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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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의 집중치료실은 적막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몰린 신전 앞과는 대조적인 풍경이었다. 마수들의 습격 사태로 인한 부상자들이 그만큼이나 많았던 탓이었다.
무려 수백이나 되는 마수가 동원된 습격이었다. 시내에 머무르고 있던 민간인까지 포함한다면 그 피해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아직 이 전례 없는 침략의 배후는 알려지지 않았다.
아카데미의 교수들은 무언가 들은 바가 있는지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들을 제외한 군중들은 저마다의 가설을 가지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누군가는 지난 수렵제 때부터 이어진 마수의 이상발생이 이어진 결과라 주장했다.
조금 더 용기 있는 사람들은, 제국 황실이 비밀리에 설치한 생체실험실이 원인이라고 했다.
모종의 사고로 그곳에서 탈출한 마수들이 아카데미를 습격했다는 주장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추론이 있었지만, 정작 아카데미 측의 공식 발표가 없는 이상 이는 공허한 논쟁에 불과했다.
그럴싸한 추론을 내놓기에는 정보가 지나치게 부족했던 탓이었다.
다만 온갖 목격담이 범람하는 그 틈새에서, 유독 눈에 띄는 말소리는 분명히 존재했다.
어느 사내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전장을 종횡무진 누비며 수많은 학생들을 구했는데, 놀랍게도 그중에는 그를 미워하고 괴롭히던 이들이 많았다는 소문이었다.
아카데미의 대부분은 그를 괴롭히는 데 동조했기에 그 풍문이 일으킨 파급효과는 더욱 컸다.
본래 인간이란 누군가가 보이는 의외의 일면에 이목을 빼앗기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그러나 그토록 소란스러운 바깥과는 정반대로, 신전의 내부는 인적이 드물었다.
복도에서 들려오는 소음이라곤 사제들이 급히 걸음을 옮기는 소리밖에 없을 정도였다.
살인적인 업무량이 단번에 쏟아지자 신전은 일단 병문안을 금지시켰다. 일일이 환자들을 관리할 여력조차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조금이라도 부하를 줄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신전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이 안타까워도,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환자의 목숨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신전이라 해도 모든 이들의 출입을 금지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종종 대신전의 권위를 넘어서는 귀빈이 방문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안의 병실에 앉아 있는 소녀도 그러한 인물 중 하나였다.
밤하늘을 닮은 암청빛 머리카락이 고귀한 빛으로 흘러내렸다. 후회와 걱정으로 난도질당한 연회색 눈동자는 흐릿한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제국의 제5황녀, 시엔.
그녀 또한 직전까지 신전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던 차였다. 다행스럽게도 상처는 크지 않아 금세 퇴원을 허락 받았으나, 마지막으로 억지를 부려 이안의 병실에 찾아왔다.
창백한 낯빛을 한 사내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시엔의 심정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나 때문이다.
이 사내는, 시엔의 탓으로 이처럼 핏기 없는 얼굴로 쓰러져 있었다. 물론 그 외에도 스러져 간 이들이 많았다.
시녀장, 호위기사들, 그리고 조금 더 넓게 보면 이 신전에 머무르는 모든 환자들이 그랬다.
암흑교단이 시엔을 노렸다.
오늘의 참사는 그러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이루어졌다. 다행스럽게도 사망자는 얼마 없다고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엔의 자책감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다만 괴로워하는 와중에도 은근히 안심하고 있는, 간사한 제 마음이 못내 미웠다.
그래도 가장 소중한 사람은 살아남았으니까.
난생 처음으로 순수한 호의를 그녀에게 전해준 사람, 그리고 모두를 위해 기꺼이 오명을 뒤집어쓰고 시련을 극복해낸 사내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슬그머니 이안의 뺨을 쓰다듬으려던 시엔은, 야밤의 정적을 파고드는 목소리에 흠칫 몸을 떨었다.
“약물을 과다복용한 탓에 내장은 흐물흐물 녹아내렸고, 골절상은 다수에 내부 출혈도 극심해요. 마지막까지 몸을 움직인 것도 마력으로 이루어낸 기적이라고 봐야겠죠.”
달빛의 커튼을 젖히고 은빛 머리카락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 연분홍빛 눈동자는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 심리는 읽어낼 수 없을 만큼 깊이, 그러나 시엔만큼은 알았다.
지금 성녀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무척이나.
“아니, 사실은 살아남은 것도 기적이에요… 남을 지킬 줄은 알아도, 제 몸 하나 건사할 줄은 모르는 바보죠.”
황녀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성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녀를 책망하는 듯 느껴졌다. 물론 그 자애로운 성녀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시엔은 죄인이 된 심정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성녀는 굳이 더 말을 얹지는 않았다.
