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90화 (190/649)

〈 190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54)

* * *

두껍고 단단한 껍질을 가진 생물은 여린 속살을 숨기고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경향성은 단지 생물학적인 분야에 한정되지 않았다. 살펴보면, 인간의 심리 또한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견고한 껍질을 두르고 있을수록 그 알맹이는 가냘프고 보드랍다.

제국의 제5황녀, 시엔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 수많은 상처를 받은 그녀였다. ‘용의 눈’은 사람의 속내를 읽어내는 힘이 있었고,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공포나 혐오를 드러냈다. 이는 강인한 정신을 지닌 어른들조차 감내하기 힘든 종류의 경험이었다.

하물며 고작 말문을 막 텄을 뿐인 소녀가 견뎌낼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그렇게 황녀의 마음속에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상처가 차곡차곡 쌓여갔고, 소녀의 세계는 점차 내면으로 수렴하기 시작했다.

모든 이들이 그녀를 미워하고 싫어했다. 그러므로 시엔이 모든 이를 불신하게 된 것은 필연이었다.

이는 예정된 결과일지도 몰랐다. 누군가의 심리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인물의 밑바닥을 본다는 뜻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용의 눈’으로 보았을 때 인간만큼 추악한 존재는 없었다. 하나같이 욕망에 젖어 움직이는 존재들, 때때로 시엔은 제 눈을 찔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황녀의 인간혐오를 더욱 부채질하는 데는 그 아리따운 외모도 한몫했다.

고고하고 아름다운 여인이란 보석보다도 귀중한 존재였다.

남성은 소유욕을 느끼고 여성은 질투를 품는다. 그 본능과 유사한 감정을 받아들이고 느껴야 했던 시엔은 자연스레 깨닫고 말았다.

인간의 실체란 이토록 추악하다.

황녀는 ‘순수’나 ‘진심’ 따위의 낱말들이 공상에 불과하다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그 탓에 사무치는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 누구도 진심으로 대하지 않으며, 그 누구에게도 진심을 내보이지 않은 존재란 이처럼 고독하고 쓸쓸했다.

단 하나의 예외조차 없었다.

거짓된 감정으로 이루어진 거짓된 관계들뿐이었다.

시엔이 아껴 마지않는 아이린이나 시녀장조차도 그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들도 나름의 계산이 있었기에 그녀를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금전욕이든, 명예욕이든, 심지어는 성욕이든.

그 누구든 사리사욕 없이 시엔을 대하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이안을 만났던 날, 그녀가 오판을 저질렀던 까닭도 그 때문이었다.

이안 페르쿠스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욕망 덩어리다. 따라서 이안 페르쿠스 또한 욕망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고 가정해야 옳았다.

명료한 삼단논법이었다. 시엔이 이를 의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처음 이안을 마주쳤을 때는 조금 헷갈리기도 했다.

‘용의 눈’으로 바라보았음에도 이안의 속내는 까마득해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 뵀던 제국의 검공을 제외하면 오랜만에 겪는 경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엔은 지금껏 수도 없이 보아온 인간들의 추레함을 믿었다.

그 결과가 바로 물벼락을 얻어맞는 치욕이었지만 말이다.

그날의 악몽은 한동안 두고두고 시엔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그래도 그날 이후 마주친 이안을 대하기는 조금 편했다. 흐릿하게나마 그 심리가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이안과 황녀의 관계가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이안이 달라졌더라도, 시엔이 갇힌 세계는 그대로였던 탓이었다.

소녀는 사내가 드러내는 감정을 애써 부정하고 왜곡해서 받아들였다.

그 모든 감정이 가식이고 조롱처럼 느껴졌다. 더불어 누군가가 그녀를 동정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참을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홀로 침실에 틀어박혀, 누구라도 마주칠까 덜덜 떨던 과거로 회귀할 수는 없었다. 나약하고 비루하던 그 계집아이와는 결별하겠다고, 몇 번이고 굳은 다짐을 했던 그녀였다.

그래서 더욱 사납게 털을 세우고 이안을 몰아붙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별다른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이는 자기방어기제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기대할수록 실망은 커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어차피 저 자의 감정도 일시적으로 꾸민 거짓에 불과하다.

찰나의 선의가 욕망을 이겼을 뿐이리라고, 시엔은 수십 번은 되뇌었다. 절대로 믿지 않겠다며 다짐했고 그 절박함이 도를 넘은 대응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토굴에서 사내를 마주한 순간, 시엔의 사고는 정지하고 말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도 않고, 그 모든 악의와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럴 리는 없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귀향제가 시작되면서 그녀가 전제로 두었던 가정이 반전되었다.

