿐이었다.
“으, 꺄아아악! 이, 이게 무슨… 응? 이, 이안? 이안! 아, 안 돼…사, 사제단! 당장 사제단 집합시켜!!”
내 의식이 암전한다.
내가 정신을 잃은 동안, 황녀와 내 주변 사람들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질지는 예상치도 못한 채로.
이야기의 종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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