다만 팔짱을 낀 채로, 구슬픈 눈빛으로 이안을 내려다보았을 뿐이었다.
황녀가 가까스로 목소리를 짜낼 때까지는 그로부터 한참이나 시간이 필요했다.
“……완치될 수 있을까요?”
“성국과 제국 황실에 요청을 넣어두긴 했어요. 최소한 신성력만으로 치료는 불가능해요. 그동안 치명상을 너무 많이 입어서…….”
거기까지 말한 성녀는 다소 울컥했는지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감정을 제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언제나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던 성녀답지 않은 행동이었으나, 이미 시엔의 세계에는 그녀 자신과 이안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었다.
소녀의 입이 조심스레 열렸다.
“그, 이안 경에 대해서는 아바마마께 제가 잘 말씀드려 볼 테니까…….”
“당연히 그래야죠.”
황녀는 그 싸늘한 목소리에 일순 숨을 들이켰다. 너무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음색이었다.
사내만을 망연히 내려다보던 연회색 눈동자가, 서서히 성녀를 향했다.
그곳에는 차가운 낯빛을 한 여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자애롭고 상냥하던 성녀 따위는 없고, 이글거리며 타는 연분홍빛 눈동자만이 그 적의를 대변했다.
“이게 누구 때문인데.”
그 씹어뱉듯 내뱉어진 말에, 시엔의 눈빛이 멍청해졌다.
너무나 노골적인 감정의 발색이었다. ‘용의 눈’을 쓰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성녀는 지금 황녀를 죽일 듯이 미워하고 있었다.
설마, 그럴 리가.
아무리 그래도 사랑과 희생의 상징이라는 성녀가 아닌가.
시엔은 얼떨떨한 눈치로 고개를 두어 번 흔들었고, 그리고 다시 그 연회색 눈동자가 성녀를 향했을 때 이전에 느껴지던 적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착각이었구나, 황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에도 성녀의 목소리는 아직 음울하기 그지없었다.
“……치료 시간입니다. 이만 떠나주세요, 시엔 자매님.”
그 축객령을 마지막으로, 시엔은 신전 밖으로 나섰다.
우울한 심정이었다.
나중에 이안이 의식을 되찾으면 어떻게 사죄를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아니, 용서는 받을 수 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엔은 이안에게 민폐만 끼치지 않았는가.
심지어는 그 대다수는 시엔의 악의에 의한 계략이었다.
언제나 당당하던 황녀의 어깨가 쳐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울적해져 있던 시엔의 정신을 일깨운 것은, 헐레벌떡 달려온 기사의 목소리였다.
“황녀 전하!”
그 감격에 젖은 목소리를 듣고 황녀는 슬쩍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오늘 아침 지령을 내려 타지로 보냈던 기사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적어도 희생자 하나는 줄어든 셈이었으니까.
그처럼 씁쓸한 사고를 이어가던 황녀의 뇌리에, 마치 걸림돌처럼 틀어박힌 기억이 하나 턱하고 걸려들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내가 무슨 지시를 내렸더라?
시엔의 눈동자가 일순 빛을 잃었다.
“무,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이 또한 황제 폐하의 은덕……!”
“……상단.”
그 두 글자를 내뱉는 황녀의 연회색 동공은,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낯빛이 새하얘진 그녀의 온몸이 덜덜 떨렸다. 경련을 반복하던 가녀린 손이 거칠게 기사의 두 팔을 움켜쥐었다.
“사, 상단… 이안 경의 여동생이 운영한다던 상단! 그거 어떻게 됐어요?!”
시엔은 그렇게 물으며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기사가 길을 떠나던 도중에 무언가 일이 어그러져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던지 하는 답변이 돌아오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기사는 눈치도 없이 충직한 대답음 돌려주었을 뿐이었다.
“아, 그거! 말씀대로 이행했습니다만…….”
휘청거리며, 황녀가 뒷걸음질을 쳤다. 현기증을 느낀 그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기사가 당황하며 한 걸음을 내딛은 그 순간, 황녀의 입에서 벽력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다, 당장 취소시켜요… 당장! 무슨 짓을 해서라도!!”
느닷없이 반전된 지시에 기사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시엔의 기색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녀도 알고 있었다.
이미 시작된 판을 뒤집기는 그보다 배는 어렵다는 사실을.
초조한 마음에 황녀는 숨을 헐떡이며 헛걸음을 반복했다. 주위의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들 전부를 합쳐도 누구 하나만큼의 가치도 없었으므로.
이래서는, 이래서는 안 돼…….
시엔의 눈동자에 점차 절망 어린 물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아직 시엔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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