토굴에 들어가자마자 믿고 있던 측근이 조종당하고, 그렇지 않은 호위기사들은 폭발하면서 시엔의 정신력은 점점 더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미트람의 말이 송곳처럼 소녀의 뇌리에 틀어박힌 것은 그때였다.

숨겨진 진실이 이어질수록 시엔의 두뇌는 점점 더 명료한 답안을 도출해 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시엔은 그 추론을 끝끝내 부정하고 싶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에는 그녀가 저지른 죄가 너무나 많았다.

이안의 호의를 증오로 돌려주었으며, 그 결과 또한 끔찍했다. 촉망받던 호위기사들이 목숨을 잃었고 황녀 그 자신도 목숨의 위기를 느끼고 있던 차였다.

미트람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그 사내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단 말인가.

죽어서도 사죄해야 할 터였다.

그렇게 시엔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었다.

그토록 속으로 비난하고 모욕하던 사내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핏물이, 주르륵 터져 나왔다.

미트람이 시엔의 눈동자를 뽑기 직전의 일이었다. 파공성이 울려 퍼지더니 미트람의 두 팔이 땅 위로 나동그라졌다.

이안 페르쿠스였다. 그가 황녀를 구하기 위해 도달한 것이다.

그 이후에 머리를 짓밟히는 굴욕을 당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눈물을 흘렸던 것은 그 치욕 때문이 아니었다.

미트람이 하나하나 내뱉는 말들이 너무나 아팠다.

심지어 암흑사제가 이안에게 시엔을 두고 떠나라는 말을 했을 때는, 내심 그 말에 동의하기까지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제 와서 구해 달라고 하기에는 너무 염치가 없었다.

그럼에도 사내는 결국 시엔을 구해냈다.

그의 몸은 겉보기에도 만신창이였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사죄의 말만 반복하는 시엔의 뺨을 그가 후려쳤을 때, 그녀는 깜짝 놀랐으면서도 동시에 안심했다.

차라리 곤죽이 될 때까지 얻어맞았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그러면 차라리 벌을 받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안은 황녀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다만 무너져 가는 토굴을 지키며,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을 따름이었다.

“……살아계셔서 다행입니다.”

시엔은 그날 처음으로 누군가의 숨김없는 진심을 마주할 수 있었다.

단 일말의 욕망조차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사람이었다면 목숨을 잃을 것이 뻔한 상황에서 황녀의 목숨을 우선하지는 못했을 터였다.

그렇구나, 소녀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왈칵 눈물을 터트렸다.

이 세상에는 ‘진심’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가짜가 아니라 진짜가 시엔의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토굴이 흔들리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황녀는 마취액에 취해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혀로, 울먹이며 애원했다.

“아, 아이린… 이, 이안 경을 구, 구해야…….”

“……죄송합니다, 전하. 하지만 이안 경의 희생을 헛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아이린의 목소리는 물기로 먹먹히 젖어 있었다. 황녀는 도무지 움직이지 않는 제 몸을 탓하며 눈물을 흘리는 수밖에 없었다.

안 돼, 이제야 처음으로 찾았단 말이야.

내 인생의 유일한 ‘진짜’, 티끌만한 가식도 없이 그녀를 대해 주는 오직 한 사람.

지난날의 기억들이 칼날이 되어 시엔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어째서 조금만 더 일찍 깨닫지 못했을까, 그토록 미워했던 사내야말로 그녀의 유일무이한 동아줄이었단 사실을.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다.

아이린이 가까스로 몸을 던져 토굴을 빠져나온 그 찰나, 굉음이 터져 나오더니 흙더미가 땅굴을 덮치기 시작했다.

마치 묘지기가 시체를 매장하듯 흙무더기가 쏟아져 내렸다. 이를 바라보는 시엔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물들었다.

소녀는 괴로움을 견딜 수 없어, 그 이후로도 한참이나 가슴을 두드리며 울었다.

아이린의 표정도 망연히 가라앉았다.

이안의 죽음에는 그녀의 책임도 있었다.

호위기사로서 모자랐기 때문에, 그녀가 모시는 주군의 목숨 또한 타인의 자비에 의존해야만 했다.

그래서 아이린은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단지 기사로서 그의 마지막을 추모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자람을 자책하면서.

토굴에서 우연히 사내가 구출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은, 몇 시간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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